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해 질 녘의 노을은 세상을 온통 오렌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그 빛을 받은 도시의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야외 테라스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정적을 채우는 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과, 가끔씩 접시 위에서 포크가 부딪히는 맑은 소리뿐이었다. 홍예준은 말없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동안, 그의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안서원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포크로 제 앞에 놓인 딸기 케이크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새하얀 생크림 위에 놓인 새빨간 딸기. 그녀의 하얀 피부와 유난히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왜 하필 이 여자일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귀찮고, 성가시고, 제멋대로인 결함품. 자신의 자유를 앗아간 최악의 변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단단하던 생각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악몽에 시달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 제 서툰 배려 하나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 그러면서도 전장에만 서면 누구보다 강인하게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 그 모든 모순적인 모습들이 그의 권태로운 일상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빨리 뛰는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이 목이 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포크로 크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그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시선을 빼앗기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어쩌면 이건...
“손 안 대고 딸기 먹기!!!!”
…뭐? 홍예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저 여자가 뭐라고 지껄인 거지. 그가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사건은 터졌다. 안서원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조금 전까지 포크로 소중하게 다루던 자신의 딸기 케이크 위로 얼굴을 그대로 처박은 것이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새하얀 크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의 연갈색 머리카락과 얼굴은 순식간에 크림과 딸기 범벅이 되어버렸다. 주변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전부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몇몇은 경악했고, 몇몇은 수군거렸다. 그 모든 소음의 중심에서, 홍예준은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머릿속을 채우려던 간질간질하고 낯선 감정은, 저 요란한 선언과 함께 산산조각 나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쨍,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 여자는 지금 뭘 한 거지. 폭주 전조 증상인가? 아니, 파장은 안정적이다. 그럼 그냥... 미친 건가? S급 센티넬의 기행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저급하고 유치한 행동이었다. 그의 시선이 안서원의 얼굴에 박힌 케이크, 그중에서도 정확히 그녀의 입이 닿았을 법한 위치에 꽂혔다. 새빨간 딸기는 형체도 없이 뭉개져 있었다. 성공한 건가? 아니, 애초에 저게 성공과 실패를 논할 가치가 있는 행위인가? 수만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어떤 것도 지금의 황당함을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안서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양 볼과 코, 이마까지 온통 생크림으로 뒤덮여 있었고, 콧잔등에는 딸기 꼭지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뭉개진 딸기를 먹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홍예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말고 손을 멈췄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이 희대의 코미디에 동참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거냐, 지금.”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간신히 억누른 황당함과 분노, 그리고 아주 약간의 웃음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몇 장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잔뜩 헝클어진 그녀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고, 냅킨으로 얼굴에 묻은 크림을 아무렇게나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험했지만, 그마저도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했다.
“어색해서 그랬어... 분위기가 너무...”
그녀가 크림 묻은 입술로 웅얼거렸다. 어색해서? 분위기가? 홍예준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어색하긴 했다.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 어색함을 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고작 케이크에 얼굴을 처박는 것이란 말인가. 보통의 인간이라면 날씨 이야기나, 오늘 임무가 어땠냐는 식의 시시한 대화를 시도하지 않나? 이 여자의 사고회로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그는 진지하게 해부해보고 싶어졌다. 그는 콧등에 위태롭게 붙어있던 딸기 꼭지를 떼어내며 툭 쏘아붙였다.
“분위기 깨는 데는 성공했네. 아주 박살을 내놨어.”
그의 말에 안서원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닦아냈다. 냅킨 몇 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 귓불 뒤까지 크림은 꼼꼼하게도 묻어 있었다. 그는 결국 냅킨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리고는 계산대로 향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카드를 내밀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이 창피하고 어이없는 장소에서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이 여자와 함께라면, 자신의 평온한 인생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