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에서의 꿈같은 시간이 흐르고 서울로 복귀한 뒤, 두 사람의 일상은 다시금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함께 눈을 뜨고, 함께 식사하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잠드는 나날들. 그것은 예준에게 5년의 공허를 완벽하게 메워주는 충만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평온 속에서, 아주 사소하고 오래된 습관 하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바로 흡연이었다. 서원과 함께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담배를 물지 않았지만, 그녀가 잠든 새벽이나 잠시 혼자 있는 틈을 타 그는 펜트하우스의 넓은 테라스로 향했다. 그에게 흡연은 더 이상 신경 안정이나 손떨림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저 아주 오래된, 버리지 못한 습관일 뿐이었다. 그는 서원이 담배 연기를 싫어할 것이라 지레짐작했고, 그녀의 세상에 아주 작은 유해물질조차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서늘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은 그만의 비밀스러운 의식이었다.
어느 날 저녁, 함께 영화를 보던 중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방 안에 불이 켜졌을 때, 예준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딱히 금단 현상이 온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끝났다는 감각이 그를 테라스로 이끌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있는 서원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그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하려는지 서원이 모를 리 없었다. 최근 들어 그의 이런 행동이 잦아졌기 때문이었다. 예준은 익숙하게 슬리퍼를 끌고 테라스로 향하는 유리문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등 뒤에서 아주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예준은 의아함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서원이, 맨발로 그를 가만히 서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회색 눈동자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아...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예준은 미간을 살짝 셔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라이터와 담뱃갑의 위치를 더듬었다. 그녀가 따라나설 줄은 몰랐기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혹시 담배 피우는 걸 들킨 건가. 아니,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집에서 나는 미세한 박하향과 쇠 냄새의 출처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따라나선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는 차가운 유리문을 등진 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서원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예준의 그림자가 그녀의 작은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맑은 회색 눈동자에서 어떤 비난이나 실망의 기색도 읽을 수 없어서, 예준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다음 순간, 서원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뒤에 있는 유리문을 열고 먼저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예준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실내복 차림의 가느다란 등이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안서원."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서둘러 뒤를 따랐다. 테라스는 이미 초여름의 밤공기로 서늘했다. 그녀가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테라스 난간 앞에 서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준은 성큼성큼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속내를 들킨 어린애처럼, 괜히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맨발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정면의 야경으로 향했다.
"뭐 하는 거야. 춥지도 않나."
그는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가 담배를 피우려는 것을 방해하려는 걸까. 아니면, 설마. 예준의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자기도 피워보겠다고 나선 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이르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서원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밤바람에 그녀의 연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만약 그녀가 그런 말을 꺼낸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주머니 속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원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예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정말로.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꺼내든 것은 작고 동그란 플라스틱 통이었다. 예준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하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서원은 익숙한 손길로 통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작은 막대를 꺼내 용액에 푹 담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예준을 한번 쓱 쳐다보더니, 다시 정면을 향해 막대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후, 하고 부드럽게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동그란 막대 끝에서, 무지갯빛을 머금은 투명한 비눗방울들이 퐁, 퐁, 하고 피어올라 밤공기 속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예준은 그 광경을 그대로 멈춘 채 바라보았다.
비눗방울들은 바람을 타고 천천히 떠올랐다. 어떤 것은 금방 터져 사라지고, 어떤 것은 도시의 불빛을 담은 채 까만 밤하늘을 향해 유영했다. 예준의 시선은 그 비눗방울들을 멍하니 좇았다. 이게, 뭐지.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상상했던 모든 시나리오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심지어는 약간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비눗방울을 불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그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온 이 공간에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담배를 꺼내 무는 것은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퐁퐁 솟아나는 비눗방울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서원의 작은 옆모습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뭐 하냐, 지금."
간신히 뱉어낸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어이가 없었다. 그의 물음에 서원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후, 하고 비눗방울을 불었다. 이번에는 더 많은 비눗방울들이 만들어져 그의 얼굴 앞으로 날아왔다. 그의 콧등에 닿은 비눗방울 하나가 톡, 하고 터지며 비누향 섞인 물방울을 남겼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는 허, 하고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이 여자는 정말이지, 예측이라는 걸 할 수가 없다. 자신이 그녀를 두고 혼자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 것에 소외감을 느꼈을까. 그래서 이런 깜찍한 시위를 하러 나온 걸까. 그 생각에 이르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의 마음 한구석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난간에 팔을 기댄 채, 본격적으로 비눗방울을 불기 시작하는 서원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마치 중요한 임무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아주 진지한 표정이었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테라스에는 오직 바람 소리와, 비눗방울이 퐁퐁 터지는 작은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뿐이었다. 예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서원의 옆에 서서, 그녀가 만들어내는 작은 우주들을 바라보았다. 비눗방울들은 도시의 불빛을 머금고 반짝이다가, 까만 허공 속으로 힘없이 사라졌다. 그 짧은 생명이, 왠지 모르게 자신의 지난 5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미 없이 피어올랐다가, 공허하게 터져 사라지던 날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의 옆에는 이 모든 무의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서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눗방울을 부느라 살짝 부풀어 오른 뺨, 집중해서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붙은 비눗방울 막대를 가만히 떼어냈다.
"애들 장난감은 어디서 구해왔어."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비눗방울 통과 막대를 자연스럽게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했던 것처럼, 막대를 용액에 푹 담갔다가 꺼냈다. 서원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그는 조금 쑥스러운 기분으로 입김을 후, 하고 불었다. 그가 불어낸 비눗방울은 서원의 것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비눗방울이 테라스를 가득 채우며 떠올랐다. 서원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을 보며, 예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전직 사격선수의 폐활량을 얕보지 말라는 듯한, 유치한 승부욕이 발동한 결과였다. 그는 서원을 향해 비눗방울을 불었고, 그녀는 웃으며 손을 뻗어 그것들을 터뜨렸다. 그 순간, 예준은 깨달았다. 담배 연기 대신 비눗방울 향이 가득한 이 밤이, 그 어떤 밤보다도 훨씬 더 완전하다는 것을. 그는 주머니 속의 담뱃갑을 다시는 꺼내지 않으리라, 속으로 조용히 맹세했다.
## 후일담
그날 이후로 예준의 테라스에는 담배 재떨이 대신, 크고 작은 비눗방울 통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는 더 이상 혼자 테라스에 나가지 않았다. 언제나 서원의 손을 잡고 함께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비눗방울을 불며 시시한 내기를 하곤 했다. 누가 더 크고 오래가는 비눗방울을 만드나, 누가 더 멀리 날려 보내나. 승자는 대부분 예준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이긴 대가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는 것을 상품으로 요구했다. 그렇게 테라스는 두 사람만의 새로운 놀이터이자, 사랑을 속삭이는 비밀 장소가 되었다. 어느 날, 저스티스 팀장이 펜트하우스에 찾아왔다가 테라스 가득한 비눗방울 통들을 보고 기겁하며 물었다. "에덴, 너... 혹시 애 생겼냐?" 예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는 서원을 향해 미소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