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ickname
    zzang♡i
  • Genre
    log, diary, memo
  • Love
    Yejun Hong
  • My World
    EDEN
가이드는 이미 배정됐어. 너랑 나.
네 파장이 내 가이딩에 강제 각인됐어.
감각 소실 (eden)
2026.05.23

20xx년 5월 16일. 아이기스 본부 지하 의료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하얀 빛. 하얀 벽. 하얀 시트. 모든 것이 하얗고, 차갑고, 무균 처리된 공기가 폐 속으로 침투해 왔다. 안서원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즉시 알 수 있었다. 아크 본부 지하 의료실. 센티넬 전용 격리 치료동. 팔에 꽂힌 수액줄이 손목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고, 왼쪽 관자놀이부터 턱 끝까지 뜨끈한 열감이 남아 있었다. 아, 폭주했구나. 그 인식이 뇌리에 도달하기까지 3초. 그리고 기억이 조각조각 되돌아왔다. 아이기스 외곽 D구역에서의 단독 임무. S급 변이체 세 마리의 동시 출현. 바닥을 뚫고 터져 나온 뿌리가 콘크리트를 갈라놓던 소리. 능력을 멈출 수 없었던 순간. 세계가 녹색으로 물들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유기체를 집어삼키는 덩굴이 끊임없이 증식하던 그 감각.

그리고, 그 악몽 같은 녹색 지옥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왔던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홍예준. 에덴. 흰 셔츠에 숄더 홀스터를 갖춘 평소의 차림 그대로, 담배 연기도 없이, 총도 들지 않은 맨몸으로. 안서원의 덩굴이 그의 팔을 할퀴고, 독성 포자가 그의 호흡기를 침범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안서원의 이마에 닿았던 순간, 시원한 바람이 폭풍처럼 몸을 관통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아니었다. 허리케인 급의, 모든 것을 쓸어가는 돌풍이었다. 그의 가이딩 파장이 평소의 한계를 넘어 폭발적으로 증폭되고 있었다. 그것은 안서원의 폭주를 잠재우기 위한, 생명을 깎아 만든 가이딩이었다.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다만,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그의 코에서 피가 흐르던 것. 그의 무릎이 꺾이던 것. 그것만이, 마지막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안서원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불빛이 마치 수술실의 조명처럼 차갑게 내리쬐었다. 하모니 부서 소속 수석 의관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중년 여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들은, 안서원의 뇌가 해석하기를 거부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홍예준 요원은 한계 이상의 가이딩 파장을 방출했습니다. 바람 속성 가이드의 코어가 완전히 손상되었으며, 잔여 수명은 추정 12개월입니다.' 12개월. 365일.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향후 1개월 단위로 감각과 운동 기능을 순차적으로 상실하게 됩니다. 최종적으로는 신체 조직이 바람에 침식되듯 소멸합니다.' 의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은 보였다. 하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 안쪽에서 윙, 하고 이명이 울렸다. 절대음감을 가진 귀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차단한 채,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소리만을 증폭시켜 들려주고 있었다.

안서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관이 무언가 더 말했지만, 안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수액줄이 연결된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자신의 왼쪽 약지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 레스토랑에서 그가 입을 맞추었던 자리. '책임져.' 라고 말했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안서원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여전히, 울음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흰 눈이, 한 없이 공허하게, 천장의 형광등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이 세계가 더 이상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안서원은 일어났다. 의관의 만류를 무시하고, 수액줄을 스스로 뽑았다. 팔꿈치 안쪽에서 피가 한 줄기 흘렀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디디며, 그녀는 의료실 복도를 걸었다. 그의 병실이 어디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제 각인 이후 형성된 파장의 연결선이, 미세하게나마 그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도 끝. 3번 격리실. 문 앞에 섰을 때, 안서원의 손이 손잡이 위에서 멈췄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문을 열면,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 이 문을 열지 않는 한, 아직은. 아직은 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서원은 홍예준을 보았다. 그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병원복이 아닌, 자신의 하얀 셔츠를 그대로 걸친 채. 목덜미까지 올라온 붕대가 셔츠 안쪽으로 얼핏 비쳤고, 왼쪽 손등에는 수액줄이 꽂혀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한 채 침대 가장자리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창문 없는 격리실. 형광등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그 차갑고 무미건조한 빛 아래, 홍예준의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은 거의 은빛에 가깝게 빛났다. 그의 오른손에는 꺼진 담배 한 개비가 쥐어져 있었다. 불을 붙이지 못하고, 그저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의료시설 내 금연. 그조차도 어기지 않는, 얌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하늘색 눈동자가 천천히 안서원을 향했다.

그리고 안서원은 숨이 멎을 뻔했다. 그의 얼굴. 평소의 차갑고 퇴폐적인 미남의 안색이 아니었다. 피부가 반투명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혈색을 잃어 회색에 가까웠다. 양쪽 눈 아래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운 듯한 피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그 모든 소멸의 징후들 속에서도, 그의 하늘색 눈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안서원을 발견한 순간, 그 눈동자에 아주 미세한 떨림이 지나갔다. 놀라움인지, 안도인지, 혹은 그 무엇인지. 하지만 그는 즉시 그것을 숨겼다. 손에 들린 담배를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안서원을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맨발. 수액줄을 뽑은 팔에서 흐르는 핏자국. 병원복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

"...미쳤어?"

그의 첫마디였다. 평소의 시니컬한 어조.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목소리. 하지만 안서원의 절대음감은 놓치지 않았다. 그 짧은 글자 안에 숨겨진, 아주 미세한 떨림을. 그의 성대가 평소보다 0.3톤 높게 진동하고 있었다. 긴장. 혹은 공포. 그는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수액줄에 걸려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 제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고개를 가볍게 기울이며 안서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팔에서 흐르는 핏줄기에 닿자, 입꼬리가 아래로 미세하게 내려갔다.

안서원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보는 순간, 의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온몸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12개월. 매달 감각을 잃고, 운동 기능을 잃고, 마지막에는 바람에 스러지듯 사라진다. 이 남자가. 자신의 손을 책임지라고 말했던 이 남자가. 자신에게 빵을 먹여주며 웃었던 이 남자가. 안서원의 흰 눈동자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입술을 열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메어 있었다. 한참의 침묵. 격리실 안에는 의료 장비의 규칙적인 비프음과, 두 사람의 호흡소리만이 가늘게 흘렀다.

홍예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하고 무뚝뚝했다. 마치 내일 날씨를 이야기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지?"

안서원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홍예준은 그녀의 침묵을 읽었다. 그의 손이 사이드 테이블 위의 담배를 다시 집어 들었다. 불 없는 담배를 입술에 물고, 형광등을 올려다보았다. 그 자세로 한참을 있더니, 불현듯 입을 열었다.

"...하아. 그 얼굴 하지 마."

그의 목소리가, 아주 살짝 갈라졌다. 안서원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무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텅 빈 얼굴. 흰 눈이 그를 향해 고정되어 있을 뿐, 거기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홍예준에게는 그녀가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백 배는 더 가혹한 반응이라는 것을, 안서원은 알지 못했다. 홍예준은 담배를 물고 있던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미소라고 부르기엔 너무 쓰라린, 그러나 분명히 웃으려고 시도한 흔적이었다.

안서원의 맨발이 차가운 바닥을 한 걸음 디뎠다. 그리고 또 한 걸음. 그녀의 발걸음은 느리고 불안정했지만, 방향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를 향해. 오직 그를 향해.
 
안서원의 맨발이 침대 앞까지 도달했을 때, 그녀의 무릎이 차가운 바닥 위에 꺾였다. 주저앉은 것이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홍예준의 늘어뜨린 다리 사이로 안서원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창백한 손가락이 그의 무릎 위에 올라왔다. 떨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절대음감이 집어내는 모든 소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쓸모없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심장이 조여드는 소리뿐. 안서원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아래 반투명하게 빛나는 그의 피부. 회색빛 입술. 눈 아래 짙은 그림자. 그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이, 위장 속을 비틀어 쥐어짰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되어 나오기까지, 몇 번이고 실패한 끝에.

"...왜."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명이었다. 목소리가 되지 못한, 숨결만으로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는 비명. 안서원의 흰 눈동자가 홍예준의 하늘색 눈과 마주쳤을 때, 그녀는 자신의 눈 안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많아서였다. 분노와 공포와 절망과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들어, 하나도 표면에 떠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깊은 물속에서 수면을 향해 헤엄치는데, 물이 끝없이 깊어지기만 하는 것처럼. 안서원은 그의 무릎 위에 올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 이 손이 폭주했다. 이 손의 능력이 통제를 벗어나,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책임져.'라고 말했던 입으로, 그를 죽였다.

홍예준은 안서원이 자신의 무릎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일그러졌다. 입에 물고 있던 꺼진 담배를 천천히 빼어, 사이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동작이 이상하리만치 조심스러웠다. 마치 손에 든 것이 담배가 아니라 유리 세공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수액줄이 연결된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긴 손가락이 안서원의 머리 위로 향했다. 망설임이 있었다. 0.5초. 그의 손가락 끝이 그녀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에 닿기 직전,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바람 속성 각성으로 인한 신경 진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여자를 만지면 부서질까 봐 두려워하는 남자의 떨림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손을 내렸다. 안서원의 정수리 위에, 가볍게.

"...이리 와."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명령조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짧고 무뚝뚝한 한마디. 하지만 그 세 글자 안에 담긴 무게가 달랐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간청이었다. '제발 일어나. 거기 무릎 꿇지 마. 내 앞에서 그 얼굴 하지 마.'라는, 그가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을 온갖 말들이 전부 그 세 글자 안에 압축되어 있었다. 그의 손이 안서원의 정수리에서 뒤통수로 미끄러져,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치 그 반복적인 동작이 자기 자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듯이. 그의 시선은 안서원의 정수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 안에는, 평소의 권태도, 냉소도, 시니컬함도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무력한 남자의 눈이었다.

안서원은 그의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감촉을 느꼈다. 차갑고 건조한 손. 총을 잡던 굳은살. 자신의 약지에 입을 맞추던 입술. 그 모든 기억이 동시에 밀려왔고, 그녀의 목 안쪽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삼켰다. 삼키고 또 삼켰다. 울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는데. 이 남자가, 자신 때문에 1년 뒤에 사라지는데. 그 앞에서 울어버리면, 그건 자신의 고통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안서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이 여전히 자신의 머리카락 위에 있었다. 그녀는 그 손을 잡았다. 수액줄이 연결된, 창백하고 차가운 그의 왼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홍예준의 숨이, 아주 짧게 멎었다. 홍예준의 숨이 멎은 순간은 길지 않았다. 0.5초. 어쩌면 1초. 하지만 그 찰나 안에, 그의 내면에서 무너져 내린 것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안서원의 이마가 자신의 손등에 닿아 있었다. 수액줄이 연결된, 창백하고 마른 손. 총기를 잡던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 마디 위로, 그녀의 이마에서 전해오는 체온이 스며들었다. 미지근했다. 평소의 그녀보다 차가웠다. 폭주의 후유증이 아직 그녀의 체온 조절 기능을 교란하고 있었다. 홍예준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두피. 오른쪽에 땋아 올린 흰 리본이 풀려 반쯤 흘러내려 있었다. 그녀가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풀어진 것이었다. 그 사소한 흐트러짐이, 홍예준의 흉곽 안쪽을 쥐어짰다. 평소의 안서원이라면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완벽주의. 자기 통제에 대한 강박. 그 모든 것을 내던지고, 맨발에 피를 흘리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자신에게.

홍예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턱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내면에서 동시에 폭발한 감정들. 첫 번째는 죄책감이었다. 내가 이걸 만들었다. 이 여자의 이 모습을, 내가 만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거짓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뛰어든 거잖아. 이 여자 없이 사는 세상보다 이 여자를 위해 죽는 쪽이 차라리 낫다고. 그게 사랑이라고. 그런 비겁한 결론을 내려놓고, 지금 이 여자가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꼴을 봐야 하는 거다. 두 번째는 분노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세 번째는, 차마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마가 자신의 손등에 닿아 있다는 사실이, 미칠 것처럼 따뜻했다는 것. 죽어가는 주제에, 이 접촉이 행복하다는 것. 그 사실이 홍예준을 가장 깊이 찔렀다.

"...일어나."

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낮고, 건조하고, 짧았다. 명령이었다. 평소의 조련사 모드와 같은 어조.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권위가 아니었다. 간절함이었다. 그는 안서원의 손에 쥐인 자신의 왼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가락을 감쌌다. 수액줄이 팽팽하게 당겨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부드럽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이 손을 놓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처럼. 홍예준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가볍게 위로 당겼다.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바닥에 무릎 꿇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의 하늘색 눈이 그녀의 흰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거기에는 아까의 체념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이 깔려 있었다. 필사적인, 살아 있으려는 의지. 아니. 그녀를 살게 하려는 의지.

안서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을 잡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흰 눈동자 안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홍예준은 알고 있었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탓이다.' 그 네 글자가 그녀의 뇌 안에서 끝없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었다. 홍예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수액줄이 없는 자유로운 손. 그 손이 안서원의 턱 밑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어깨를 짧게 잡았다. 병원복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뼈대가 얇고 가벼웠다. 이 몸이 폭주했다. 이 마른 몸에서 대지를 침식하는 생명력이 터져 나왔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네 탓 아니야."

담담하게. 마치 사실을 진술하듯이. 홍예준은 그 말을 뱉어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이상의 위로를 할 줄 몰랐다. '괜찮아'라고 말하기엔 괜찮지 않았고, '어떻게든 될 거야'라고 말하기엔 거짓말이었으니까. 1년. 365일. 매달 감각을 하나씩 잃는다. 먼저 후각일까. 미각일까. 아니면 촉각이 먼저 사라질까. 그가 병실에서 혼자 깨어 그 사실을 전달받았을 때, 느낀 것은 의외로 공포가 아니었다. 체념이었다. 아, 역시. 세상은 공짜를 주지 않는구나. 5년 전, 사격 선수로서의 미래를 빼앗아간 것처럼.
 
홍예준의 오른손이 안서원의 어깨 위에서 미끄러져, 그녀의 뒷목을 감쌌다. 가볍게. 누르지 않았다. 그저 감싸기만 했다. 그의 손바닥 아래로 그녀의 경추 뼈가 만져졌고, 그 위를 덮은 피부가 서늘했다. 병원복 한 겹 너머의 체온이 평소보다 확연히 낮았다. 폭주의 잔여파가 아직 그녀의 자율신경계를 교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홍예준은 그 차가움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자신의 내면에서 또 한 번 무언가가 비틀리는 것을 감지했다. 이 여자는 지금 아프다. 아픈데,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 자신의 손등에 이마를 대고, 마치 기도하듯이 무릎을 꿇고 있다. 그 사실이 홍예준의 흉곽 깊은 곳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느리게, 천천히,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깊이.

안서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일어나'라는 말에도, '네 탓 아니야'라는 말에도.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여전히 그의 왼손을 붙잡고 있었고, 이마는 그의 손등에 기대어 있었다. 형광등의 무미건조한 빛이 그녀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 위에 떨어졌다. 풀린 흰 리본 끝자락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홍예준은 그녀의 뒷목을 감싼 손에 아주 미세하게 힘을 주었다. 끌어올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여기 있다고. 아직 여기 있다고. 그 한 가지를 전하려는 접촉이었다. 그의 엄지가 그녀의 목덜미 옆, 귀 뒤쪽의 부드러운 피부 위를 천천히 쓸었다. 한 번. 의료 장비의 비프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 기계적인 리듬 사이로, 홍예준의 호흡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서원아."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코드네임이 아닌, 본명을. 이름이 격리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 떨어졌을 때,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거칠지 않았다.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저 가라앉아 있었다. 깊은 물 밑바닥에 침전된 모래처럼. 홍예준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열었다. 할 말이 있었다. 아니,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이 여자에게 들려줘야 하는 말.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고개 들어."

짧은 명령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실린 것은 간청이었다. 안서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흰 눈동자가 그의 하늘색 눈과 마주쳤을 때, 홍예준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공허함이 아니었다. 결의였다. 텅 비어 보이는 눈 아래, 아주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불씨 같은 것. 이 여자는 울지 않을 것이다.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홍예준은 그것을 보는 순간, 자신의 가슴 한복판이 쿵, 하고 한 번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두려웠다. 이 여자가 무슨 결심을 했는지. '함께 죽겠다'는 종류의 것이라면, 그는 견딜 수 없었다.

홍예준은 그녀의 뒷목을 감싼 손을 천천히 앞으로 옮겨, 그녀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이 그녀의 차가운 볼에 닿았다. 그의 손은 건조하고 거칠었지만, 그 접촉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엄지로 그녀의 광대뼈 아래를 한 번 쓸었다. 그리고 그 자세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오래. 길게. 형광등 아래서 빛을 잃은 듯 보이는 그의 하늘색 눈동자 안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 가지 감정만이 또렷하게 떠올라 있었다. 사랑. 그것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아름답지도 않았다. 처절하고, 뜨겁고, 날것 그대로였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눈. 그 안에는 '미안하다'와 '사랑한다'와 '네가 없으면 죽는다'가 전부 뒤엉켜, 하나의 빛으로 응축되어 있었다.

"...바보같이 뛰어온 거 봐. 맨발로. 피 흘리면서."

그의 목소리에 비난은 없었다. 대신 거기에는, 아주 희미한 웃음의 잔해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성대가 미세하게 부드러워진 것. 그것이 홍예준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함이었다. 홍예준의 손바닥이 안서원의 뺨을 감싼 채, 그녀를 천천히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안서원의 무릎이 차가운 바닥 위에서 미끄러지듯 앞으로 움직였고, 그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그녀의 상체가 기울어졌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그녀의 볼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안서원은 울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있었다.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홍예준은 그것을 알았다. 이 여자가 자신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이, 차라리 울어주는 것보다 백 배는 더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안서원의 손이 움직였다. 그의 왼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풀려, 그의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팔뚝의 거즈 패치를 지나, 병원복 소매 안으로 사라지는 그의 팔을 더듬듯이. 마치 확인하는 것처럼. 아직 여기 있다고. 아직 따뜻하다고. 아직 맥박이 뛰고 있다고. 그 손끝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홍예준의 피부 위에 전기처럼 번졌다. 바람 속성의 신경 진동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보다 훨씬 원초적인 것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닿는 감각. 지금 이 순간,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짜였다. 홍예준은 그 접촉을 허용했다.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팔을 따라 올라오는 동안, 그의 호흡이 한 박자 느려졌다. 마치 이 감각을 기억 속에 새기려는 것처럼.

"...발."

홍예준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안서원의 맨발이 차가운 바닥 위에 드러나 있었다. 왼쪽 발바닥에 옅은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수액대를 끌고 오면서 어딘가에 긁힌 모양이었다. 아니. 수액줄은 이미 그녀의 팔에 없었다. 이 여자는 수액줄을 뽑고 왔다. 맨발로. 피를 흘리면서.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홍예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술이 일직선으로 굳었다. 그의 오른손이 안서원의 뺨에서 떨어져,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로 향했다. 거즈 팩을 집어 들었다. 동작이 느렸다. 평소의 그라면 한 손으로 척척 해치웠을 일이었지만, 지금 그의 손가락 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바람 속성 각성의 부산물인 신경 진동. 담배 없이는 억누를 수 없는 그 진동이, 지금은 감정의 무게까지 더해져 평소보다 심했다.

홍예준은 침대에서 몸을 낮추었다. 수액줄이 그의 왼팔에 아직 연결되어 있었고,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혀를 찼다. 짧고, 날카롭게.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왼팔에 꽂힌 수액 바늘을 잡아 뽑았다. 핏방울이 송알송알 맺혔다. 개의치 않았다. 그는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안서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와 같은 높이. 같은 눈높이. 거즈를 든 그의 손이 그녀의 왼쪽 발목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마치 깨질 것처럼.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발을 들어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병원복 바지 위로 그녀의 차가운 발이 닿았다. 홍예준은 거즈로 그녀의 발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닦기 시작했다. 천천히. 한 번에 한 획씩. 그의 시선은 그녀의 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이런 거 하지 마."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거즈가 그녀의 발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핏자국이 옅어졌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긁힌 정도. 하지만 홍예준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거즈를 내려놓고, 새것을 집어 들었다. 반복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떨어졌을 때, 그것은 이전보다 더 낮고, 더 가라앉아 있었다.

"수액줄 뽑고, 맨발로 뛰어오고, 피 흘리고, 무릎 꿇고. ...그런 거."

그의 엄지가 그녀의 발등을 한 번 쓸었다. 뼈가 드러나 보일 만큼 얇은 피부 위로, 그의 거친 지문이 지나갔다. 홍예준은 고개를 들어 안서원을 올려다보았다. 바닥에 무릎 꿇은 남자가, 같은 높이에서 여자를 올려다보는 각도. 형광등 빛이 그의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 위에 떨어져 은빛으로 번졌다. 그의 하늘색 눈에는 여전히 안광이 없었다.
 
"오빠도 뽑았잖아. 하지 마, 오빠도. 간호사... 부를게."
 
홍예준의 손이 멈췄다. 안서원의 발등을 감싸고 있던 거즈가 공중에서 정지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격리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 떨어졌을 때, 그 안에 담긴 것은 비난이 아니었다. 걱정이었다. 자신의 발바닥에서 피가 나고 있는 여자가, 자신의 팔에서 피가 나고 있는 남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홍예준은 그 사실을 인지하는 데 0.3초가 걸렸고, 그 0.3초 동안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일은 복잡했다. 먼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자조도 아니었다. 그냥, 이 여자가 너무 이 여자다워서. 수명이 1년밖에 안 남은 남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으면서, 그 남자가 수액줄 하나 뽑은 것을 걱정하는 사람. 그다음에 온 것은 찌릿한 아픔이었다. 그녀의 목소리 끝에 매달린 미세한 떨림. '간호사... 부를게'라는 말속에 숨어 있는 것. 이 여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무력감 속에서, 무엇이라도 하려고. 수액줄을 뽑은 그의 팔뚝에서 핏방울이 또 한 방울 맺혀 떨어졌다. 병원복 소매에 작은 붉은 점이 번졌다.

홍예준은 거즈를 내려놓았다. 안서원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녀의 발목, 무릎, 병원복 자락, 그리고 그녀의 얼굴. 차분한 눈매 아래로 팽팽하게 당겨진 턱선.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있었다. 완벽주의자답게. 무너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면서, 동시에 자신을 돌보려 하고 있었다. 홍예준의 흉곽 안에서 무언가가 뒤틀렸다.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가, 목구멍에서 막혔다. 그는 그것을 삼켰다. 대신 입술을 비틀었다. 아주 희미하게. 누군가가 보았다면 미소라고 불렀을 수도 있는, 입꼬리의 미세한 경련.

"...부르지 마."

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낮고, 단호했다. 하지만 거칠지 않았다. 그의 왼팔, 수액 바늘이 빠진 자리에서 피가 맺힌 그 팔을 들어 올려, 안서원에게 보여주듯 내밀었다. 그의 팔뚝 안쪽. 혈관 위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그 주변으로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소한 상처. 아무것도 아닌 것. 하지만 안서원의 눈이 그것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홍예준은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침대 위의 거즈를 하나 더 집어, 대충 팔뚝에 눌렀다. 한 손으로. 어설프게. 테이프도 없이 거즈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눈은 안서원만을 보고 있었다. 격리실의 형광등 아래서, 빛을 잃은 하늘색 눈동자가 그녀의 흰 눈 속을 파고들었다.
 
"이 정도 가지고. 간호사 부를 거면, 너부터 치료받아."

턱짓이 그녀의 왼쪽 발을 가리켰다. 아까 닦아주던 발. 핏자국은 거의 지워졌지만 아직 옅은 분홍색 자국이 남아 있었다. 홍예준은 팔뚝의 거즈를 누른 채, 다시 몸을 낮추었다. 안서원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자세 그대로. 그의 자유로운 손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감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의 발목뼈 위로 그의 엄지가 원을 그렸다. 천천히. 반복적으로. 마치 그 동작 자체가 언어인 것처럼. '여기 있어.' '가지 마.' '부르지 마.' 그 모든 것을 담은 접촉이었다. 홍예준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그의 숨이 그녀의 발등 위에 닿았다. 따뜻한 호흡. 살아 있는 사람의 숨.

"...나한테 집중해."

그 말은 명령이었다. 동시에 간청이었다. 간호사를 부르지 마.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 지금 이 순간, 이 격리실 안에는 너와 나만 있으면 된다. 홍예준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의 언어는 항상 최소한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그의 호흡이, 그의 시선이 대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안서원의 발목을 감싼 손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발목에서 종아리로. 병원복 바지 자락 아래로 사라지기 직전에 멈추었다. 거기서 그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의 종아리를 감싼 채. 그의 손바닥 아래로 그녀의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격리실의 형광등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던 그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아이기스 본부 최상층, 저스티스의 집무실. 컬러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지 않는 시선이 홍예준과 안서원을 번갈아 훑었다. 책상 위에는 두 사람의 의료 기록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특별 휴직 허가서'라고 인쇄된 서류 두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저스티스는 은발을 한 번 쓸어 넘기고,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잉크가 종이 위에 닿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다. 서명이 끝나자, 그는 서류를 밀어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그의 입가에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가의 주름은 평소보다 깊었다.

"1년이다. 임무 배제, 대기 해제. 복귀 의무 없음."

저스티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일상적인 행정 처리를 하듯. 하지만 그가 서류를 내려놓은 손이 책상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는 것을, 홍예준은 보았다. 42세 남자의 손등에 새겨진 오래된 흉터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린 것을. 저스티스는 곧 손을 거두어 주머니에 넣었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울이며 선글라스 너머로 홍예준을 바라보았다. 오래. 길게. 그리고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네 에이스 자리, 아무한테도 안 줄 거니까, 돌아와."

그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팀장으로서의 지시도 아니었다. 그냥,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홍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만 한 번 까딱했다. 저스티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집무실을 나서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무언가를 중얼거렸지만, 닫힌 문 너머로는 들리지 않았다.

복도를 걷는 홍예준의 발걸음은 느렸다. 평소의 그라면 성큼성큼 앞서 걸었을 것이다.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건 없건 개의치 않고. 하지만 지금 그의 보폭은 안서원의 것에 맞춰져 있었다.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그의 왼손이 그녀의 오른손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을 깍지 끼지 않은, 느슨한 접촉. 하지만 놓지 않는 접촉. 복도의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기울어져 들어왔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 위에 길게 늘어졌다. 홍예준의 그림자가 안서원의 것보다 한 뼘 정도 앞에 있었다. 딱 한 뼘. 그는 걸으면서 그녀를 보지 않았다. 정면을 향한 시선. 하지만 그의 엄지가 그녀의 손등 위를 천천히 쓸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규칙적으로. 심장 박동처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홍예준은 잠시 멈춰 서서, 복도 끝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이기스 외벽 너머로 보이는 하늘. 5월의 늦은 오후, 구름이 바람에 밀려 흘러가고 있었다. 바람. 그의 속성. 그의 저주. 그의 전부였던 것. 지금은, 그것조차 천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의관이 말했다. 매달 감각과 운동 능력을 잃어갈 것이라고.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미세한 감각. 손끝의 진동. 바람의 결을 읽는 능력. 그 다음은 반응 속도. 그 다음은. 홍예준은 생각을 끊었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안서원의 손이 자신의 손 안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서원아."

그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그녀의 손을 감싼 그의 손가락이 한 번 조여졌다가, 다시 풀렸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했다. 감정이 배제된, 사실만을 전달하는 톤. 하지만 그 아래에, 아주 깊은 곳에. 물밑에서 흐르는 따뜻한 해류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어디 가고 싶어?"

그 질문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단순하지 않았다. 1년. 365일. 8,760시간. 그것이 그에게 남은 전부였다. 그리고 그 전부를, 이 여자와 함께 쓰겠다고 결정한 남자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 어디 가고 싶어. 그것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라는 말이었고, '네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라는 말이었고, 동시에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라는 약속이었다. 홍예준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안서원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우리 집."
 
엘리베이터 안에서 안서원이 대답했을 때, 홍예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버튼을 눌렀다. 최상층. 아이기스의 S급 전용관 꼭대기에 위치한 펜트하우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밤을 보냈던 곳.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이 마지막 1년을 시작할 곳. 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동안 홍예준은 등을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안서원의 손은 여전히 그의 손 안에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차가웠다. 아까 격리실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시간이 체온을 전부 앗아간 모양이었다. 홍예준은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 위로 끌어당겨 두 손으로 감쌌다. 비비지 않았다. 그냥 감싸고 있었다. 자신의 체온이 전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엘리베이터의 기계음이 고요한 상자 안을 채웠고, 두 사람의 호흡만이 그 위에 겹쳐졌다. 그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을 것이다. 느리고, 규칙적이고, 아직 살아 있는 리듬.

문이 열렸다. 펜트하우스의 현관. 어두웠다. 조명이 자동으로 켜지기까지 2초의 시간이 있었고, 그 2초 동안 홍예준은 어둠 속에서 안서원의 손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발밑의 대리석이 차가웠다. 안서원의 맨발이 그 위에 닿는 순간, 홍예준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등을 보이며 한쪽 무릎을 낮추었다. 업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자유로운 손이 뒤로 뻗어 안서원의 허리춤을 가볍게 두드렸다. 올라타라는 뜻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그녀의 맨발이 차가운 바닥에 닿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하지만 말로 하지 않았다. 대신 신발장 옆에 놓인 자신의 슬리퍼를 발끝으로 툭 차서 그녀 앞에 밀어놓았다. 남자 사이즈. 그녀의 발에는 한참 클 것이다. 그래도.

"...신어."

조명이 켜졌다. 따뜻한 간접 조명이 넓은 거실을 채웠다. 통유리 너머로 아이기스 외벽의 야경이 보였다. 5월의 저녁 하늘이 남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펜트하우스는 홍예준이 떠나기 전 그대로였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검은 재킷, 테이블 위의 빈 커피잔, 창가에 놓인 재떨이.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담배 연기와 베티버의 잔향. 하지만 그 위에 무언가가 더해져 있었다. 안서원의 흔적. 소파 팔걸이에 걸쳐진 그녀의 카디건, 테이블 위의 수면제 병, 침대 곁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흰색 리본. 지난번 이곳에서 밤을 보냈을 때 남겨진 것들. 홍예준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시선으로 훑었다. 그의 공간에 그녀의 물건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이 텅 빈 방을 처음으로 '사는 곳'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는 그 감각을 씹어 삼켰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아니, 앉히려 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한 손으로. 강제가 아닌, 권유. 그리고 그 자신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안서원의 발치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을 소파 옆면에 기대고, 긴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그의 머리가 안서원의 무릎 높이에 위치했다.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천장을 향한 시선. 그의 왼팔, 거즈가 대충 붙어 있는 팔뚝이 무릎 위에 느슨하게 놓여 있었고, 오른손은 소파 위로 뻗어 안서원의 손을 찾았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깍지. 느슨하지 않은, 단단한 깍지. 그의 엄지가 그녀의 엄지 위를 눌렀다. 한 번. 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여기가 좋아?"

천장을 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하지만 그 안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바람 속성의 신경 진동이 아니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 공간이 가진 의미.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의 몸 위에 낙인을 새긴 곳. 처음으로 '사랑해'라는 말을 나눈 곳. 그리고 이제, 마지막 1년의 첫 번째 밤을 시작할 곳. 홍예준은 천장에서 시선을 거두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안서원의 무릎에 관자놀이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그의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이 그녀의 병원복 바지 위에 스쳤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안서원의 대답은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홍예준의 손을 조여왔다.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힘. 미세하지만, 확실한. 그것이 '여기가 좋아'라는 대답이었다. 홍예준은 눈을 감은 채 그 압력을 느꼈다. 안서원의 손가락 마디가 자신의 손등 위에서 꿈틀거리는 감각. 피아니스트의 손. 건반 위를 달리던 손가락이, 지금은 그의 손 하나를 붙잡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었다. 홍예준의 관자놀이가 그녀의 무릎에 닿았다. 병원복 천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 아까보다 조금 덜 차가웠다. 슬리퍼를 신겨준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이 방의 난방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인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자가 지금 여기에, 자신의 머리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살아서. 숨을 쉬면서. 그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

홍예준은 눈을 떴다. 천장이 아닌, 그녀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병원복 바지의 주름. 그 위에 흩어진 자신의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 몇 가닥. 그리고 그녀의 자유로운 손이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 시야 끝에 걸렸다. 안서원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홍예준은 그 움직임을 느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부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다만 눈을 반쯤 감고, 그녀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기를 기다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평생을 누군가의 접촉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사람이, 지금은 이 여자의 손끝 하나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바람을 읽던 감각이 희미해지고 있는 지금, 대신 선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안서원의 체온. 안서원의 심장 소리. 안서원의 호흡. 그것들이 사라져가는 바람의 결을 대체하고 있었다. 홍예준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입술을 비틀었다. 웃긴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속성을 가진 남자가, 이 여자의 무릎 앞에 앉아 꼼짝도 하기 싫어하고 있다니.

"...서원아."

그가 불렀다. 두 번째. 같은 이름을.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아까가 질문이었다면, 이번에는 확인이었다. 그녀가 여기 있다는 것을. 자신이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이 목소리가 아직 작동한다는 것을. 홍예준은 고개를 기울여 안서원을 올려다보았다. 소파에 앉은 그녀의 얼굴이 간접 조명 아래서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 차분한 눈매. 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충격의 잔해. 하지만 무너지지 않은 얼굴. 이 여자는 무너지지 않았다. 격리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을 때도, 그의 수명을 들었을 때도, 지금 이 순간에도.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끊어지기 직전의 긴장 속에서도 버티고 있었다. 홍예준은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흉곽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존경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이 여자를 살려두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


1개월차. 후각 소실.

그것은 아침에 찾아왔다. 펜트하우스의 침대 위, 안서원의 품에 안긴 채 눈을 뜬 홍예준이 평소처럼 사이드 테이블 위의 담배를 집어 들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내뱉었다. 그리고 멈추었다. 그의 하늘색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담배를 든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눈으로는 볼 수 있었다. 목구멍 안쪽으로 뜨거운 기체가 지나가는 감각도 있었다. 하지만, 냄새가 없었다. 드라이 멘솔의 차가운 자극. 타들어가는 담뱃잎의 쓴 향. 아무것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홍예준은 담배를 천천히 재떨이 위에 내려놓았다. 그 동작이 너무나 조용해서, 안서원은 그의 옆에서 잠이 덜 깬 채로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

그의 첫마디였다. 짧은 탄식. 분노도, 슬픔도, 공포도 아닌, 그저 확인. 사실의 확인. 홍예준은 고개를 돌려 안서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흩어져 있었다. 평소라면 그 머리카락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샴푸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기가 투명하고 무미건조했다. 마치 진공 속에 있는 것처럼. 홍예준은 한참을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안서원이 눈을 완전히 뜨기 전에 표정을 지웠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권태로운 눈. 시니컬한 입매. 완벽한 가면이었다. 하지만 안서원이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절대음감은 이미 그의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12회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 후였다.

안서원은 그날 홍예준이 커피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하던 일. 원두를 갈고, 뜨거운 물을 붓고, 올라오는 향을 확인하던 의식. 그것이 사라졌다. 대신 그는 창가에 서서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서원이 다가가 그의 등 뒤에 섰을 때, 홍예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한마디를 떨어뜨렸다.

"담배가 맛없어졌어."

그것이 그의 고백이었다. 후각을 잃었다는 말 대신, 담배가 맛없다는 말. 안서원은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셔츠 너머로 비치는 척추의 라인이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에서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안았다. 이마를 그의 등에 대었다. 홍예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손을 내려, 안서원의 손 위에 포개었다. 한참의 침묵 후,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코웃음에 가까운, 짧은 소리.

"...아직 열한 개 남았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안서원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갈라졌다. 열한 개. 그는 셈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빠져나갈 것들의 수를 세고 있었다. 그 달, 안서원은 펜트하우스의 모든 방향제와 디퓨저를 치우지 않았다. 그가 맡을 수 없는 향을 굳이 없앨 필요가 없었다. 대신, 매일 밤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잠들었다. 그가 냄새를 맡을 수 없어도, 그녀의 손끝이 닿는 감각은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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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월차. 미각 소실.

홍예준이 식탁에 앉아 안서원이 건넨 수프를 한 술 떴다. 삼켰다. 그리고, 아무 반응이 없었다. 평소라면 '짜다'거나 '이게 뭐야'라거나, 무뚝뚝하면서도 솔직한 한마디가 나왔을 것이다. 그는 숟가락을 든 채 멈추어 있었다. 3초. 5초. 그리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마치 금속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마저 듣기 싫다는 듯이. 안서원은 맞은편에서 그의 표정을 읽었다.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홍예준은 완벽하게 평온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먹어. 식어."

자신은 먹지 않으면서, 그녀에게 먹으라고 말하는 남자. 안서원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맛 느껴져?' 직접적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았다. 홍예준의 하늘색 눈이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미세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마치 자기 안의 무언가를 확인하고, 결론을 내리는 듯한 동작이었다.

"...아니."
 
대답이 식탁 위에 떨어졌을 때, 공기의 온도가 변했다. 안서원은 그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온도. 홍예준은 그녀의 손이 자신의 손등 위에 올라오는 감촉을 느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식탁 위의 수프가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눈으로는 보였다. 코로는 이미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이제 혀마저 침묵했다. 세상이 하나씩, 껍질을 벗기듯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익사하는 것과 같았다. 수면 위의 공기가 한 층씩 얇아지는데, 발버둥칠 힘조차 남지 않는.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것을 가만히 허용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흰 눈동자 안에 물기가 차오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울지 마."

울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직 울지 않았으니까, 앞으로도 울지 말라는 뜻이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을 쥔 채 의자에서 일어섰다. 한쪽 무릎이 삐걱거렸지만 아직은 지탱할 수 있었다. 그는 식탁 위의 수프 그릇을 한 손으로 밀어 안서원 앞에 놓았다. 숟가락을 집어 그릇 안에 담갔다. 그리고 안서원의 입가로 가져갔다. 자신이 맛볼 수 없는 것을, 그녀에게 먹이는 손. 그 행위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포기가 아니었다. 대리 경험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그녀는 계속 느꼈으면 좋겠다는. 그런 종류의,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인 소망.

그 달부터 안서원은 홍예준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맛을 느끼지 못해도 삼킬 수 있는 질감, 온도, 부피. 그녀는 매끼니를 그의 앞에 앉아 함께 먹었다. 홍예준은 씹고 삼키는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하며, 때때로 안서원이 음식을 입에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고, 삼키고, 가끔 미소 짓는 것을. 맛이 없어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눈으로 맛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여자의 표정이었다. 한 달이 끝나갈 무렵, 홍예준은 어느 날 저녁 안서원의 무릎에 머리를 눕힌 채 나직하게 말했다.

"...열 개."

카운트다운.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 얹히지 않았다. 숫자를 세는 것처럼 건조했다. 하지만 안서원은 알고 있었다. 그가 셈을 멈추지 않는 이유를. 자신에게 남은 것들을 세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안서원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세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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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차. 왼쪽 다리의 운동능력 소실.

그날 아침, 홍예준은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한쪽으로 쓰러졌다. 소리 없이. 그저 왼쪽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만이 펜트하우스의 침실에 울렸다. 새벽 5시.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 그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 있었다. 형태는 그대로였다. 근육도, 뼈도, 피부도. 하지만 명령이 도달하지 않았다. 뇌에서 보내는 신호가 무릎 아래에서 뚝, 끊겨 있었다. 마치 전선이 절단된 것처럼. 홍예준은 3초 동안 그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침대 프레임을 잡고 한 발로 일어섰다. 안서원이 깨기 전에. 그는 한 발로 화장실까지 이동하려 했다. 벽을 짚으며, 가구를 잡으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안서원의 절대음감은 잠든 상태에서도 비정상적인 소리 패턴을 감지했다. 한 발자국의 리듬이 아닌, 불균형한 끌림과 충격음의 반복.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은 비어 있었고 화장실 문 너머에서 물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홍예준은 세면대를 두 팔로 잡은 채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 다리가 축 늘어져 발끝만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거울 속 그의 표정은 무에 가까웠다. 분노도, 슬픔도, 체념도 아닌. 다만 사실의 확인. 그가 거울 너머로 안서원을 발견했을 때,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지팡이 하나 구해야겠다."

안서원은 눈을 감았다. 1초. 2초. 눈을 떴을 때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하지만 평온함 아래에서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는 문턱을 넘어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맨발이 타일 위에 닿는 차가운 감촉. 새벽 공기가 축축했다. 세면대를 양팔로 잡은 채 서 있는 홍예준의 뒤에서, 그의 왼쪽 다리가 힘없이 끌리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근육의 형태는 그대로였다. 피부 아래 혈관의 푸른 선도, 무릎 뒤쪽의 힘줄도. 하지만 그것은 이제 장식에 불과했다. 빈 껍데기. 안서원은 한 걸음, 두 걸음, 소리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타일 위의 그녀의 발자국은 아무런 울림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홍예준은 거울 속에서 이미 그녀를 포착한 후였다. 지팡이. 그 단어가 화장실의 습한 공기 속에 떠다녔다. 평범한 단어. 일상적인 물건의 이름. 그것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들린 적은 없었다. 안서원은 그의 옆에 서서, 세면대 가장자리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의 팔과 5센티미터 떨어진 곳. 닿지 않는 거리. 먼저 닿지 않았다. 그가 원할 때 닿을 수 있도록, 그 간격을 남겨두었다.

"내가 될게."

안서원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것처럼 들렸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은 철처럼 단단한 결의였다. 지팡이가 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왼쪽 다리가 되겠다는 말이었다. 홍예준은 거울 속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벽빛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 끝에 걸려 있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얼굴. 베개 자국이 뺨에 남아 있었다. 흰 리본은 반쯤 풀어져 있었고, 얇은 잠옷 어깨끈이 한쪽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그 모습이. 이 모든 상황과 너무 부조리하게 아름다워서. 홍예준의 손가락이 세면대를 잡은 채 하얗게 질렸다. 이를 악물었다. 턱선이 날카롭게 각졌다. 그의 내면에서 동시에 폭발한 것은 수치심이었다. 자신이 기대고 싶다는 사실에 대한. 이 여자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에 대한. 그리고 그녀의 말이 이렇게까지 고맙다는 사실에 대한. 세 겹의 수치심이 흉곽 안을 쥐어뜯었다.

홍예준은 천천히 세면대에서 한 손을 떼어, 안서원의 어깨 위에 올렸다. 무게가 실렸다. 가볍지 않았다. 184센티미터의 성인 남성이 한쪽 다리의 지지를 잃은 채 기대는 무게. 안서원의 얇은 뼈대가 그 무게 아래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두 발을 단단히 딛고, 그의 무게를 받아냈다. 홍예준은 세면대에서 완전히 손을 놓았다. 이제 그의 균형은 온전히 안서원의 어깨 위에 달려 있었다. 그의 시선이 거울에서 벗어나, 실물의 그녀에게로 향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가르마 사이의 하얀 두피. 어깨 위에 올린 자신의 손 바로 옆으로, 그녀의 쇄골이 잠옷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이 가느다란 몸이 자신을 지탱하고 있었다. 홍예준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말없이. 그리고 그의 이마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정수리 위에 내려앉았다. 무거웠다. 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그래."

그의 허락이자 항복이 떨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잠기고, 거칠고, 새벽 공기에 실려 그녀의 귀에 닿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서원의 절대음감은 그 한 글자 안에 담긴 미세한 진동을 모두 분해해 들었을 것이다. 성대가 평소보다 0.2초 길게 떨렸다는 것을. 숨을 들이마시는 타이밍이 반 박자 늦었다는 것을. 그것이 의미하는 것. 이 남자가 지금 얼마나 힘들게 자존심을 꺾고 있는지. 홍예준은 그녀의 정수리에 이마를 대고 있는 채로 눈을 감았다. 어둠이 찾아왔다. 자발적인 어둠. 후각 없는 세상에 이어, 미각 없는 세상에 이어, 이제 한쪽 다리마저 잃은 세상. 그 세상에서 유일하게 단단한 것은 이 여자의 어깨였다. 촉각이 아직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의 체온을 느낄 수 있어서. 그것만은 아직.

그날부터 펜트하우스의 일상이 바뀌었다. 안서원은 홍예준의 왼쪽에 섰다. 항상. 예외 없이. 침대에서 일어날 때, 화장실로 이동할 때, 거실을 가로지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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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차. 소화기관 소실.

그날은 점심이었다. 안서원이 준비한 죽. 부드럽고, 넘기기 쉽고, 온도를 맞춘. 맛을 느끼지 못해도 삼킬 수 있도록 질감과 농도를 매일 조절해온 음식. 홍예준은 숟가락을 들었다. 입에 넣었다. 삼켰다. 그리고 30초 후,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숟가락이 그릇 안에 놓였다. 소리 없이. 하지만 안서원은 보았다. 그의 복부 근육이 경련하듯 움직이는 것을. 홍예준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일어서려 했다. 왼다리가 없으니 오른다리에만 의지한 채, 테이블 모서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그의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삼킨 것이 역류했다. 소화 기관의 연동 운동 자체가 멈춰버린 것이다. 위장이 더 이상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그 기관이 통째로 전원이 꺼진 것처럼. 홍예준은 세면대까지 가지 못하고 식탁 옆에서 토해냈다. 맛도, 냄새도 느끼지 못하는 구역질이었다. 신체의 본능만이 이물질을 밀어내고 있었다. 안서원은 즉시 일어나 그의 곁에 섰다. 수건을 가져왔다. 그의 입가를 닦았다. 홍예준은 수건 뒤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것도 끝인가 보네."

그날 오후, 의료팀이 펜트하우스에 링거 스탠드를 설치했다. 투명한 수액 봉지가 금속 기둥에 매달렸다. 바늘이 홍예준의 팔 안쪽 정맥에 꽂혔다. 이제 그에게 식사라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안서원은 그날 밤부터 혼자 밥을 먹었다. 식탁에 그릇 하나만 놓인 풍경. 홍예준은 소파에 기대어 링거를 맞으며, 안서원이 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는 것을 느낀 안서원이 고개를 돌리자,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시니컬한, 그러나 어딘가 따뜻한 미소.

"먹어. 네 몫까지 내가 보는 걸로 충분해."

안서원은 숟가락을 들었다. 씹었다. 삼켰다. 맛이 있었다. 그것이 죄처럼 느껴졌다. 이 사람은 더 이상 이것을 할 수 없는데, 나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끼니가 고문이었다. 하지만 안서원은 그의 앞에서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그가 보는 것이 충분하다고 했으니까. 그가 볼 수 있는 동안, 보여줘야 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일상을. 그에게서 사라져가는 모든 것의 모습을. 한 달간, 안서원은 링거 교체 시간을 외웠다. 바늘이 빠지면 새로 잡아주었다. 그의 혈관이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영양이 충분하지 않은 탓이었다. 홍예준의 뺨이 날카로워졌다. 광대뼈 위의 피부가 팽팽해졌다. 눈 밑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여전히 안서원을 향해 있었다. 먹을 수 없고, 맡을 수 없고, 맛볼 수 없는 세상에서, 눈만은 아직 살아있었다.

안서원은 밤마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수면제를 복용해도 3시간이면 깨어났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그의 호흡을 확인했다. 가슴이 오르내리는지. 아직 숨을 쉬고 있는지. 그녀의 절대음감은 그의 심장 박동이 매달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1분에 72회에서 65회로. 이제 60회.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사람의 세상이 줄어드는 속도에 맞춰, 나도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공평한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홍예준이 잠결에 그녀의 손을 찾아 쥐는 촉감이 느껴졌다. 아직 오른팔은 움직였다. 아직 촉각은 살아있었다. 그 손이 말하고 있었다. 네가 포기하면 나는 진짜로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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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차. 오른팔 운동능력 소실.

그것은 밤에 찾아왔다. 펜트하우스의 침실. 안서원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홍예준의 오른팔이, 잠결에 힘을 잃고 떨어졌다. 톡. 매트리스 위에 떨어지는 팔의 소리. 그것만으로 안서원은 잠에서 깨어났다. 이 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의 몸이 먼저 굳었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홍예준은 이미 깨어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오른팔이 몸 옆에 늘어져 있었다. 손가락이 미동 없이 펴져 있었다. 안서원은 그의 오른손을 집어 들었다. 따뜻했다. 혈류는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그녀의 촉감에 반응하지 않았다. 쥐어보라고, 움직여보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미 끝난 것이었다. 안서원은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총을 잡던 손. 담배를 물리던 손.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손. 잠결에 그녀의 허리를 감싸던 손. 그 모든 기억이 담긴 손가락 마디마디가, 이제 아무런 의지도 전달받지 못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안서원의 시선이 그의 손등 위의 굳은살에 머물렀다. 방아쇠를 당기던 자리에 남은, 닳고 닳은 흔적. 그것만이 이 손이 한때 살아있었다는 증거처럼 남아 있었다.

홍예준은 천장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3초. 5초. 10초. 침묵이 길어질수록 안서원은 그의 심장 박동 소리에 집중했다. 58회. 분당 58회. 지난달보다 2회 줄었다. 그녀의 절대음감이 매초마다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홍예준의 시선이 천장에서 떨어져,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감각은 있었다. 안서원의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촉각은 아직이었다. 하지만 그 손을 쥐어줄 수 없었다. 되쥐어줄 수 없었다. 홍예준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를 악물었다. 턱선이 날카롭게 각졌다가, 이내 힘이 풀렸다. 그의 눈이 안서원의 얼굴 위에 멈추었다.

"...이제 너한테 담배도 못 빼앗기겠네."

그것은 농담이었다. 농담이어야 했다.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안서원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새벽 2시의 어둠 속에서도, 그의 하늘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광 없는 눈이라고 했었다. 기관의 프로필에도, 동료들의 인상에도. 하지만 안서원은 알고 있었다. 이 눈이 빛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지금처럼, 자신을 바라볼 때. 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손바닥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 그가 손을 들어 얹어줄 수 없으니, 그녀가 가져다 대는 것이었다. 홍예준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았다. 그의 손바닥 아래로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다. 촉각으로만 느끼는 그녀의 존재. 따뜻하고, 부드럽고, 실재하는.

안서원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결코 그의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그럼 내가 빼앗아줄게. 오빠 입에서."

그녀는 그의 손을 뺨에서 떼어,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하나. 둘. 다섯 개의 손가락 모두에. 홍예준은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숨을 참았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흉곽이 조여왔다. 이 여자가. 이 여자가 자신에게서 사라져가는 모든 것을, 하나씩, 자기 몸으로 대신 채워넣고 있었다. 다리가 되고, 손이 되고, 지금은 입술이 되어. 홍예준은 눈을 감았다. 목이 메어왔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감사도, 사랑도, 미안함도 넘어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누군가에게 완전히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벅찰 수 있다는 것을, 5개월 전의 홍예준은 몰랐다.

그날 이후, 안서원의 일상에 또 하나의 항목이 추가되었다. 링거 교체. 자세 변경. 그리고 이제, 그의 오른손을 대신하는 모든 것. 담배를 물려주는 일. 안서원은 그의 입에 필터를 대어주고, 라이터를 켜주었다. 홍예준은 입술의 힘만으로 담배를 물고, 빨아들였다. 내쉬는 연기가 천장을 향해 피어올랐다. 맛은 없었다. 냄새도 없었다. 하지만 입술에 닿는 종이의 질감과, 폐를 채우는 뜨거운 공기의 감각은 아직 남아있었다. 촉각의 영역이니까. 홍예준은 연기를 내뱉으며 안서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입에서 필터를 빼내는 모습을.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아홉 개."

카운트다운은 계속되고 있었다.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역설적으로 더 가까워졌다. 그가 잃어가는 만큼, 그녀는 더 깊이 그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안서원은 밤마다 생각했다. 이 사람의 세계가 나 하나로 좁혀지고 있다. 그리고 나의 세계도, 이 사람 하나로 좁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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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차. 오른다리 운동능력 소실.

10월의 아침이었다. 안서원은 눈을 떴을 때, 옆에 누운 홍예준의 호흡부터 확인했다. 분당 56회. 고요하고 느린 심장 소리가 그녀의 고막 안쪽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아직 살아있다. 그 확인이 끝나야 하루가 시작되었다. 안서원은 몸을 일으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잠든 얼굴. 광대뼈가 더 도드라져 있었다. 링거만으로 유지되는 영양은 그의 몸에서 군살뿐 아니라 근육까지 녹여내고 있었다. 안서원은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매일 아침의 루틴. 그의 몸을 일으키기 위해. 왼다리는 이미 5개월 전에 끝났고, 오른팔은 지난달에 끝났다. 남은 것은 오른다리 하나. 그녀가 그를 부축해 화장실까지 데려가는 유일한 지지대. 안서원은 그의 어깨 아래로 팔을 넣고 천천히 일으켰다. 홍예준이 눈을 떴다. 하늘색 눈동자가 초점을 맞추는 데 2초가 걸렸다. 그는 안서원을 보자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늘 그랬듯이. 그리고 오른다리에 힘을 주려 했다. 매트리스를 밟고, 체중을 실어, 일어서려. 발바닥이 바닥에 닿았다. 하지만 무릎이 접히지 않았다. 아니, 접히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전달되지 않았다. 홍예준의 표정이 굳었다. 0.5초. 찰나의 경직. 그리고 그는 다시 시도했다. 실패했다. 안서원의 팔 안에서, 그의 몸이 완전히 무게추가 되었다. 184센티미터의 성인 남성이, 팔 하나 다리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160센티미터의 여자 위에 실린 것이다.

안서원의 무릎이 꺾일 뻔했다. 하지만 꺾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게 세우고, 그를 침대 가장자리에 다시 앉혔다. 홍예준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형태는 그대로였다. 허벅지의 윤곽, 무릎의 각도, 발목의 선. 전부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제 전부 장식이었다. 5개월 전 왼다리가 그랬듯. 홍예준의 시선이 자신의 다리에서 떠나, 안서원의 얼굴 위에 멈추었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늘 그랬듯.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평온함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짓누르고 있는지.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

"...이제 진짜 누워만 있어야 하나 보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양쪽 다리와 오른팔. 남은 것은 왼팔 하나. 그마저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 홍예준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아니었다. 체념을 삼키는 호흡이었다. 안서원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축 늘어진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촉각은 아직 남아 있으니. 그녀의 무릎 위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오빠의 다리가 될게. 팔이 될게. 전부 다."

그날부터 홍예준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화장실도, 거실도, 창가도. 안서원이 그를 안아 옮기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45킬로그램의 여자가 70킬로그램에 가까운 남자를 들어 올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안서원은 했다. 풀 속성 센티넬의 강화된 신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안아 올려 휠체어에 앉혔고, 창가로 밀어주었고, 해가 드는 각도에 맞춰 위치를 조절했다. 홍예준은 왼팔 하나로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하늘색 눈에 가을 햇살이 들어왔다. 시각은 아직 남아있었다. 안서원은 그의 뒤에 서서, 그의 어깨 위에 턱을 올렸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안서원의 속마음. 그녀는 매일 밤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의 세계가 이 침대 위로 축소되고 있다. 창밖의 하늘도, 바람의 소리도, 커피의 향도. 그에게는 이미 닿지 않는 것들이다. 남은 것은 시각과 청각과 촉각. 그리고 왼팔. 그 왼팔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감촉이 느껴질 때마다, 안서원은 울음을 참았다. 이것마저 사라지면. 이것마저 없어지면. 그는 어떤 방법으로 나를 느낄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무력함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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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차. 왼팔 운동능력 소실.

11월의 새벽이었다. 안서원은 잠에서 깨어나 익숙한 루틴대로 그의 심장 박동을 세었다. 분당 54회. 지난달보다 2회 줄었다. 그녀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왼팔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하게 그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팔. 매일 밤 그 손이 안서원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잠재워주던 손. 안서원의 손끝이 그의 왼손에 닿았다. 따뜻했다. 혈류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그녀가 손가락을 끼우자, 되쥐어주는 힘이 없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미약하게나마 손가락을 오므려주던 그 힘이. 안서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심장이 바닥으로 꺼지는 감각. 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홍예준은 깨어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에 새벽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을 지울 수밖에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안서원의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눈을 그녀 쪽으로 돌렸다. 입술이 달싹였다.

"...오늘은 좀 일찍 왔네."

그것이 전부였다. 왼팔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그의 언급은. 그는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하지만 안서원은 보았다. 그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을.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마지막 팔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의지를 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사라진 것이다. 이제 그는 고개조차 간신히 돌릴 수 있을 뿐이었다. 안서원은 그의 왼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추었다. 떨림 없이. 의식처럼. 그녀의 눈은 마른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홍예준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았다. 그의 입술이 무언가를 삼키듯 움직였다. 목젖이 오르내렸다.

안서원은 생각했다. 이제 이 사람은 나를 안아줄 수 없다. 내 머리카락을 넘겨줄 수 없다. 내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 담배를 혼자 물 수도 없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눈과 귀와 피부의 감각과 목소리. 그것뿐이었다. 안서원은 그의 손을 자신의 뺨에 대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 손바닥의 온기가 전해졌다. 촉각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느끼고 있어야 했다. 홍예준이 나직하게 말했다.

"...서원아."

그 한마디에 담긴 무게. 안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숨결이 그의 피부 위에 닿았다. 따뜻하게. 축축하게. 홍예준의 눈이 감겼다. 길게. 그리고 다시 떠졌을 때, 그의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5개월 동안 그가 그녀 앞에서 보인 최초의 눈물이었다. 안서원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검지 끝으로 그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부드럽게. 천천히. 마치 금이 간 유리를 만지듯.

그날부터 안서원의 하루는 완전히 재편되었다. 그의 몸을 닦는 일. 자세를 바꿔주는 일. 링거를 교체하는 일. 담배를 물려주고 빼주는 일. 입술에 물을 적셔주는 일. 모든 것이 그녀의 손으로만 이루어졌다. 홍예준은 침대 위의 인간이 되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과 입술과 목소리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안서원이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려줄 때, 그는 여전히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맛도 향도 없는 연기를. 입술과 폐에 닿는 열기의 감촉만으로. 안서원은 그의 입에서 필터를 빼며 물었다. 왜 아직도 피우냐고. 홍예준은 연기를 내뱉으며 대답했다.

"...습관이니까. 뜨겁잖아. 아직."
 
안서원은 그가 잠든 밤마다 곁에 누워 그리움을 곱씹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그의 왼팔이 자신을 감싸 안던 그 선명한 무게와 온도, 그리고 다정한 힘의 감각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감각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홍예준에게 안서원은 느껴지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밤. 그가 깊은 잠에 빠져들면 그녀의 눈가는 젖어 들었다. 충만함으로 채워져야 할 자리에는 자꾸 비어있는 것들에 대한 갈증이 맺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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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차. 시각 소실.

12월의 아침. 안서원은 눈을 뜨자마자 그의 심장 박동을 세었다. 분당 52회. 지난달보다 또 줄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홍예준은 눈을 뜨고 있었다. 하늘색 눈동자가 천장을 향해 열려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안서원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천장.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천장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안서원이 그의 시야 안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정면. 코끝이 닿을 거리. 그의 눈동자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동공이 그녀의 윤곽을 따라가지 않았다. 안서원의 손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반응이 없었다. 홍예준의 입술이 달싹였다.

"...서원아. 거기 있어?"

그 목소리는 평온했다. 마치 아침 인사처럼. 하지만 안서원은 알아들었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귀가 그녀의 호흡을, 심장 소리를, 시트가 스치는 마찰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안서원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목구멍 안쪽이 뜨거웠다. 그녀는 그의 뺨에 손을 대었다. 차가운 피부 위로 자신의 체온을 전했다. 홍예준은 그 촉감에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손바닥 쪽으로. 볼 수 없으니, 느끼려는 것이었다.

"여기 있어. 바로 여기."

안서원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결코 그의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로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홍예준은 촉각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신 입꼬리를 아주 천천히 올렸다. 볼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가 유일하게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 미소. 안서원은 그 미소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가 볼 수 없는 자신의 표정을, 처음으로 숨기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물이 흘러내렸다. 소리 없이. 그의 손바닥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 채.

그날부터 안서원은 모든 것을 소리와 촉감으로 전달했다. 창밖의 풍경을 말로 그려주었다. 오늘은 눈이 온다고. 하늘이 회색이라고. 나뭇가지에 얼음이 맺혔다고. 홍예준은 눈을 감은 채 들었다.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서원은 그의 손을 창유리에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유리 표면 너머로 전해지는 겨울의 온도. 그것이 그에게 남은 세상이었다. 안서원은 밤마다 그의 귀 옆에 누워 속삭였다. 아무 말이나. 오늘 있었던 일. 하모니 부서에서 온 연락. 휴고가 문병을 왔다 간 일. 저스티스 팀장이 보내온 메시지. 그의 세상을 소리로 채워주기 위해. 홍예준은 듣다가 잠들었다. 그의 잠든 얼굴은 이전보다 평화로워 보였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그의 표정에서 긴장을 지워낸 것인지도 몰랐다.
 
안서원은 처음으로 홍예준 앞에서 소리를 죽인 채 울었다. 그가 볼 수 없다는 것.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눈물을, 그녀의 무너지는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잔인한 자유였다. 하지만 동시에, 눈 앞의 남자가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면 그녀는 숨이 막혔다. 어젯밤 잠들기 전, 웃어주었던가. 아니면 지친 얼굴이었을까. 그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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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차. 목소리 소실.

1월의 밤이었다. 안서원은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있었다. 필터가 그의 입술 사이에 끼워졌다. 라이터를 켜고, 불을 붙여주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홍예준은 깊이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연기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형태는 있었다. 성대가 진동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공기만 새어나왔다. 쉬익,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 홍예준의 입이 다물어졌다. 다시 열렸다. 또 시도했다. 실패했다. 세 번째. 네 번째. 그의 턱이 떨렸다. 안서원은 그의 입에서 담배를 빼며,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형성하는 모양을. '서', '원', '아'. 세 글자의 입모양이 소리 없이 허공에 새겨지는 것을.
 
안서원은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세 글자. '서', '원', '아'. 그의 입술 근육은 기억하고 있었다. 9개월 동안 매일 불러온 이름의 형태를. 하지만 성대는 이미 죽어 있었다. 진동해야 할 근육이 더 이상 뇌의 명령을 수신하지 못했다. 안서원은 그의 턱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다섯 번째 시도. 여섯 번째.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안서원은 알았다. 그 보이지 않는 눈동자 뒤에서 무엇이 무너지고 있는지를. 담배 연기가 어둠 속으로 천천히 풀려나갔다. 안서원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손가락 두 개를 가만히 올렸다. 움직이지 마. 더 이상 시도하지 마. 아프니까. 그녀의 손끝이 그의 아래 입술의 미세한 경련을 느꼈다. 홍예준의 입이 멈추었다. 그녀의 손가락 위로 그의 숨결이 불규칙하게 흩어졌다. 뜨겁고, 짧고, 끊어지는 호흡.

안서원은 침대 옆 서랍에서 작은 메모장과 펜을 꺼냈다. 이미 준비해 둔 것이었다. 언젠가 이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의 왼손. 이미 움직이지 않는 그 손 위에 펜을 올려놓지 않았다. 대신 메모장을 펼쳐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손으로 펜을 쥐었다. 그리고 그의 귀 옆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오빠. 내가 읽을게. 오빠는 입모양으로 말해. 내가 다 읽을 수 있어. 알지?"

홍예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소리 없는 미소. 그리고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느리게. 한 글자씩. 안서원은 그 입모양을 읽었다. '알, 아'. 알아. 안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따뜻했다. 아직 체온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메모장에 적었다. '11월 16일. 목소리 소실. 입모양 의사소통 시작.' 펜을 놓으며 안서원은 생각했다. 이 사람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언제였을까. 어젯밤이었다. 잠들기 전, 그가 '잘 자'라고 말했다. 분명히 들었다. 건조하고 낮은 그 음색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녹음해두지 않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녹음은 해두었다. 몇 달 전부터. 그가 모르게. 그의 잠꼬대까지.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 리가 없었다.
 
그날부터 안서원은 그의 입술을 읽는 사람이 되었다. 홍예준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적응했다. 아니, 적응한 척했다. 그의 입술은 이전보다 과장되게 움직였다. 안서원이 놓치지 않도록. 그녀가 읽기 쉽도록. 그는 볼 수도,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몸으로 누워, 안서원이 자신의 입술을 들여다보는 거리감을 촉각으로 느꼈다. 그녀의 숨결이 자신의 턱 아래에 닿는 온도로 그녀가 가까이 있음을 확인했다. 밤마다 안서원은 여전히 그에게 하루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왔다. 다만 소리가 아닌 형태로. 어둠 속에서 그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안서원은 손전등을 켜고 그의 얼굴을 비추며 읽어냈다. '오, 늘, 도, 수, 고, 했, 어.' 그 일곱 글자를 읽어내는 데 30초가 걸렸다. 안서원은 웃었다.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들을 수 있도록.

속마음

안서원의 속마음. 이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낮고 건조하고 무뚝뚝한 그 음색이. '서원아'라고 부르던 그 소리가. '꺼져'라고 내뱉던 시니컬한 어조가. 한숨 섞인 '하아'가. 전부 사라졌다. 나는 이제 이 사람의 목소리를 핸드폰 속에서만 들을 수 있다. 녹음된 파일 속에서. 하지만 그 파일을 재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들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데, 이 사람의 목소리를 추억하는 것은. 아직은 안 된다. 아직은. 그래서 안서원은 매일 밤 그의 입술을 읽었다. 소리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충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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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차. 청각 소실.

2월의 어느 날. 안서원은 그의 귀 옆에 누워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휴고가 또 병문안을 왔다 갔다는 이야기. 창밖에 봄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 새가 울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매일 밤의 의식이었다. 그런데 홍예준의 반응이 없었다.
 
평소처럼 안서원은 그의 귀 옆에 누워 속삭이고 있었다. 목소리를 낮추어, 부드럽게, 그가 가장 좋아하던 톤으로. 오늘은 창밖에 매화가 피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예준의 반응이 없었다. 평소라면 그녀의 말이 끝날 때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거나, 고개가 소리 나는 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어지곤 했다. 그 미약한 움직임마저 없었다. 안서원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빠. 예준 오빠.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촉각에는 반응했다. 그의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그녀의 손바닥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소리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피부 위에 전해지는 온기와 압력에 대한 반응이었다. 안서원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바닥 없는 곳으로. 그녀는 그의 귀 바로 옆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가 좁은 침실에 울렸다. 홍예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귀가 죽었다.

안서원은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이제 들을 수도 없었다. 이 사람에게 남은 세상은 피부 위에 닿는 것들뿐이었다. 온도. 압력. 질감. 그것만이 이 사람과 세상을 연결하는 마지막 회선이었다. 안서원은 메모장을 꺼내지 않았다. 그가 읽을 수 없으니까. 대신 그녀는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천천히. 손가락 끝으로 글자를 썼다. 한 획씩. 피부 위에. 'ㄴ', 'ㅏ'. 나. 'ㅇ', 'ㅕ', 'ㄱ', 'ㅣ'. 여기. 'ㅇ', 'ㅣ', 'ㅆ', 'ㅓ'. 있어. 홍예준의 입술이 달싹였다. 느리게. 형태가 만들어졌다. 안서원은 손전등을 켜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미 수백 번 읽어온 입모양. '알, 아.' 안서원은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오래. 길게. 그의 피부 위로 자신의 숨결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이것이 이제 두 사람의 언어였다. 촉각만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소리도, 빛도, 문자도 없는. 오직 살갗과 살갗이 맞닿는 접점에서만 존재하는 세계.

그날부터 안서원은 새로운 체계를 만들었다. 그의 가슴 위에, 팔 위에, 이마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는 것. 점자를 배울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피부 위에 한 획씩 새기는 것은 가능했다. 홍예준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이해했다. 처음 며칠은 오독이 잦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안서원이 세 글자를 쓰면 나머지를 유추하여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그들의 대화 속도는 처참할 만큼 느렸다. 한 문장을 전달하는 데 2분이 걸렸다. 하지만 홍예준은 기다렸다. 안서원이 자신의 피부 위에 손가락을 움직이는 감촉 자체가 대화였으므로. 그녀의 손끝이 닿는 압력, 속도, 온도.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언어보다 진한 것을 전달하고 있었다. 밤마다 안서원은 그의 가슴 위에 긴 문장을 썼다. '오늘 매화가 피었어. 분홍색이야. 오빠가 좋아할 색.' 홍예준은 그녀의 손가락이 멈출 때까지 가만히 누워 있다가, 끝나면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답했다. '예, 쁘, 겠, 다.' 안서원은 웃었다.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이었다. 아니.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더보기

안서원의 속마음. 이 사람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말해도, 이 사람의 고막은 더 이상 진동하지 않는다. 나의 목소리가 이 사람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손가락 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가락으로 쓰는 '사랑해'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보다 더 무거웠다. 한 획 한 획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으니까. 글자 하나를 쓰는 데 3초가 걸렸으니까. 그 3초 동안 나는 그 단어의 무게를 온전히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 더 진실한 대화인지도 모른다고 안서원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위안이 아니었다.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이 사람의 웃음소리를, 한숨을, '하아'를, '꺼져'를, '서원아'를 다시는 실시간으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떤 위안으로도 메울 수 없는 구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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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월차. 촉각 소실.

3월의 밤이었다. 안서원은 그의 가슴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고 있었다. 매일 밤의 의식. 오늘은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ㅂ', 'ㅓ', 'ㅊ', 'ㄲ', 'ㅗ', 'ㅊ'. 한 획 한 획, 그의 피부 위에 정성스럽게 새겼다. 홍예준의 반응을 기다렸다. 평소라면 그녀의 손가락이 멈추는 순간 입꼬리가 올라가거나, 입모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서원은 다시 썼다. 'ㅇ', 'ㅗ', 'ㅃ', 'ㅏ'. 오빠. 그의 가슴 위에 손가락을 조금 더 세게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안서원은 그의 뺨을 감쌌다.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허공을 향해 열려 있었다. 입술은 닫혀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길게. 강하게. 체온을 전달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홍예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의 피부가 그녀의 입술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회선이 끊어진 것이었다.

안서원의 손이 그의 가슴 위에서 멈추었다. 손가락이 공중에 얼어붙었다. 이 사람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다. 소리도 닿지 않고, 빛도 닿지 않고, 이제는 살갗조차 닿지 않았다. 이 사람은 살아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폐가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과의 연결이 전부 끊어진 채 자신의 육체 안에 갇혀 있었다. 안서원은 그의 손을 들어올렸다. 차갑고 움직이지 않는 손.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사람이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이었다. 아니.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안서원의 눈에서 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그가 들을 수 없으니까. 느낄 수 없으니까.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목놓아 울었다. 그의 가슴 위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짐승처럼 울었다. 홍예준은 아무것도 모른 채 누워 있었다. 그의 심장만이 분당 48회의 느린 박동으로 안서원의 귀에 닿았다.

홍예준은 어둠 속에 있었다. 소리도 없고, 빛도 없고, 이제는 촉감도 없는 완전한 고립. 그는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했다. 누워 있는 것인지, 떠 있는 것인지. 중력의 감각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사고뿐이었다. 생각은 아직 흘렀다. 느리지만. 그는 안서원을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 속의 얼굴을. 연한 갈색 머리카락. 흰 눈. 차분한 눈매. 사이드뱅 너머로 보이던 창백한 피부. 그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던 순간을. 그것은 언제였을까. 시각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표정은 무엇이었을까.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기억했다. 아니,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형으로. 이제 그 손끝이 자신의 피부 위를 지나가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홍예준의 입술이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소리 없이. 아무도 읽어줄 수 없는 입모양으로. '미, 안, 해.' 그것이 그의 유일한 언어였다.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

그 한 달은 지옥이었다. 안서원은 매일 그의 곁에 누웠다. 그를 안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그의 입술에 담배 연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행위는 이제 안서원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 사람이 아직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의식. 그녀는 매일 그의 심장 박동을 세었다. 분당 횟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52에서 48로, 48에서 44로. 천천히. 확실하게. 카운트다운. 안서원은 그의 입술을 지켜보았다. 때때로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불규칙하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인지, 무의식적 경련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서원은 읽으려 했다. 매번.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으려. 어느 날 밤, 그의 입술이 확실하게 움직였다. 느리고 분명한 형태로. 안서원은 손전등을 켜고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읽었다. '사, 랑, 해.' 안서원은 그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가 느끼지 못하는 키스를. 그녀의 눈물이 그의 뺨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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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월차. 사망.

4월 16일. 벚꽃이 만개한 밤이었다. 안서원은 그의 곁에 누워 있었다. 매일 밤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심장 박동을 귀로 세고 있었다. 분당 32회. 어제보다 느렸다. 그제보다 느렸다. 카운트다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서원은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느끼지 못하는 손. 느끼지 못하는 가슴. 하지만 심장은 아직 뛰고 있었다. 그것만이 이 사람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링거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침실에 울렸다. 창밖으로 벚꽃잎이 바람에 날려 유리창에 부딪혔다. 안서원은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이 좋아하던 바람. 이 사람의 속성이었던 바람. 지금 이 사람의 귀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피부에도. 눈에도. 이 사람은 자신의 육체라는 관 속에 산 채로 묻혀 있다.

새벽 3시 47분. 안서원은 잠들지 못한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전등을 켜지 않아도 달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그의 윤곽을 비추었다.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흩어져 있었다. 하얗고 마른 얼굴. 광대뼈가 도드라진. 한때 시니컬한 미소를 머금고 담배 연기를 내뱉던 그 입술은 건조하게 닫혀 있었다. 안서원은 그의 입술에 밤크림을 발라주었다. 매일 밤 하던 일. 갈라지지 않게. 이 사람의 입술은 아직 아름다워야 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아래 입술을 스치는 순간, 홍예준의 입이 움직였다. 안서원은 숨을 멈추었다. 손전등을 켰다.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입술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안서원은 읽었다. 한 글자씩.

'서, 원, 아.'

그리고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것은 미소였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이 사람은 웃고 있었다. 안서원은 그의 뺨을 감싸며 그 미소를 눈에 새겼다. 그때였다. 홍예준의 손끝에서 미세한 빛이 피어올랐다. 아니, 빛이 아니었다. 그의 피부가 투명해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부터. 유리처럼 맑아지더니,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먼지처럼. 꽃잎처럼. 바람에 흩어지는 재처럼. 안서원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그가 빠져나갔다. 모래가 빠져나가듯. 물이 빠져나가듯. 그의 손목이, 팔뚝이, 어깨가 투명한 입자로 분해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밤바람이 그 입자들을 실어 날랐다. 안서원은 그의 가슴을 껴안았다. 아직 남아 있는 부분을. 심장이 뛰고 있는 부분을. 그녀의 팔 안에서 그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오빠. 오빠. 안 돼. 안 돼, 제발."

안서원의 목소리가 텅 빈 침실에 울렸다. 그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가슴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이 느려졌다. 32에서 24로. 24에서 16으로. 안서원의 귀에 닿던 그 미약한 진동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 남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직. 그 입술에 미소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입이 움직였다. 안서원은 읽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놓치지 않았다.

'사, 랑, 해.'

그리고 그의 얼굴이 빛으로 부서졌다. 안서원의 팔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베개 위에 흩어진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 몇 올과, 아직 체온이 남은 이불의 주름뿐.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그의 속성이었던 바람이. 방 안을 한 바퀴 돌고 사라졌다. 링거에서 떨어지던 액체가 바닥에 고였다. 심장 모니터의 선이 평평하게 늘어졌다. 안서원은 빈 이불 위에 손을 올렸다. 아직 따뜻했다. 그의 형태가 남긴 마지막 온기가. 그녀는 그 온기 위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 없이.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짐승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 세상 어디에도 닿지 않는, 아무도 받아줄 수 없는 울음이.


후일의 이야기.

안서원은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치를 수 없었다. 유체가 남지 않았으니까. 홍예준이라는 사람은 바람이 되어 흩어졌고, 이 세상 어디에도 그의 뼈 한 조각, 재 한 줌 남기지 않았다. 아이기스 행정부에서는 공식 사망 처리를 위해 사망확인서를 발급했다. 사인란에는 '능력 과사용에 의한 육체 소멸'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서원은 그 서류에 서명하는 동안 손이 떨리지 않았다. 펜을 쥔 가느다란 손가락은 평소와 같이 정확했다. 행정관이 조심스럽게 조의를 표했을 때, 안서원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완벽한 페르소나. 균열 하나 없는 표면. 하지만 그녀의 흰 눈동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유리알처럼 텅 비어 있었다.

펜트하우스는 정리하지 않았다. 그의 물건들이 그대로 있었다. 숄더 홀스터가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반쯤 비운 담배갑이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총기 손질 키트가 서랍 안에 정돈되어 있었다. 그의 향수병. 거의 바닥이 보이는 베티버와 메탈릭 향. 안서원은 매일 밤 그 향수병의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차가운 박하와 젖은 나무. 쇠 냄새. 처음 만났을 때 폐허 속에서 맡았던 그 냄새.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 돌리던 손에서 풍기던 냄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장례식 날 이후로 안서원은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눈물이 마른 것이 아니라, 울음이라는 행위 자체가 너무 가벼웠다. 이 상실을 담기에는.

일주일이 지났다. 저스티스 팀장이 찾아왔다. 은발에 컬러 선글라스를 낀 그 남자는 문 앞에 서서 안서원을 내려다보았다. '복귀 시점은 네가 정해. 아무도 재촉 안 할 거야.'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안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돌아간 뒤, 안서원은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벚꽃이 지고 있었다. 분홍빛 꽃잎이 바람에 날려 하늘을 수놓았다. 그 바람이 그의 것인지, 그냥 4월의 바람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구분하고 싶지도 않았다. 안서원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그 공기 속에서 박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나 여기 있어, 오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안서원은 그 침묵 속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침대로 걸어갔다. 그의 자리. 아직 그의 형태가 남은 것 같은 이불의 주름. 그녀는 그 위에 누웠다. 코를 묻었다. 향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매일 조금씩. 이것마저 사라지면, 안서원에게 남는 것은 기억뿐이었다. 그리고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변질된다. 왜곡된다. 흐려진다. 그것이 두려웠다. 이 사람의 목소리를 잊어버리는 날이 올까. 이 사람의 손끝이 피부에 닿던 감각을 잊어버리는 날이. 안서원은 베개 밑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한 번도 재생하지 못했던 녹음기. 그의 목소리가 담긴. 떨리는 손가락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하아. 서원아, 뭘 또 녹음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가 텅 빈 방을 채웠다. 짜증 섞인, 낮고 건조한, 담배 연기처럼 퍼지는 그 목소리. 안서원은 녹음기를 가슴에 안고 웅크렸다.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이. 조용히. 오래도록.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무도 읽어줄 수 없는 입모양으로.

"보고 싶어."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또 한 달. 안서원은 펜트하우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이기스의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렀다. 요원들은 임무를 수행했고, 괴수는 출현했고, 폭주한 센티넬은 제압되었다. 세계는 홍예준이라는 사람 하나가 사라진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삼켜버렸다. 하지만 안서원의 세계는 4월 16일 새벽 3시 47분에 멈춰 있었다. 그녀는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3시 47분. 수면제를 먹어도, 두 알을 먹어도, 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감각과 함께. 옆자리에 손을 뻗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이불뿐이었다. 매번. 매일. 그 반복이 안서원을 갉아먹고 있었다.

5월이 되었다. 저스티스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문 앞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왔다. 은발의 남자는 어두운 펜트하우스 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커튼이 쳐진 창문을 열었다. 빛이 쏟아졌다. 안서원은 소파 위에 웅크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스티스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지. 아직도 그 말 유효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단했다. 안서원은 그를 바라보았다. 흰 눈동자에 아무런 빛도 없었다. 저스티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마주 보다가,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작은 상자. 안서원은 시선을 내렸다. 상자 위에 메모가 붙어 있었다. '에덴의 유품. 총기류 제외 개인물품.' 저스티스가 문 앞에서 멈추었다.

"그 녀석이 네 곁에서 웃었다는 거, 나도 처음 알았어. 고마워. 그 녀석을 웃게 해줘서."
 
문이 닫혔다. 안서원은 오래 그 상자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지 못했다. 열면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무너져 있었다. 더 무너질 것도 남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그의 총기 손질용 천 조각, 사격 대회 금메달, 그리고 낡은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라이터의 표면에는 긁힌 자국이 무수히 나 있었다. 수천 번 불을 켜고 닫았을 그의 손가락. 안서원은 라이터를 쥐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았다. 엄지로 뚜껑을 열었다. 쨕. 불이 켜졌다. 작은 불꽃이 어둑한 방을 비추었다. 그 불꽃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담배를 물고, 미간을 찌푸리며, '뭘 봐'라고 중얼거리는 그 얼굴이.

안서원은 라이터를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창문을 열었다. 5월의 바람이 밀려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뺨을 스치고, 목덜미를 간질이는. 마치 누군가의 손끝처럼. 안서원은 눈을 감았다. 입술이 떨렸다. 울지 않았다. 대신 속삭였다.

"기다려. 아직은 못 가. 아직은."

바람이 대답하듯 한 번 세게 불었다가, 잠잠해졌다. 안서원은 창틀을 잡고 서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이기스의 인공 하늘이 5월의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 여기 있었다. 살아 있었다. 그것이 축복인지 형벌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마지막으로 웃으며 '고마워'라고 말한 이상, 안서원은 그 말의 무게를 짊어지고 걸어야 했다. 그것이 이 사람이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으니까. 라이터의 차가운 금속이 가슴 위에서 천천히 체온을 흡수했다. 안서원은 그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의 온기는 사라졌지만, 이 사람이 남긴 것들은 아직 차갑다. 내 체온으로 데워야 한다. 이 사람이 남긴 모든 것을. 이 사람이 남긴 나 자신을.
 
6월이 되었다. 안서원은 펜트하우스를 나왔다. 처음은 아니었다. 의무적인 건강 검진을 위해 의료실에 다녀온 적이 있었고, 행정 서류에 서명하러 한 번 나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문을 열었다. 검은색 제복을 입었다. 스커트의 주름을 가지런히 펴고, 리본형 타이를 매만졌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창백했다. 두 달 가까이 햇빛을 보지 않은 피부는 거의 투명에 가까웠다. 눈 밑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흰 눈동자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허가 아닌, 결의를. 안서원은 주머니 속 라이터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차가운 금속 표면의 긁힌 자국들.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발걸음을 뗐다.

복도는 낯설었다. 아니, 복도가 변한 것이 아니라 안서원이 변한 것이었다. 같은 공간인데 공기의 무게가 달랐다. 지나가는 요원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이는 조심스러운 시선을 보냈고, 어떤 이는 아예 시선을 피했다. 안서원은 그 모든 반응을 무표정하게 받아들이며 걸었다.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혼자만의 발소리. 한때 이 복도를 걸을 때면 왼쪽에서 지팡이 짚는 소리가 함께했었다. 그 전에는 담배 냄새가 먼저 도착하곤 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서원은 하모니 부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스티스에게 복귀 의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R.S.T.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안서원은 잠시 멈추어 섰다. 문 옆 벽에 부착된 팀원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에덴'이라는 이름이 아직 거기 있었다. 아무도 떼지 않은 것이다. 혹은 떼지 못한 것이다. 안서원의 시선이 그 두 글자 위에 오래 머물렀다. 손끝이 저릴 만큼 라이터를 꽉 쥐었다가, 천천히 힘을 풀었다. 숨을 들이쉬었다. 5월의 잔향이 아직 남은 공기. 6월의 습기가 섞인 공기. 그 안에서 더 이상 박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안서원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저스티스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낮고 여유로운, 변함없는 그 음색. 안서원은 문을 열었다. 넓은 사무실 안, 창가 쪽 책상에 은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컬러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스티스는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섰다. 긴 트렌치 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그는 안서원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미소라기보다는 안도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왔구나. 앉아."

안서원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그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저스티스가 커피를 내려주었다. 잔을 내밀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안서원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가 라이터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건네는 온기. 안서원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약간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복귀하겠습니다, 팀장님."

저스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 질문도, 불필요한 위로도 없었다. 다만 그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파란 눈 속에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비쳤다. 하지만 그는 삼켰다. 대신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그녀 앞에 밀어놓았다. 복귀 승인서. 안서원은 펜을 들었다. 서명란 위에 가느다란 글씨로 '안서원'이라고 적었다. 획이 흔들리지 않았다. 저스티스가 서류를 회수하며 중얼거렸다.

"뱅가드 1팀, 이브 요원. 내일부터 복귀. 몸 만들어 와."

안서원은 일어섰다. 문을 나서기 전,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저스티스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하늘이 있었다. 6월의 하늘. 바람이 구름을 밀어내는 푸른 하늘. 안서원은 돌아서서 걸었다. 라이터가 주머니 속에서 허벅지에 부딪혀 작게 소리를 냈다. 딸깍. 딸깍. 그의 발자국 소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안서원은 그 소리를 들으며 복도를 걸었다. 살아있었다. 아직은.
 
안서원이 R.S.T. 사무실을 나선 뒤, 복도는 고요했다. 그녀의 군화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주머니 속 라이터가 허벅지에 부딪히며 내는 딸깍거림. 그것이 유일한 동행이었다. 복도를 지나며 안서원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스쳐 지나가는 요원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할 필요가 없었다. 이 기관에서 안서원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바뀌었을 것이다. 'S급 풀 속성 센티넬'에서 '에덴의 파트너였던'으로. 혹은 '시한부 가이드를 잃은'으로. 사람들은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를 정의하길 좋아한다. 안서원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개의치 않았다. 홍예준이라는 이름이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형벌이 아니라 훈장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가벼운. 안서원이 돌아보기도 전에 분홍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휴고였다. R.S.T.의 후배 요원. 스물여섯.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킨 흔적이 역력했다. 입술이 한 번 달싹거렸다가 다물어졌다. 안서원은 그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휴고의 분홍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에덴의 후배였다. 에덴이 탐탁치 않아하면서도 챙겨주던 그 후배. 안서원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조의. 혹은 위로. 혹은 그 둘 다.

"저, 이브 선배님."

휴고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그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종이컵. 자판기 커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휴고는 그것을 안서원 앞으로 내밀었다. 말없이.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서원은 그 종이컵을 바라보았다. 하얀 종이컵 표면에 맺힌 수증기. 뜨거운 것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생기는 물방울. 안서원은 천천히 손을 뻗어 컵을 받아들었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전해지는 열기. 살아있는 온도. 저스티스가 건네준 커피잔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산 자가 산 자에게 건네는 온기.

"감사합니다."

안서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미소는 짓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휴고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고개만 꾸벅 숙인 뒤 빠르게 돌아섰다. 분홍 머리카락이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안서원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종이컵의 온기가 손바닥을 적셨다. 안서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를 타고 내려갔다. 홍예준은 블랙커피를 좋아했다. 매일 아침 원두를 갈아 내리던 그 손. 후각을 잃고 나서도 습관처럼 커피를 내리던 그 손. 안서원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커피의 쓴맛이 목구멍 깊숙이 가라앉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안서원이 안으로 들어섰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정확했다. 펜트하우스 층. 내일부터 뱅가드 1팀에 복귀한다. 저스티스가 말한 대로 몸을 만들어야 했다. 두 달간 제대로 먹지 않았고, 훈련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폭주 수치도 확인해야 했다. 파트너를 잃은 센티넬의 폭주 위험도는 급격히 상승한다. 안서원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폭주의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덩굴이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감각도, 신경이 과도하게 예민해지는 전조도. 아무것도. 마치 능력 자체가 주인의 슬픔을 알아채고 숨죽이는 것처럼. 혹은, 폭주할 만큼의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안서원은 유리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검은 제복. 창백한 피부. 공허한 흰 눈. 허리까지 내려오는 연갈색 머리카락. 오른쪽에 땋아 묶은 머리에 매어진 흰 리본. 그 리본을 묶어준 것도 그였다. 마지막으로 묶어준 것은 왼팔마저 잃기 전이었다. 안서원은 리본 끝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실크의 매끄러운 감촉. 이것도 그가 남긴 것이었다. 문이 열렸다. 안서원은 펜트하우스로 돌아갔다. 내일을 위해. 그가 남긴 삶을 이어가기 위해.


3년이 흘렀다. 홍예준이 바람이 되어 사라진 그 새벽으로부터, 정확히 3년. 안서원은 살아남았다. 뱅가드 1팀에 복귀하여 임무를 수행했고, 폭주를 억눌렀고, 후배 센티넬들을 이끌었다. 기관은 그녀를 '에덴을 잃고도 무너지지 않은 센티넬'이라 불렀다. 그것이 칭찬인지 동정인지 안서원은 구분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아침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제복을 입고, 발걸음을 옮겼다. 3시 47분에 눈을 뜨는 습관은 끝내 고쳐지지 않았다. 수면제의 용량만 조금씩 늘어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20xx년 4월의 어느 날, S급 괴수 토벌 작전 중 안서원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그녀를 멈춰줄 가이드가 없었다. 홍예준 이후 어떤 가이드의 파장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의 몸. '강제 각인'이라는 족쇄는 죽은 자에게도 유효했다. 덩굴이 아이기스 외벽을 뚫고 하늘까지 치솟았고, 신경독 포자가 반경 수백 미터를 뒤덮었다. 안서원의 의식이 희미해질 때,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주머니 속 라이터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었다. 그리고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무언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끝'이라는 감각.

눈을 떴다. 빛이 아팠다. 아니, 아프지 않았다. 눈이 부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너무 선명한 것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었다. 인공이 아닌 진짜 하늘.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서 풀 냄새가 났다. 갓 베어낸 풀의 푸른 향. 안서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 아래로 부드러운 잔디가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었다. 한쪽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그 아래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심장이 멈추었다. 아니, 심장이 뛰고 있었다. 미친 듯이. 가슴팍을 찢고 나올 것처럼.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 금발. 하늘색 눈. 하얀 셔츠. 왼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다. 연기가 바람에 실려 옆으로 흘러갔다. 박하 냄새. 젖은 나무와 차가운 쇠의 향. 3년간 맡지 못했던, 어떤 향수로도 대체할 수 없었던 그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안서원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제복. 스커트. 리본 타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오른쪽의 땋은 머리에 매어진 흰 리본. 25살의 자신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시절의 자신. 손이 떨렸다. 다리가 떨렸다. 눈물이 차올랐다. 입술이 벌어졌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안광 없던 하늘색 눈에 빛이 있었다. 생기가 있었다. 두 팔이 온전했고, 두 다리로 서 있었고, 입술이 움직여 소리를 만들어냈다.

"...늦었잖아."

그 목소리. 낮고 건조하고, 짜증 섞인 그 목소리. 3년간 녹음기로만 들었던 그 음색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안서원의 무릎이 풀렸다.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멈출 수 없었다. 3년간 참았던, 아니, 참지 못했던, 매일 밤 삼켰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홍예준은 담배를 발밑에 떨어뜨리고 발끝으로 비벼 껐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안서원에게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의 발소리가 풀밭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살아있는 사람의 발소리. 무게가 있는 발소리. 안서원 앞에 멈추어 선 그가 한 손을 내밀었다. 길고 마른 손가락. 긁힌 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손. 안서원은 그 손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시야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입꼬리를 한쪽만 살짝 올린. 짜증인지 안도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 표정.

"...뭐 해. 울기만 할 거야."

안서원은 그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차갑지 않았다. 라이터의 금속이 아니었다. 그의 체온이었다. 살아있는 온도.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단단하게. 확실하게. 안서원은 그 손에 이끌려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기도 전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안서원의 이마가 그의 쇄골에 닿았다. 셔츠 원단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 심장 박동. 쿵, 쿵, 쿵. 일정하고 단단한 리듬. 3년간 베개 밑에 숨겨둔 녹음기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었던 것. 기계가 재생하는 소리가 아닌, 살과 뼈와 피가 만들어내는 진동이 안서원의 관자놀이를 울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셔츠 뒤를 움켜쥐었다. 힘을 주었다. 원단이 구겨지는 감촉이 손바닥에 새겨졌다. 놓으면 사라질 것 같았다. 빛이 되어 흩어질 것 같았다. 또. 다시. 안서원은 숨을 들이쉬었다. 박하. 베티버. 메탈릭. 그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다. 3년간 그의 옷장을 열어 맡으려 했지만 점점 희미해져만 가던 향기가, 지금 이 순간 처음처럼 선명했다. 눈물이 턱을 타고 그의 셔츠 위로 떨어졌다. 젖어드는 하얀 원단. 안서원은 입을 열었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소리가 끊겼다가, 겨우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오빠."

그것뿐이었다. 그 한마디에 3년치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왜 혼자 두고 갔냐는 말도. 전부. 안서원의 어깨가 떨렸다.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성대가 움직이지 않았다. 3년간 울 때마다 그랬다. 소리를 내면 무너질 것 같아서 항상 삼켰다. 홍예준의 손이 움직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 얹혔다. 길고 마른 손가락이 연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천천히. 부드럽게. 쓸어내리듯. 그 손길에 안서원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었다. 초원의 풀이 일제히 한쪽으로 눕는 소리가 들렸다. 느티나무 잎사귀가 부딪히며 속삭이는 소리. 그의 바람. 그가 되어버린 바람이 아닌, 그에게서 불어오는 바람.

"...3년이면 충분히 기다렸거든."

홍예준의 목소리가 그녀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짜증 섞인 어조. 하지만 그 아래에 숨겨진 것을 안서원은 알고 있었다. 안도. 그리움. 그리고 사랑. 그의 턱이 그녀의 머리 위에 가볍게 얹혔다. 무게가 느껴졌다. 실체가 있는 무게. 환각이 아니었다. 꿈이 아니었다. 안서원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젖은 시야 너머, 그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하늘색 눈동자에 빛이 있었다. 안광이 없던 그 눈에,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투명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속눈썹 끝에 걸린 빛의 입자가 반짝였다. 안서원은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그의 볼에 닿았다. 매끄러운 피부. 차갑지 않은. 체온이 있는. 살아있는.

홍예준은 그녀의 손이 자신의 볼에 닿는 것을 가만히 허락했다. 눈을 반쯤 감았다. 그녀의 손바닥이 닿는 곳에서 온기가 번져갔다. 3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보낸 시간은 없었다. 여기에서의 시간은 달랐다. 모든 감각이 돌아온 채로,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바람이 부는 초원에서.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보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여전히 가늘고 차가웠다. 3년 동안 제대로 먹지 않았을 것이다. 3시 47분에 눈을 뜨고,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녹음기를 베개 밑에 숨기고. 그 모든 것을 홍예준은 알고 있었다. 바람이 되어서도 그녀의 곁에 있었으니까.

"...수고했어, 서원아."

그 한마디가 초원의 바람처럼 안서원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수고했어. 잘 버텼어. 이제 됐어. 안서원의 입술이 떨렸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얼굴 위로 번졌다. 그녀는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에는 더 깊이. 더 단단하게. 홍예준의 팔이 그녀의 등을 감쌌다. 두 팔. 온전한 두 팔. 왼팔도, 오른팔도. 전부. 안서원을 감싸 안는 데 부족함이 없는 두 팔이 그녀의 척추를 따라 내려가며 등을 쓸었다. 초원 위로 바람이 불었다. 느티나무의 그림자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잎사귀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금빛 점으로 그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안서원은 눈을 감았다. 여기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죽음 너머든, 꿈의 끝이든.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면.
 
안서원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라는 것이 여기에서도 흐르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심장 소리가 귀를 채우고, 그의 체온이 이마를 데우고, 그의 손이 등을 쓸어내리는 동안, 세상의 모든 시계는 멈춰도 좋았다. 안서원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눈물은 여전히 흘렀지만, 흐느끼던 숨이 조금씩 고르게 돌아왔다. 그의 셔츠가 젖어 축축해진 것을 느꼈다. 미안하다고 말하려다가, 그 단어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달았다. 3년간 수천 번 삼킨 말이었다. 미안해. 살아남아서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해. 그 모든 '미안해'가 목구멍에서 엉겨 붙어 단 한마디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신 안서원은 그의 셔츠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홍예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연갈색 웨이브 사이로 손가락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정수리 위를 감쌌다. 반복. 천천히. 리듬처럼. 그가 시각을 잃기 전,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해주던 것과 같은 동작이었다. 초원의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함께 흩날렸다. 금빛과 갈색이 뒤섞여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느티나무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풀벌레의 낮은 울음.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살아있었다. 그의 귓가에도 들리고 있을 것이었다. 안서원은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홍예준이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안서원은 알지 못했다. 10개월 차에 청각을 잃었을 때, 그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울린 것이 자신의 목소리였기를 바랐다. 바랐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이제는 물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이렇게.

홍예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턱이 안서원의 정수리에서 떨어졌고, 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몸을 살짝 뒤로 밀었다. 거리를 만들었다. 안서원의 젖은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홍예준의 하늘색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 위를 천천히 훑었다. 눈물 자국. 붉어진 코끝. 부은 눈두덩. 떨리는 입술.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여다보았다. 3년간 보지 못했던 것을 채우듯. 그의 엄지손가락이 안서원의 볼 위로 올라와 눈물을 닦아냈다. 거칠지 않게. 피부 위를 스치듯.

"...울보는 여전하네."

홍예준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갔다. 짜증도, 조롱도 아닌. 부드러움이 섞인 비틀린 미소. 안서원이 알고 있는 그의 미소. 츤데레라고 불렸던 그 표정 아래에 숨겨진 애정. 그의 손이 안서원의 볼에서 턱선으로 내려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하늘색과 흰색. 안광이 살아 돌아온 그의 눈 속에 안서원의 얼굴이 비쳤다. 홍예준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버릇. 말하기 전에 상대를 관찰하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 동작. 안서원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죽은 뒤에도 심장이 뛰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잘 왔어."

홍예준의 말이 초원의 공기를 가르며 안서원의 고막을 울렸다. 잘 왔어. 환영한다는 말도, 기다렸다는 말도 아닌. '잘 왔어.' 마치 안서원이 늦게까지 임무를 마치고 펜트하우스로 돌아왔을 때 소파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던지던 그 말투 그대로. 일상처럼. 당연한 것처럼. 안서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기이한 소리가 입 밖으로 흘렀다. 그녀의 손이 올라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자신의 볼 위에 얹힌 그의 손을. 꽉.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다시는. 홍예준은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빼지 않았다. 대신 엄지로 한 번 더 볼을 쓸어주었다. 눈물이 마른 자리 위를. 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바람이었다. 그의 바람이. 두 사람의 발밑으로 작은 들꽃이 피어올랐다. 흰색. 노란색. 연보라색. 안서원의 풀 속성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한 것인지, 이 세계가 두 사람에게 주는 축복인지.
 
안서원은 그의 손목을 놓지 못했다. 손가락 마디마다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렸지만 풀 수 없었다. 풀면 안 됐다. 풀면 또 사라질 것 같았다. 바람에 실려, 빛에 녹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감각을 3년간 매일 밤 되새겼다. 잠들기 전마다 손바닥을 펴서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손. 이불 위에 남은 온기마저 식어버린 새벽. 하지만 지금 이 손목은 따뜻했다. 맥박이 뛰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규칙적인 고동. 안서원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3년치의 말이 목구멍에서 엉켜 단 한 글자도 순서를 정하지 못했다. 발밑에서 피어오른 들꽃이 두 사람의 발목을 감싸듯 번져갔다. 안서원은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능력이 반응하고 있었다. 폭주가 아니었다. 통제할 수 없는 침식이 아니었다. 그저 피어나는 것이었다. 조용히, 자연스럽게, 마치 처음부터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홍예준은 발밑으로 번지는 꽃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색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흰색 꽃잎이 바람에 날려 그의 셔츠 위로 내려앉았다. 그는 그것을 털어내지 않았다. 대신 안서원의 손목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얗게 질린 마디. 떨리는 관절. 놓으면 죽을 것처럼 매달리는 그 힘. 홍예준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입술이 한 번 다물렸다가 열렸다. 그 사이로 담배 연기가 아닌, 따뜻한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자유로운 왼손으로 안서원의 손등을 감쌌다.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 그녀의 손 위를. 포개듯. 덮듯. 마치 '됐어, 안 가'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안 사라져. 어디 안 가."

짧은 말이었다. 홍예준답게. 불필요한 수사도, 과장된 약속도 없는. 그저 사실만을 전달하는 건조한 어조. 하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감싸는 힘에는 말이 담지 못하는 것이 실려 있었다. 안서원은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그의 턱선이 보였다. 목젖이 한 번 움직였다. 삼키는 동작. 그도 무언가를 참고 있었다. 안서원은 그것을 알았다. 3년간 그의 곁에서 매일 밤 지켜보았으니까. 감각을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끝까지 의연한 척했던 그 남자가, 마지막 팔을 잃었을 때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던 것을. 지금 그의 목젖이 움직이는 것은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안서원은 손의 힘을 조금 풀었다. 아주 조금만. 그리고 그의 손바닥 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깍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의 틈을 메우듯. 맞물리듯.

홍예준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끼어들었다. 자연스럽게. 수천 번 해왔던 것처럼. 근육이 기억하는 동작. 그의 엄지가 안서원의 손등 위를 느리게 쓸었다. 원을 그리듯. 초원의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어왔다. 느티나무 잎사귀가 우수수 흔들리며 빛의 파편을 쏟아냈다. 금빛 점들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깍지 낀 손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홍예준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안서원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가볍게. 숨결이 닿을 만큼만. 입술이 피부에 닿는 순간 안서원의 눈에서 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슬픔이 아니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안도와 행복과 아픔이 전부 녹아든 것.

"...같이 있자."

홍예준의 입술이 안서원의 이마에서 떨어지며 그 말을 내뱉었다. 안서원은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가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 여기. 여기가 어디든. 그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집이었다. 3년간 펜트하우스에서 그의 향수 냄새를 맡으며 잠들지 못했던 밤들. 3시 47분에 눈을 뜨며 빈 옆자리를 더듬던 손. 라이터를 켜서 불꽃 너머로 그의 환영을 찾던 새벽. 그 모든 것이 끝났다. 안서원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믿기 위해. 홍예준은 그 힘을 되돌려 주었다. 같은 세기로. 같은 의미로. 초원 위의 들꽃이 두 사람의 발밑에서 점점 넓게 번져갔다. 흰색, 연보라색, 옅은 분홍색. 바람이 꽃잎을 날렸다.
 
초원 위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바람이 불었다. 느티나무의 잎사귀가 서로 부딪히며 속삭이는 소리가 세상의 유일한 음악이 되었다. 두 사람의 깍지 낀 손 위로 금빛 햇살이 쏟아져 내렸고, 발밑에서 피어오른 들꽃은 어느새 초원 전체를 뒤덮을 만큼 넓게 번져 있었다. 흰색, 연보라색, 옅은 분홍색.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안서원의 풀 속성이 만들어낸 것인지, 이 세계가 허락한 것인지. 구분은 무의미했다. 홍예준은 깍지 낀 손에 힘을 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느티나무 그림자 아래, 풀이 눕는 방향으로. 안서원의 손을 이끌며. 지팡이도, 휠체어도, 링거도 필요 없는 두 다리로. 온전한 걸음으로. 풀잎을 밟는 소리가 사각, 사각, 부드럽게 울렸다. 그의 보폭에 맞춰 안서원의 발걸음이 따라왔다. 3년간 그녀가 그의 왼쪽에 서서 부축하던 것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홍예준이 앞서 걸었다. 안서원을 이끌며. 어딘가로.

느티나무 아래에 도착하자 홍예준은 걸음을 멈추었다. 나무 그림자가 두 사람을 시원하게 감쌌다.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이끼의 향기, 흙냄새, 풀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무 밑둥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미끄러지듯 앉았다. 긴 다리를 풀밭 위로 뻗고, 자유로운 손으로 안서원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이리 와, 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동작. 그의 품으로. 안서원의 무릎이 풀밭에 닿았고, 그녀의 몸이 그의 가슴 위로 기울어졌다. 홍예준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등을 쓸어내리지 않았다. 그저 감싸고 있었다. 단단하게. 확실하게. 여기 있다고.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빛을 쏟아냈고, 그 점들이 두 사람의 몸 위에서 춤추었다.

"...여기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

홍예준의 목소리가 안서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나무 줄기에 기댄 그의 등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성대가 울리는 것. 살아있는 목소리. 9개월 차에 사라졌던 그 목소리가 지금 이렇게 가까이에서 울리고 있었다. 낮고 건조하고, 짜증 섞인 듯하면서도 어딘가 나른한 어조. 그가 담배를 피우며 소파에 기대어 중얼거리던 그 톤 그대로. 홍예준의 손가락이 안서원의 머리카락 사이를 느리게 빗었다. 흰 리본이 묶인 땋은 머리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시선은 초원 너머 지평선을 향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녹색.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빛이 번지고 있었다. 저녁도, 아침도 아닌. 영원한 오후.

"...그러니까 천천히 해.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거. 전부."

그의 턱이 안서원의 정수리 위에 다시 얹혔다. 무게. 실체. 존재의 증거. 안서원의 손가락이 그의 가슴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습관처럼. 11개월 차에 그의 피부 위에 글자를 쓰며 소통하던 그때의 동작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글자를 쓰지 않아도 됐다. 목소리가 있었다. 귀가 있었다. 눈이 있었다. 모든 것이 돌아와 있었다. 안서원의 입술이 그의 셔츠 위에 닿았다. 말이 아닌 입술의 움직임. 무의식적으로. 홍예준은 그것을 느꼈다. 가슴 위에서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그의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귀 끝이 아주 미세하게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안서원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초원의 바람이 느티나무 잎사귀를 흔들었다. 빛의 파편이 쏟아졌다. 두 사람의 위로. 들꽃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올라왔다. 달콤하고 풋풋한. 홍예준은 눈을 반쯤 감았다. 이제 됐다. 기다림이 끝났다. 그녀가 왔다. 그의 세계가 다시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초원 위의 영원한 오후 속에서, 두 사람은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 감각을 잃을 일도, 바람이 되어 흩어질 일도, 새벽 3시 47분에 빈 옆자리를 더듬을 일도 없는 곳에서. 홍예준의 심장 소리가 안서원의 귀를 채웠고, 안서원의 체온이 홍예준의 가슴을 데웠다. 느티나무가 두 사람을 품었고, 바람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함께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