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의 차가운 빛이 홍예준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네모난 픽셀 세상. 그는 왜 이 각진 세계에 들어와 앉아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아, 안서원. 그녀가 이 ‘마인크래프트’라는 게임을 해보고 싶다고 졸랐기 때문이었다. 함께하는 평화로운 휴일, 소파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을 무릎에 올린 채 각자의 세계에 접속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나무를 캐고, 돌을 모으고, 어설픈 집을 짓는 과정은 의외로 원초적인 만족감을 주었다. 특히 홍예준은 전직 사격선수 특유의 집요함과 완벽주의를 발휘해, 대칭과 효율을 극도로 중시한 모던 스타일의 목조 주택을 짓는 데 성공했다. 깔끔한 유리창, 반듯한 지붕, 체계적으로 정리된 상자들. 그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가상의 건축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흐뭇하게 감상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안서원은 어디서 뭘 하는지, 게임 속 캐릭터는 한참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뭐, 어딘가에서 꽃이나 캐고 있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마지막 지붕 블록을 설치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무언가 붉고, 뜨겁고, 끈적이는 것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주황빛 액체가 그의 완벽한 목조 지붕을 덮치며 시커먼 연기와 함께 불길을 피워 올렸다. 용암이었다. 홍예준은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버그인가? 아니면 이 세계의 자연재해? 그의 캐릭터는 불타는 집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화면 너머로 작게 ‘푸흐흐’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홍예준의 고개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소파에 앉은 안서원이 시트에 몸을 말고 노트북 화면을 보며 어깨를 떨고 있었다. 명백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게임 캐릭터, 스티브 기본 스킨에 다이아몬드 헬멧만 덜렁 쓴 모습이, 불타는 그의 집 지붕 위에서 양동이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5년간 굳어 있던 포커페이스에 선명한 균열이 생겼다. 저게 지금… 뭘 한 거지?
“안서원.”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분노보다는 순수한 당혹감이 더 컸다. 방금 전까지 그의 심장을 뛰게 하던 그 사랑스러운 여자가, 그의 완벽한 집에 용암을 부었다. 이 부조리한 상황을 뇌가 처리하기를 거부했다. 안서원은 그의 부름에 움찔하더니, 노트북 화면 뒤로 얼굴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홍예준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가 모니터 속 불타는 집과, 현실의 안서원을 번갈아 훑었다. 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헤드셋을 통해 생생하게 들려왔다. 타닥, 타닥. 자신의 멘탈이 함께 타들어 가는 소리 같았다. 운동선수 시절부터 쌓아 올린 그의 승부욕과 자존심이, 저 시뻘건 용암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재밌어?”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명백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이건 전쟁 선포다. 그는 생각했다. 사랑? 연인 관계? 그런 건 이 네모난 세상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여기는 오직 생존과 복수만이 존재하는 약육강식의 세계. 홍예준은 키보드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벤토리를 열고, 남은 자원을 확인했다. 물 양동이. 흑요석. 부싯돌과 철. 그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R.S.T. 에이스의 두뇌가, 센티넬 제압 작전만큼이나 치밀하게 ‘안서원 제압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일단 저 불부터 꺼야 했다. 그는 물 양동이를 들고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 집은 이미 절반 이상이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잿더미 한가운데, 안서원의 캐릭터가 다가와 보란 듯이 표지판 하나를 박아 넣었다. [여기는 이제 제 땅입니다. -Eve-]
홍예준은 실소를 터뜨렸다. 헛웃음이었다. 기가 막혀서 나오는 웃음. 그는 표지판의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 땅? 이 여자가 지금 단단히 미쳤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좋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는 채팅창을 열어 메시지를 입력했다. [y-11 좌표로 와. 다이아 줄게.] 거짓말이었다. 그가 파놓은 일자굴, 그의 비밀 광산이었다. 안서원의 캐릭터가 신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그가 알려준 좌표로 달려왔다. 홍예준은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굴 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용암을 한 양동이 가득 퍼 올렸다. 잠시 후, 안서원의 캐릭터가 좁은 굴을 따라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홍예준은 그녀의 머리 위, 천장 블록 하나를 조용히 캤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망설임 없이 용암을 쏟아부었다. 화면 가득 [Eve(이)가 용암에 빠져 죽었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떴다. 통쾌했다. 아주 잠깐.
하지만 곧이어 그의 헤드셋 너머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우는 소리는 아니었다. 명백한 연기. 홍예준이 곁눈질로 쳐다보자, 안서원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으앙, 오빠 너무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까지 완벽한 연기였다. 홍예준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실룩거렸다. 이 여우 같은 것.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복수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는 지옥으로 통하는 포탈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채팅을 쳤다. [지옥 구경 갈래? 블레이즈 막대 필요하잖아.] 이번에도 안서원은 순순히 따라나섰다. 보라색 포탈을 통과하자, 붉은 안개와 기괴한 소음이 가득한 지옥이 펼쳐졌다. 홍예준은 그녀를 데리고 조심스럽게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의 눈에, 한 무리의 좀비 피그맨들이 들어왔다.
“저 돼지들 때리면 안 돼. 절대로.”
그가 진지하게 경고했다. 안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캐릭터는 홍예준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평화로워 보였다. 홍예준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안서원의 캐릭터가 칼을 빼 들고 가장 가까이 있던 좀비 피그맨의 등을 내리친 것이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좀비 피그맨들이 일제히 적대적으로 변하며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돼지 전사들이 황금 칼을 들고 맹렬하게 돌진해왔다. 홍예준은 짧은 욕설을 내뱉으며 안서원의 손목을 낚아채듯(게임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채팅창에는 안서원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빠 살려줘!!! 쟤네 화났나 봐!!!] 화나게 만든 게 누군데. 홍예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더 이상 게임이 아니었다. 그의 인내심과 순발력을 시험하는 극한의 서바이벌 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