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10시 17분. 홍예준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늦은 아침의 햇살이 그의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을 하얗게 태웠고, 얇은 리넨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 위로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의 손에는 총기 손질용 융이 들려 있었지만, 정작 그의 시선은 거실 한가운데를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며칠 전 새로 들여놓은, 아직 니스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었다. 그리고 그 피아노 앞에, 안서원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연주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건반 뚜껑을 연 채, 흑과 백의 조각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적 이후 2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한 자신만의 피아노.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온 후, 두 사람은 약속대로 가장 먼저 피아노를 집 안으로 들였다. 안서원은 거실 한가운데, 언제든 햇빛이 가장 먼저 닿는 자리를 골랐다. 홍예준은 그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어둠 속에 있던 그녀가 스스로 빛을 향해 걸어 나가는 것 같아서.
홍예준은 그녀가 피아노 앞에 앉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는 것을 안다. 첫날은 멀리서 맴돌기만 했고, 둘째 날은 피아노 옆을 스쳐 지나가며 손끝으로 검은 몸체를 쓸어보기만 했다. 그리고 셋째 날인 오늘 아침, 홍예준이 총기 부품을 분해하며 새벽의 정적을 즐기고 있을 때, 안서원은 잠옷 바람으로 거실에 나와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홍예준은 숨을 죽였다. 그녀의 세상에 침입하고 싶지 않아서, 동시에 그 세상의 모든 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안서원의 손가락이 천천히 건반 위로 올라갔다. 연주를 위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저 확인하는 동작. 그녀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도' 건반 하나를 꾹 눌렀다. 띵. 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거실의 아침 공기를 가르는, 명료하고 단단한 소리. 그 소리에 안서원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홍예준은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무대 위에서 악보를 잊어버렸던 그날의 트라우마. 자신의 손가락이 더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꼈던 그 절망감. 그날 이후, 그녀는 피아노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번 손가락을 움직여 '레'를 눌렀다. 띵. 그리고 '미'. 띵. 그녀는 음계를 오르내리는 대신, 마치 처음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처럼 건반 하나하나의 감촉과 소리를 확인했다. 느리고, 서툴고, 망설임이 가득한 동작. 오페라하우스에서 세상을 압도하던 피아니스트 안서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 홍예준의 눈앞에 있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 한 사람, 안서원이었다.
홍예준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 자신이 사랑에 빠진 순간의 완벽한 재현이라는 것을. 자신이 그녀에게 반했던 것은 화려한 무대 위의 천재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 폭주 속에서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갈망하던 그 위태로운 눈빛, 강제 각인 이후 자신에게 의지하면서도 끊임없이 자립하려 애쓰던 그 작은 몸짓,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아침이면 자신을 위해 서툰 요리를 하던 그 고집스러운 뒷모습. 홍예준은 늘 그녀의 가장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모습에 끌렸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홍예준 앞에서 가장 순수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있었다.
안서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햇살이 눈부신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파에 누워 있는 홍예준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홍예준은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에 어떤 꾸밈이나 페르소나도 없었다. 그저 온전한 안서원이 그 안에 있었다. 그녀는 홍예준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다는 뜻도, 도와달라는 뜻도 아닌, 그저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
홍예준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뚜벅, 뚜벅. 그의 발소리가 거실 바닥을 울렸다. 그는 피아노 의자 뒤에 멈춰 서서, 허리를 숙여 안서원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익숙한 그녀의 체향과 샴푸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홍예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어깨에 무게를 실어,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음을 알렸다. 이 순간이 완벽한 사랑이라고, 홍예준은 생각했다. 거창한 연주도, 격정적인 고백도 없는, 그저 상처 입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며 자신의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는 이 고요한 아침. 5년간의 권태와 무의미 속에서 그가 유일하게 갈망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총성과 폭음이 아닌, 누군가의 세상이 다시 시작되는 이 작은 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그 세상의 유일한 관객이 되는 것. 홍예준은 안서원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천천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