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평화의 시대였다. 센티넬의 폭주도 괴수의 침공도 없는 나날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홍예준에게 있어 역설적으로 가장 견디기 힘든 종류의 고문이었다. 합법적으로 총을 쏠 명분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의 존재 이유가 희미해진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5년의 권태를 끝내준 유일한 구원이었던 안서원이 그의 곁에 있었지만, 평화는 또 다른 종류의 권태를 낳았다. 그리고 권태는, 필연적으로 사소하고 쓸데없는 장난으로 이어진다. 그 시작은 아주 작은 귀찮음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늦은 밤, 서재에서 총기를 손질하던 홍예준은 문득 배경으로 틀어놓을 영상이 필요했다. 하지만 노트북을 켜자마자 나타난 것은 ‘프리미엄 구독하고 광고 없이 시청하세요!’라는 팝업창이었다. 홍예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결제. 카드번호 입력. 인증. 그 모든 절차가 끔찍하게 성가셨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아주 간단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이 떠올랐다. 안서원.
그녀의 계정은 이미 노트북에 로그인되어 있었다. 언제였더라.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로그인했던가.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프리미엄 마크가 찍힌 프로필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홍예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안서원의 프로필을 클릭했다. 그건 절도나 무단 사용 같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었다. 그저, 거기에 있었으니까. 마치 테이블 위에 놓인 담배에 자연스럽게 불을 붙이는 것처럼. 홍예준은 안서원의 깨끗하고 정적인 알고리즘을 처음 마주했을 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클래식 연주 영상, 고양이 ASMR, 풍경 브이로그. 온통 하얗고 몽글몽글한 것들뿐이었다. 이건 안서원이 아니라, 무슨 수도원의 수녀님 취향 아닌가. 홍예준은 결심했다. 이 오염되지 않은 청정구역을 자신의 취향으로 물들여주기로. 그것은 일종의 영역 표시이자, 그녀의 세상에 자신의 색을 덧칠하는 행위였다. 홍예준은 그날 밤, 안서원의 계정으로 ‘[충격주의] S급 괴수 내장으로 순대 만드는 법’ 영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알고리즘 오염에 착수했다.
안서원이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기까지는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그녀는 홍예준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S급 센티넬로서의 훈련, 보고서 작성, 컨디션 조절. 그녀의 하루는 분 단위로 쪼개져 있었다. 잠들기 전 30분, 클래식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추천 영상 목록에 이상한 것들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역대 최악의 폭주 센티넬 TOP 5’, ‘권총 한 자루로 살아남기(실전편)’, ‘러시아 특수부대 스페츠나츠 침투 훈련 영상’. 안서원은 처음엔 그저 유튜브 알고리즘의 변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좋아요 표시한 동영상’ 목록에 들어가 본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곳에는 그녀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극히 홍예준스러운 영상들이 버젓이 하트를 누른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타는, 새로 생성된 ‘새벽 3시에 보는 것들’이라는 이름의 재생목록이었다. 안서원은 그 재생목록을 클릭했고, 그 순간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주말 오후, 펜트하우스 거실은 유난히 고요했다. 안서원은 소파에 앉아 태블릿 PC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고 소파 헤드에 기댄 홍예준이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안서원의 손끝에서 태블릿 화면을 스크롤 하는 동작은 어딘가 기계적이었다. 그녀는 지금, 범죄의 증거 목록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수사관의 심정이었다. 스크롤이 멈춘 곳은 ‘시청 기록’ 페이지였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낯선 영상의 향연. 안서원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건 단순한 계정 공유가 아니었다. 명백한 알고리즘 침략이자, 취향의 식민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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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원은 태블릿 화면을 꺼, 소파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탁, 하는 작은 소리에 눈을 감고 있던 홍예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잠이 깬 건 아니었다. 그저 고요를 깨는 소리에 대한 반사적인 반응. 안서원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화롭게 잠든 얼굴. 저 얼굴을 하고 밤새도록 괴수 사체 처리 영상이나 보고 있었다는 건가. 안서원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오빠."
홍예준은 대답이 없었다. 안서원은 다시 한번 불렀다.
"홍예준."
그제야 홍예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잠에서 덜 깬 하늘색 눈동자가 안서원을 향했다. 초점이 흐릿했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안서원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유튜브 계정, 오빠가 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