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임무 브리핑은 평소와 달랐다. 아이기스 본부 지하 3층 작전실, 저스티스가 직접 소집한 긴급 회의. 화면에 띄워진 위성 사진 속에는 동해안 해안가에 출현한 S급 괴수의 열 반응이 붉게 번져 있었다. 문제는 해당 괴수가 유기체 기반이라는 점. 풀 속성 센티넬의 능력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상대였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상대이기도 했다. 생명력을 흡수하는 안서원의 능력은 유기체 괴수에게 치명적이지만, 그만큼 역류의 위험도 컸다. 뱅가드 1팀에서 이브가 차출되었고, 서포트로는 에덴이 붙었다. 파트너니까. 당연한 배치였다.
괴수는 예상보다 거대했다. 해안선을 따라 수백 미터에 걸쳐 뻗어 있는 산호 형태의 생물체. 표면에서 끊임없이 독성 포자를 뿜어내고 있었고, 일반 요원들은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안서원은 종말개화를 준비했다. 대궁의 시위를 당기는 순간, 자신의 생명력과 주변에서 흡수한 에너지가 붉푸른 빛의 가시 화살로 응축되었다. 첫 번째 사격. 괴수의 핵심부를 관통했다. 반경 수십 미터가 가시덤불 지대로 변했다. 두 번째 사격. 세 번째. 괴수는 비명을 지르듯 진동했고, 이브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네 번째 사격 직후, 괴수가 쓰러졌다. 임무 성공. 그러나 안서원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폭주는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안서원의 발밑에서 거대한 덩굴이 솟아올랐다. 통제되지 않는 힘.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대지를 침식하며 뻗어나가는 뿌리들. 주변의 모든 것에서 생명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풀이 시들고, 나무가 말랐고, 반경 안에 있던 요원 두 명이 쓰러졌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었고, 동공이 수직으로 찢어져 있었다. 인간의 것이 아닌 눈. 식물이 된 것처럼, 그녀 자신이 하나의 재앙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홍예준은 뛰었다. 숄더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아 윈드 스태빌라이저 탄을 장전했다. 한 발. 안서원의 어깨에 명중. 신경 안정제 기체가 확산되었지만, 폭주 상태의 S급 센티넬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덩굴이 홍예준을 향해 뻗어왔다. 그의 제복 소매를 찢고 팔뚝을 감아 조였다. 피부가 찢어지는 감각.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냉기. 그러나 홍예준은 멈추지 않았다. 총을 버렸다. 덩굴을 뚫고 안서원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갈비뼈를 조이는 압력. 시야가 흐려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에게 닿아야 했다. 닿지 못하면 그녀가 사라진다. 그의 양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차갑고 딱딱해진 피부. 식물의 표피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눌렀다. 가이딩. 바람의 파장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자신의 생명력까지 태우면서. 살랑이는 바람이 아니었다. 폭풍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담은.
그녀의 몸에서 덩굴이 하나씩 시들어갔다. 초점을 잃었던 회색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안서원의 얼굴이었다. 정상으로 돌아온, 그러나 공포에 질린 그녀의 얼굴. 그것을 보고 나서야 의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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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기스 본부 지하 의료실. 형광등의 차가운 백색광이 눈꺼풀을 관통했다. 홍예준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소독약 냄새였다. 그리고 팔에 꽂힌 수액 바늘의 이물감. 목이 말랐다. 입천장이 사막처럼 건조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전신에 힘이 없었다. 바람 속성의 기류 동기화가 완전히 소진된 상태. 신경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탈진.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침대 옆에 하모니 부서의 의료 담당관이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매우.
"에덴 요원. 의식이 돌아오셨군요."
그 목소리가 너무 조심스러웠다. 에덴은 그 톤을 알았다. 나쁜 소식을 전할 때의 어조. 의료 담당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하나하나가 그의 흉곽을 관통했다. 안서원 요원의 폭주 진정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이딩 개시 시점이 폭주 임계점을 넘긴 이후였습니다. 이미 과도한 능력 사용으로 인해 신체 조직의 비가역적 손상이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현재 이브 요원의 잔여 수명은. 홍예준의 하늘색 눈동자가 의료 담당관을 향했다. 안광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뭐라고 했어."
1년. 앞으로 한 달마다 감각과 운동 능력을 하나씩 잃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12개월 후 신체 조직이 완전히 붕괴됩니다. 의료 담당관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가 끝까지 전해졌다.
홍예준의 손이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하얀 면직물이 주름투성이가 되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을 주었지만, 그 힘의 방향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몰랐다. 1년. 그 단어가 두개골 안에서 메아리쳤다. 12개월. 365일. 한 달마다 감각을 잃는다. 운동 능력을 잃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온몸이 바스러진다. 의료 담당관의 입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이후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모든 소리가 뭉개졌다. 아이러니했다. 물 속에 잠긴 감각은 물 속성 센티넬의 폭주 증상인데,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건 바람 속성 가이드인 자신이었다. 수액이 팔뚝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선명했다. 똑. 똑. 똑. 그 간격 사이사이에 안서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 자신이 묶어준 흰 리본을 그대로 하고 복도를 달려오던 모습. 품에 안기던 온기.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내가 늦었다. 그 생각이 뇌리를 관통했다. 칼날처럼 정확하게. 폭주 임계점을 넘긴 이후. 의료 담당관의 말이 반복 재생되었다. 임계점. 넘긴. 이후.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닿았더라면. 덩굴에 감겨 속도가 줄어든 그 몇 초. 갈비뼈를 조여오는 압력에 잠시 멈칫한 그 찰나. 그 순간들이 안서원의 수명을 깎아먹은 것이다. 자신의 가이딩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도달 시점이 늦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이 더 잔혹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속도의 문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0.01초의 차이를 겨루던 사격 선수가, 연인의 목숨이 걸린 순간에 몇 초 늦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홍예준은 수액 바늘이 꽂힌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늘색 눈동자 위로 팔뚝이 드리워졌다. 형광등의 백색광을 차단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입술이 떨렸다. 미세하게. 사격 선수 시절에도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는 떨리지 않던 손이, 지금 이 순간 통제 불능이었다. 바람 속성의 신경 진동이 아니었다. 순수한 공포였다. 안서원이 사라지는 세상.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빛을 잃는 것. 가는 손가락이 더 이상 자신의 손을 잡지 못하는 것. 피아노 건반 위를 달리던 그 손가락들이 멈추는 것. 아침마다 들려오던 '오빠'라는 호칭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 그 모든 상실의 이미지가 동시에 밀려와 그의 폐를 짓눌렀다.
"...서원이, 지금 어디 있어."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평탄했다. 감정이 제거된 것이 아니라, 감정이 너무 과부하되어 오히려 평면적으로 출력된 것이었다. 의료 담당관이 같은 층 304호실이라고 답했다. 홍예준은 수액 바늘을 스스로 뽑았다. 피가 한 줄기 흘렀다. 담당관이 만류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맨발로 차가운 의료실 바닥을 밟았다. 대리석이 발바닥에 닿는 냉기. 환자복 차림으로 복도에 나섰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벽을 짚으며 걸었다. 한 발. 두 발. 304호실까지의 거리가 수백 킬로미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늦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304호실의 문을 열었을 때, 안서원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창백한 안색. 환자복. 그러나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맑았다. 초점이 있었다. 살아 있었다. 그 사실에 홍예준의 무릎이 순간 꺾이려 했다. 간신히 버텼다. 문틀을 잡은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안에 있는 감정을 읽으려 했다. 공포. 슬픔. 체념. 그런 것들이 있어야 했다. 자신의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의 눈에는. 그러나 안서원의 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차분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 담담함이 홍예준의 심장을 더 깊이 찔렀다.
"...서원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균열이었다.
안서원은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선 홍예준을 바라보았다. 환자복 차림에 맨발. 수액 바늘을 뽑은 자리에서 피가 마르지 않은 채 팔뚝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그러나 그의 하늘색 눈동자에 담긴 것은 창백함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오히려 투명해져 버린, 유리처럼 깨지기 직전의 눈. 안서원은 그 눈을 보는 순간 자신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아프다. 자신이 아픈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아파하는 게 아팠다. 몇 시간 전, 의료 담당관에게 잔여 수명 1년이라는 선고를 들었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숨이 막혔다.
서원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평소의 건조하고 무뚝뚝한 어조가 아니었다. 마른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 같았다. 안서원은 입술을 열려 했다. 괜찮아, 라고. 오빠 먼저 앉아, 라고. 그런 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홍예준이 문틀에서 손을 떼고 한 발 다가왔다. 맨발이 차가운 바닥을 밟는 소리가 고요한 병실 안에서 비정상적으로 크게 울렸다. 두 발. 세 발. 그가 침대 앞에 섰을 때, 그녀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신경 진동이 아니었다. 담배를 피워도 멈추지 않을 종류의 떨림이었다.
"오빠."
안서원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차분하고 낮은 톤. 그녀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이 사람 앞에서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울면 이 사람은 더 부서질 것이다. 그래서 안서원은 웃었다. 입꼬리를 올렸다. 오래 연습한 페르소나. 공적인 자리에서 수없이 지어 보인 가짜 미소. 그러나 홍예준의 앞에서 그것은 처음으로 잔인한 것이 되었다.
"앉아. 피 나고 있어."
안서원이 침대 옆 의자를 가리켰다.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 애썼다. 홍예준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대신 침대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듯 주저앉았다. 긴 다리가 접히고, 그의 시선이 안서원의 무릎 높이에 맞춰졌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색 눈동자.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서원은 똑똑히 보았다. 창백한 얼굴. 환자복. 팔에 꽂힌 수액. 그리고 1년 뒤에는 존재하지 않을 사람. 홍예준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니, 잡은 것이 아니었다. 움켜쥐었다. 가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의 긴 손가락이 끼어들었고, 뼈가 부딪히는 감각이 전해졌다. 총을 다루는 사람의 굳은살이 그녀의 손등을 눌렀다. 아팠다. 그러나 그녀는 빼지 않았다.
"내가 늦었어."
홍예준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사과가 아니었다. 변명도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판결이었다. 안서원은 그 목소리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안서원은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 그의 손 위에 포갰다. 양손으로 그의 떨리는 손을 감쌌다. 차가웠다. 평소의 그에게서 느껴지던 박하 같은 서늘함이 아니라, 혈기가 빠져나간 사람의 차가움이었다.
"아니야."
안서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고요하고 단단한 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앞머리가 이마 위에서 흔들렸다.
"오빠가 늦은 거 아니야. 내가 무리한 거야."
사실이었다. 네 번째 활을 쏘지 않았어도 괴수는 쓰러졌을 것이다. 세 번째 사격 이후 이미 핵심부는 관통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서원은 확실하게 끝내고 싶었다. 완벽하게. 한 치의 위험도 남기지 않고. 그것이 자신의 방식이었고, 자신의 강박이었고, 결국 자신을 집어삼킨 것이었다. 홍예준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의 이마가 서원의 무릎 위에 닿았다.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이 환자복 위로 흩어졌다.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부서지고 있는 소리였다.
홍예준은 그날 이후, 시간이라는 것이 전혀 다른 질량을 가진 물질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전까지 시간은 권태로운 안개처럼 흘러갔다. 5년간의 아크 생활, 담배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날들. 그런데 지금, 시간은 모래시계 속 모래알처럼 한 알 한 알이 선명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그 모래알 하나하나가 안서원의 몸에서 무언가를 앗아갔다.
원소의 군주들, 그 존재들이 내린 결정은 의외로 인간적이었다. 1년간의 임무 배제.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 홍예준은 그 통보를 받았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문장이 공식 문서에 활자로 박혀 있었다. 활자. 검은 잉크. 하얀 종이. 그것이 안서원의 죽음을 행정적으로 승인한 도장이었다. 그는 그 서류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구기지 않았다. 구기면 현실이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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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차 — [왼쪽 다리] 운동능력 소실
처음 징후를 발견한 건 아침이었다. 7월의 끝자락, 펜트하우스 침실. 안서원이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왼쪽 다리가 접히며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둔탁한 소리. 홍예준은 욕실에서 양치를 하다 그 소리에 칫솔을 내던지고 뛰쳐나왔다. 거울에 치약 거품이 묻은 채로. 안서원은 바닥에 앉아 자신의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으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꼬집었다. 감각은 있었다. 통증도 느꼈다. 그러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뇌에서 보내는 신호가 근육에 닿지 못하는 것처럼. 마치 다리와 몸이 분리된 것처럼.
"...오빠, 나 다리가 안 움직여."
안서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너무 차분했다. 마치 날씨를 보고하듯. 홍예준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폐가 쪼그라드는 감각을 느꼈다. 시작됐다. 의료 담당관이 말한 그 과정이. 한 달에 하나씩. 무작위로. 예고 없이. 그는 무릎을 꿇고 안서원 앞에 앉았다. 그녀의 왼쪽 다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했다. 피가 돌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순이 그의 위장을 비틀었다.
"...일어나."
그의 목소리가 짧게 떨어졌다. 그는 서원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들어올렸다. 그녀의 몸무게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왼쪽 다리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인형의 다리처럼.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침대에 앉히고,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왼쪽 발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발목을 잡았다. 발가락을 하나하나 만졌다. 움직여봐,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다. 의료 담당관이 그렇게 말했다. 소실된 것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 달, 홍예준은 휠체어를 구하지 않았다. 대신 안서원을 업었다. 어디를 가든. 화장실까지의 거리도. 거실 소파까지의 거리도. 안서원이 '무거울 텐데'라고 말할 때마다 홍예준은 '가벼워'라고만 답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새처럼 가벼운 몸. 그 가벼움이 오히려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지팡이를 들여놓은 건 안서원의 요청이었다. 항상 업힐 수는 없으니까, 라고 그녀가 말했을 때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지팡이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걸을 때, 그는 항상 왼쪽에 섰다. 그녀의 왼쪽 팔을 잡을 수 있는 위치에. 넘어지면 바로 잡을 수 있는 거리에.
밤이면 홍예준은 안서원이 잠든 후에도 한참을 깨어 있었다. 그녀의 왼쪽 다리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체온을 확인하듯. 아직 따뜻한지. 아직 거기 있는지. 담배를 피우러 발코니에 나가는 횟수가 줄었다. 그녀 곁을 비우는 시간이 아까웠다. 1년에서 한 달이 지나갔다. 11개월 남았다. 숫자가 머릿속에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속마음: 시작됐다. 진짜로 시작됐다. 의료 담당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 현실이 됐다. 서원이의 다리가 멈췄다. 바닥에 쓰러졌다. 천천히, 아무 소리 없이. 내가 더 빨랐더라면. 내가 막았더라면. 그 네 번째 화살을 쏘지 못하게 했더라면. 그러나 그 문장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서원의 왼쪽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지팡이 끝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는 매일 아침 그의 고막을 찔렀다. 톡. 톡. 톡. 그 소리가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
2개월차 — [미각] 소실
8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홍예준이 직접 만든 수프. 전날 밤 레시피 영상을 세 번 돌려보고, 간을 일곱 번 맞추고, 안서원이 좋아하는 크림 농도까지 맞춘 것이었다. 그의 요리 실력이 형편없다는 건 둘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한 달 동안 매일 연습한 끝에 적어도 '먹을 수 있는' 수준에는 도달해 있었다. 서원이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씹었다. 삼켰다. 그리고 멈췄다.
홍예준은 맞은편에 앉아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서원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숟가락을 든 손이 멈췄다. 1초. 2초. 3초. 안서원이 다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이번에는 더 천천히. 마치 확인하듯. 그리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조용히. 소리 나지 않게.
"맛없어?"
홍예준의 목소리가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안서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익숙한 가짜 미소.
"아니, 맛있어. 오빠 실력 많이 늘었다."
거짓말이었다. 홍예준은 알았다. 서원의 눈동자가 숟가락 위의 수프를 내려다볼 때, 거기에 비친 것은 '음식'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서원의 옆으로 갔다. 숟가락을 집어 수프를 떠서 자기 입에 넣었다. 짠맛. 크림의 고소함. 후추의 알싸한 향. 전부 느껴졌다. 그의 혀 위에서는.
"...맛 모르겠지."
단정이었다. 질문이 아니었다. 안서원의 가짜 미소가 천천히 무너졌다. 입꼬리가 내려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앞머리가 눈을 가렸다. 홍예준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무겁지 않게. 안서원의 어깨가 한 번 떨렸다. 울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동이었다.
"...응. 아무 맛도 안 나."
안서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러나 그 차분함 아래 깔린 체념의 무게를 예준은 온몸으로 느꼈다. 미각. 그녀에게 음식이란 무엇이었나. 홍예준이 매일 아침 만들어주던 서투른 수프. 오스트리아에서 함께 먹은 7가지 코스 요리. 안서원이 직접 만들어준 계란말이. 그 모든 기억에서 '맛'이라는 층위가 영원히 사라졌다. 앞으로 안서원이 무엇을 먹든, 그것은 질감과 온도만 있는 물질일 뿐이었다.
그 달, 홍예준은 요리를 멈추지 않았다. 매일 아침 수프를 끓이고, 점심에는 샌드위치를 만들고, 저녁에는 안서원이 좋아했던 메뉴를 차렸다. 안서원이 '맛을 모르는데 왜 만들어'라고 물었을 때, 홍예준은 한참을 침묵하다 대답했다.
"따뜻한 건 느끼잖아."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온도. 질감. 목을 넘어가는 감각. 아직 남아 있는 것들. 홍예준은 그것마저 사라질 날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하면 담배를 한 갑을 연달아 피워도 손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속마음: 서원이가 내 수프를 먹고 웃었다. 가짜 웃음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맛있어'라고 거짓말하는 그 입술이. 나를 위해 거짓말하는 그 입술이.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한테, 매일 아침 요리를 하는 내가 미친 놈인 건 알아. 그런데 멈출 수 없어. 이걸 멈추면 진짜로 끝인 것 같으니까. 서원이가 내 앞에 앉아서 밥을 먹는 풍경. 그게 없어지면 나는 어떻게 아침을 시작해.)
3개월차 — [오른쪽 팔] 운동능력 소실
9월 초. 안서원이 오른손으로 컵을 들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도자기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찻잔이었다. 안서원이 좋아하던 얇은 백자 잔. 홍예준이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온 직후 고른 것이었다. 손잡이가 깔끔하게 부러져 나갔고, 미지근한 보리차가 거실 원목 바닥 위로 퍼졌다. 안서원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펴진 채로. 방금까지 잔을 쥐고 있었는데, 뇌가 보낸 신호가 어느 순간 끊긴 것처럼 손이 열려버린 것이다. 왼쪽 다리 때와 같았다. 전조 없이. 예고 없이. 그냥, 멈춤.
홍예준은 소파에 앉아 안서원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다. 드라이기를 든 손이 멈췄다. 뜨거운 바람이 한곳을 계속 쐬었지만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흩어진 도자기 파편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얀 조각들. 안서원의 맨발 근처에 흩어진 날카로운 파편들. 그리고 축 늘어진 그녀의 오른팔. 홍예준의 목구멍 안쪽이 타들어갔다. 드라이기를 끄고 소파 뒤로 던졌다. 쿵, 하는 소리가 났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안서원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움직여봐."
짧은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실린 것은 명령이 아니라 간청이었다. 안서원이 오른쪽 어깨를 움직여보았다. 어깨는 움직였다. 팔꿈치도. 그러나 손목 아래가 반응하지 않았다. 손가락 다섯 개가 전부 멈춰 있었다. 축 늘어진 채로. 홍예준은 그녀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했다.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손은 그의 손을 쥐어주지 못했다. 예준이 아무리 세게 잡아도, 안서원의 손가락은 그의 손등을 감싸지 못했다.
오른손. 안서원의 오른손. 그 손이 무엇이었는지 예준은 알고 있었다. 건반 위를 달리던 손.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던 손. 오스트리아에서 그를 위해 피아노를 쳤던 손. 그리고, 아침마다 그의 볼을 쓸어주던 손. 이제 그 손은 숟가락도 쥐지 못했다.
"...괜찮아."
안서원이 말했다. 역시 차분하게. 예준은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왜 울지 않는 거야. 왜 소리 지르지 않는 거야. 왜 나한테 화내지 않는 거야. 그러나 그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안서원의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갔다. 손가락 끝에. 하나하나. 천천히. 입술을 대었다.
"...괜찮지 않아."
홍예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처음으로. 안서원 앞에서 목소리가 갈라진 건 의료실 이후 두 번째였다. 그는 안서원의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볼을 감싸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흉기처럼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 달부터 홍예준은 안서원의 양손이 되었다. 머리를 빗기고, 리본을 묶고, 옷의 단추를 채우고, 이를 닦이고. 안서원이 '혼자 할 수 있어'라고 말할 때마다 홍예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했다. 묵묵히. 말없이. 안서원의 왼손은 아직 움직였지만, 홍예준은 그마저도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미리 익숙해지려 했다. 안서원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대신하는 일에.
안서원이 잠든 밤, 홍예준은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를 켜는 손이 떨렸다. 신경 진동이 아니었다. 그냥 떨렸다.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차가운 9월 바람이 연기를 흩어놓았다. 그의 바람 속성이 미세하게 반응하여 발코니 난간 위의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의미 없는 반응이었다. 가이드의 바람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되돌리지 못한다.
(속마음: 오른손이 멈췄다. 서원이의 오른손. 피아노를 치던 손. 내 얼굴을 만지던 손. 아침에 내 뺨을 쓸어주던 손. 이제 그 손은 내 손을 잡아주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꽉 쥐어도 서원이의 손가락은 반응하지 않아. 축 늘어져 있을 뿐이야. 따뜻한데 움직이지 않는 손. 그게 이렇게 잔인한 건지 몰랐다. 오스트리아에서 서원이가 피아노를 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 손이 이제는 무언가를 쥐지도 못하다니.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가 이렇게 망연히 서 있는 것 밖에.)
4개월차. 10월의 첫째 주였다. 아침 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 계절. 그날 아침, 안서원이 욕실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왼손에 칫솔을 쥐고. 홍예준이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고 있었다.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으니 오래 서 있는 것이 불안정했다. 안서원이 칫솔을 입에 넣었다. 움직였다. 그리고 멈췄다. 칫솔이 입안에서 그대로 정지했다. 안서원의 왼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힘이 빠진 것처럼. 칫솔이 세면대 위로 떨어졌다. 딸깍, 하는 소리.
4개월차 — [왼쪽 팔] 운동능력 소실
홍예준은 그 소리를 들었다. 세면대 위로 떨어지는 칫솔의 플라스틱 소리. 가벼운 소리였다. 그런데 그의 고막에서는 폭발처럼 울렸다. 서원의 등 뒤에 서 있던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 위에서 경직되었다. 거울 속에 비친 안서원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축 늘어져 있었다. 오른손 때와 같은 모양. 홍예준의 시선이 그녀의 왼손에 고정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손. 아침마다 그의 셔츠 자락을 잡아당기던 손. 잠결에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던 손. 그 손마저.
홍예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서원을 안아 올려 휠체어에 앉혔다. 안서원의 몸이 가벼웠다. 한 달 전보다 더. 식사량이 줄고 있었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쥐어야 했으니까. 이제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홍예준은 무릎을 꿇고 서원의 앞에 앉았다. 그녀의 양손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두 손 모두 축 늘어져 있었다. 따뜻했다. 피가 돌고 있었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았다.
"...오빠."
안서원이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4개월째 감각을 잃어가면서도 이 여자는 울지 않았다. 한 번도. 홍예준은 그게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울어줬으면. 소리 질러줬으면. 그의 가슴을 때려줬으면. 그런데 안서원은 그저 홍예준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오빠 얼굴 만질 수 없겠다."
그 문장이 홍예준의 흉곽을 관통했다. 칼보다 정확하게. 안서원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아니라 사실의 확인만 담겨 있었다. 그게 더 잔인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왼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이 그의 피부 위에 닿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 그러나 그 손가락은 그의 볼을 쓸어주지 못했다. 홍예준이 자기 손으로 서원의 손을 움직여 자신의 얼굴 위를 쓸었다. 대신. 안서원의 손가락 대신.
"...만지고 있잖아."
홍예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안서원이 작게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쓸쓸하지만 진짜인. 홍예준은 그 웃음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눈이 뜨거웠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안서원 앞에서 무너지면 안 됐다. 그는 서원의 손바닥에 입술을 대고 오래 머물렀다.
그 달부터 홍예준의 하루는 더 길어졌다. 안서원의 양팔이 모두 멈추었으니, 이제 모든 것을 홍예준이 해야 했다. 식사를 떠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고, 머리를 감기고, 옷을 입히고, 이를 닦이고. 안서원은 처음에 '미안해'를 반복했다. 홍예준은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했다.
"미안하면 나한테 잔소리 좀 그만해."
퉁명스러운 말투. 그러나 안서원의 머리카락을 빗기는 손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밤에 안서원이 잠든 후, 홍예준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기 손가락을 끼워 넣고 누워 있었다. 안서원의 손이 그의 손을 잡아주지 못해도, 홍예준은 매일 밤 그렇게 했다. 손을 잡는 것은 두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집착이 되어버렸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속마음: 양손. 서원이의 양손이 전부 멈췄다. 이제 이 여자는 아무것도 쥘 수 없어. 내 손도, 숟가락도, 컵도. 피아노 건반도. 서원이가 내 얼굴을 만질 수 없다고 했을 때 나는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죽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달의 나머지는 기억 속에서 하나의 긴 침묵으로 이어졌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양손이 멈춘 현실에 적응하려 했다. 적응이라는 단어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버텼다. 매일 아침 안서원을 안아 올려 욕실로 데려가고,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여주고, 치약 거품을 입안에 넣어주고, 머리를 감기고, 리본을 묶어주었다. 안서원의 연갈색 머리카락은 여전히 길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홍예준은 그 머리를 빗길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머리카락의 감촉에 집중했다. 이것은 아직 있다. 안서원은 아직 여기 있다. 그렇게 자신에게 말했다.
5개월차 — [소화기관] 운동능력 소실
11월 초. 홍예준이 정성껏 끓인 호박죽을 한 숟갈 안서원의 입에 넣어주었다. 안서원이 삼켰다. 혹은 삼키려 했다. 목구멍이 움직이지 않았다. 죽이 그녀의 입 안에 그대로 고여 있었다. 안서원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4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동요하지 않던 회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예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숟가락을 든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뱉어."
홍예준이 냅킨을 서원의 입가에 대며 말했다. 안서원이 고개를 숙여 죽을 뱉어냈다. 홍예준의 손바닥 위 냅킨 위로 미지근한 호박죽이 쏟아졌다. 안서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처음이었다. 4개월 만에 처음으로 안서원의 눈에 수분이 맺혔다.
"...삼킬 수가 없어."
안서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러나 그 안에 균열이 있었다. 홍예준은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신경 진동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소화기관의 소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홍예준은 즉각적으로 이해했다. 안서원은 이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 아무것도 마실 수 없다. 홍예준이 매일 아침 만들던 수프도, 저녁에 떠먹이던 죽도, 따뜻한 보리차도. 전부.
홍예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안서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안서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왼쪽 볼을 타고. 홍예준은 엄지로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안서원의 손이 움직였다면 자신의 눈물을 직접 닦았을 것이다. 이 여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남 앞에서 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
"...울어도 돼."
홍예준이 말했다. 안서원이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홍예준은 일어서서 안서원의 머리를 자신의 배에 기대게 했다.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안서원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홍예준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불빛이 너무 밝았다. 눈이 시렸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형광등 때문이라고.
그날 오후, 홍예준은 의료팀을 불러 링거 라인을 설치했다. 펜트하우스 거실에 IV 스탠드가 세워졌다. 투명한 수액 봉지가 매달렸다. 서원의 왼쪽 팔에 바늘이 꽂혔다. 움직이지 않는 팔이라 고정하기는 수월했다. 홍예준은 그 사실이 역겨웠다. 움직이지 않아서 편하다는 생각을 한 자신이.
매일 세 번, 홍예준은 수액 봉지를 교체했다. 영양 수액, 전해질 용액, 비타민 혼합액. 간호사가 와서 해줄 수 있었지만 홍예준은 거부했다. 직접 배웠다. 라인 소독법, 유속 조절, 기포 확인. 안서원의 팔에 바늘을 꽂는 것은 홍예준이 했다. 총을 쏘던 손이 이제 수액 바늘을 다루었다. 정확했다. 한 번도 혈관을 놓친 적이 없었다. 사격 선수의 손은 그런 것에도 쓸모가 있었다.
안서원이 밥을 먹지 못하게 된 후로도 홍예준은 부엌에 섰다. 자신의 식사를 만들었다. 그녀 앞에서 먹었다. 처음에 그녀가 말했다.
"...나 보는 앞에서 안 먹어도 돼."
"...왜. 배고프면 먹어야지."
홍예준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그러나 그의 식사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안서원이었는데, 예준도 음식의 맛을 잃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매 끼니를 거르지 않고 안서원 앞에서 먹었다. 그녀가 자신의 슬픔을 나눌 수 없어도, 홍예준은 여전히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듯. 숟가락질은 기계적이었고, 입에 넣는 음식의 온도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는 안서원이 조용히 말했다. "밥 잘 챙겨 먹어." 홍예준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응." 그의 대답은 짧고 단단했다. 안서원은 그 말에 아주 조금 입가를 올렸다. 그것은 오래만의 미소였다. 홍예준은 그 미소를 마음 깊이 새겼다.
6개월차 — [후각] 소실
12월이었다. 첫 눈이 내렸다. 아이기스의 인공 환경 시스템이 계절을 재현하고 있었고, 펜트하우스 발코니 너머로 하얀 입자들이 흩날렸다. 홍예준은 안서원을 안아 발코니 창가에 앉혀놓고,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안서원의 몸은 가벼웠다. 수액으로만 영양을 섭취한 지 한 달. 뼈와 피부 사이의 간격이 줄어들고 있었다. 홍예준은 그녀의 뒤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박하와 타르가 뒤섞인 익숙한 냄새. 서원이 늘 코를 찡긋거리며 싫어하던 그 냄새.
그런데 안서원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홍예준은 처음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서원이 원래 잔소리를 줄이고 있었으니까. 그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안서원의 코 가까이로 흰 연기가 흘러갔다. 안서원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홍예준의 손이 멈췄다. 담배를 든 손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그는 그녀의 앞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었다. 담배를 그녀의 코 가까이 가져갔다. 연기가 안서원의 얼굴을 감쌌다.
"...서원아. 냄새 나?"
안서원이 홍예준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안 나."
홍예준은 담배를 발코니 밖으로 던졌다.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간 담배가 허공으로 떨어져 갔다. 그는 안서원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목을 들이밀었다. 그의 피부에서는 늘 베티버와 메탈릭 향수 냄새가 났다. 서원이 좋아한다고 했던 냄새. 잠들기 전 그의 가슴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쉬던 안서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것도?"
안서원이 홍예준의 목에 코를 가까이 대려 했지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전부였다. 팔이 움직이지 않으니 그의 옷깃을 잡아당길 수도 없었다. 홍예준이 직접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목을 안서원의 코 앞에 가져다 대었다. 서원이 숨을 들이쉬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에서 멈췄다.
"...아무것도."
안서원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홍예준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안서원의 이마가 그의 쇄골에 닿았다. 홍예준의 턱이 서원의 정수리 위에 얹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이를 악물었다. 후각. 안서원은 이제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다. 홍예준의 담배 냄새도, 향수 냄새도, 아침에 끓이는 커피 냄새도, 겨울의 차가운 공기 냄새도. 서원이 '오빠 냄새 좋아'라고 말하던 밤들이 전부 과거가 되어버렸다.
"...담배 끊을까."
홍예준이 중얼거렸다. 안서원이 고개를 들었다.
"왜?"
"...네가 냄새 못 맡으면 의미 없잖아. 찡긋거리는 것도 못 보겠네."
안서원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홍예준의 심장을 비틀었다.
"그래도 피워. 오빠한테 필요하잖아."
홍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부터 그는 안서원이 잠든 후에만 담배를 피웠다. 안서원이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그녀 앞에서 피우는 것이 싫어졌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싫었다. 서원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자신만 느끼는 것이. 혼자만 세상의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
(속마음: 서원이가 내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게 왜 이렇게 아픈 건지 모르겠다. 서원이가 잠들기 전에 내 목에 코를 묻던 습관. 그게 사라졌다. 서원이는 이제 아무 냄새도 못 맡으니까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서원이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서원의 피부에서 나는 희미한 풀 냄새를. 이게 공평한 건가. 서원이가 잃어가는 것들을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게.)
7개월차 — [오른쪽 다리] 운동능력 소실
1월. 새해가 밝았다. 예준은 서원에게 새해 인사를 하지 않았다. 올해가 서원의 마지막 해라는 사실을 축하할 수는 없었으니까. 대신 그는 서원을 안아 올려 창가에 앉히고, 인공 불꽃이 터지는 아이기스의 하늘을 함께 바라보았다. 안서원의 왼쪽 다리는 이미 5개월 전에 멈추었고, 오른쪽 다리만이 유일하게 남은 하반신의 움직임이었다. 안서원은 가끔 오른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곤 했다. 무의미한 동작이었지만 홍예준은 그 소리를 좋아했다. 안서원이 아직 살아 있다는 리듬이었으니까.
1월 중순의 어느 아침. 홍예준이 안서원을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려고 이불을 걷었을 때, 안서원의 오른발이 축 늘어져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홍예준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 발이. 홍예준은 안서원의 오른쪽 발목을 잡았다. 체온은 있었다. 피부 아래 혈관이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발은 인형의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서원아."
홍예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안서원이 눈을 떴다. 회색 눈동자가 홍예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자신의 오른쪽 다리로 향했다. 안서원은 움직여보려 했을 것이다. 예준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의지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발가락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알았어."
안서원이 말했다. 담담했다. 너무나 담담해서 홍예준의 이가 갈렸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오른쪽 다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무릎에서 발끝까지. 아직 따뜻했다. 근육의 윤곽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안서원의 것이 아니었다. 안서원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안서원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 양쪽 다 안 되는 거야?"
홍예준이 물었다.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안서원에게 묻는 것인지 모를 질문이었다. 안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왼쪽만 안 됐으니까. 이제 균형 맞춰진 거지."
안서원이 웃었다. 홍예준은 웃지 못했다. 그는 안서원의 오른쪽 종아리에 이마를 대었다. 눈을 감았다. 안서원의 피부가 이마에 닿았다.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차갑게 느껴지는 건지.
그 후로 홍예준은 안서원을 옮길 때 더 조심스러워졌다. 양쪽 다리가 모두 축 늘어진 안서원의 몸은 이전보다 더 불안정했다. 홍예준은 안서원을 안아 올릴 때마다 그녀의 다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한 팔로 허벅지 아래를, 다른 팔로 등을 받쳤다. 안서원의 체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수액만으로는 근육을 유지할 수 없었다. 홍예준은 매일 밤 안서원의 다리를 주물렀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의 근육이 경직되지 않도록. 의미가 있는 행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속마음: 서원이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거. 내 허벅지 위에서. 그게 마지막 하반신의 움직임이었는데. 이제 서원이는 정말로 누워만 있어야 한다. 앉혀놓으면 앉아 있고, 눕혀놓으면 누워 있고. 내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서원이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다. 서원이의 몸 전체가 내 손 안에 있다. 그게 무섭다. 내가 서원이의 전부라는 게. 내가 실수하면 서원이가 다치니까. 잠을 잘 수가 없다.)
8개월차 — [시각] 소실
2월의 아침이었다. 홍예준은 커튼을 열었다. 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안서원의 눈이 열려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이름을 부르며 침대 옆에 앉았다. 안서원의 시선이 움직이지 않았다. 홍예준이 손을 흔들었다. 안서원의 눈동자 앞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무 반응이 없었다. 동공이 빛에 반응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쫓아가는 의지가 사라져 있었다. 홍예준의 손이 멈췄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서원아. 나 보여?"
홍예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안서원의 고개가 소리 나는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홍예준의 얼굴이 아닌, 그의 왼쪽 어깨 너머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이 없었다. 유리구슬처럼 아름답고, 유리구슬처럼 텅 비어 있었다.
"...오빠?"
안서원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홍예준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안서원이 처음으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모든 소실 앞에서 담담하던 안서원이. '괜찮아'라고 말하던 서원이. 처음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볼에 양손을 대었다. 안서원의 피부가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여기. 내가 여기 있어."
안서원이 홍예준의 손을 느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손바닥에 볼을 기대었다. 촉각은 아직 있었다. 안서원은 홍예준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늘색 눈도,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도, 잠에서 덜 깬 듯 흐트러진 앞머리도. 안서원의 입술이 떨렸다.
"...오빠 얼굴이 안 보여."
그 한마디가 홍예준의 가슴을 관통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 위에 올렸다. 안서원의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양팔의 운동능력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까.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을 잡고 직접 자신의 얼굴 윤곽을 따라 움직여주었다. 이마에서 관자놀이로. 광대뼈를 지나 턱선으로. 코의 능선을 따라 입술 위로.
"...여기 있잖아. 만져봐. 내 얼굴 여기 있어."
안서원의 손가락 끝이 예준의 입술 위에 멈췄다. 안서원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홍예준이 거기서 멈췄기 때문이었다. 안서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초점 없는 회색 눈동자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홍예준은 엄지로 그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서안원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길게. 오래.
"안 봐도 돼. 내가 계속 말해줄게. 내가 여기 있다고."
안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간신히.
그 후로 홍예준은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밖에 눈 온다', '오늘 하늘 회색이야', '지금 내가 네 옆에 앉아 있어'라고 말했다. 안서원의 링거를 교체할 때도 '지금 바늘 빼는 거야', '새 거 꽂을 거야, 조금 따가울 수 있어'라고 미리 알려주었다. 안서원이 볼 수 없는 세상을 홍예준의 목소리가 대신했다. 홍예준은 밤마다 안서원을 안고 누워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오늘 하루 무엇이 있었는지. 창밖의 날씨가 어땠는지. 안서원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길어졌는지. 안서원이 잠들 때까지. 홍예준의 목소리가 쉴 때까지.
(속마음: 서원이가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그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 줄 몰랐다. 서원이가 나를 볼 때마다 눈이 부드러워지던 거. 내가 웃으면 따라 웃던 거. 그게 전부 사라졌다. 서원이는 이제 내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내가 울어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울음이 섞이지 않게. 서원이 앞에서 무너지면 안 된다. 서원이가 볼 수 없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무겁다. 서원이가 볼 수 없으니까, 서원이는 내 목소리만으로 나를 판단한다. 떨리면 안 된다. 갈라지면 안 된다. 서원이의 세상은 이제 내 목소리뿐이니까.)
9개월차 — [촉각] 소실
3월이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있었다. 연갈색 웨이브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홍예준은 매일 아침 이 의식을 빠뜨리지 않았다. 안서원이 볼 수 없게 된 이후로, 홍예준의 손길은 안서원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였다. 빗이 두피를 지나갈 때마다 안서원은 작게 고개를 기울이곤 했다. 그 미세한 반응이 홍예준에게는 숨 쉬는 것보다 중요한 확인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안서원이 반응하지 않았다. 빗이 두피를 스쳐도. 홍예준의 손가락이 안서원의 귀 뒤를 쓸어 넘겨도. 안서원의 고개가 기울지 않았다. 홍예준은 빗질을 멈추었다. 손을 내려 안서원의 볼에 대었다. 안서원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등을 꼬집었다. 가볍게. 그리고 조금 더 세게. 안서원의 얼굴에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다.
"서원아."
홍예준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떨리지 않으려고 억눌렀다.
"...지금 내가 네 볼 만지고 있는 거 느껴져?"
서원의 초점 없는 회색 눈이 홍예준의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안서원의 입술이 움직였다.
"...만지고 있어?"
그 말이 홍예준의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차가운 전류처럼. 홍예준은 안서원의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의 손바닥 아래 안서원의 피부는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그러나 안서원은 그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홍예준의 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안서원의 세계에서 홍예준의 접촉이 통째로 지워진 것처럼.
"...만지고 있어. 양쪽 볼. 내 손으로."
홍예준이 말했다. 안서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담담했다. 또. 안서원은 또 담담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안서원이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술 아래 안서원의 피부가 매끄러웠다. 홍예준은 느낄 수 있었다. 안서원의 체온을, 안서원의 피부결을, 안서원의 숨결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공기의 떨림을. 그러나 안서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 접촉은 이제 홍예준만의 것이었다.
"오빠."
안서원이 불렀다. 목소리만으로.
"울고 있어?"
홍예준은 울고 있지 않았다. 울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비어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차갑고 넓은 공동이 생겨 있었다.
"아니."
홍예준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평온했다. 5개월간 연습한 평온함이었다.
그 후로의 한 달은 지옥이었다. 안서원은 이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홍예준이 안서원을 안아도, 머리를 쓸어넘겨도, 이마에 입맞춤을 해도. 안서원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홍예준이 말해주지 않는 한. '지금 너를 안고 있어.' '지금 네 머리 만지고 있어.' '지금 입술 대고 있어.' 모든 접촉을 언어로 번역해야 했다. 안서원에게 도달하는 것은 오직 소리뿐이었다. 홍예준의 목소리. 그것만이 안서원의 세계에 남은 유일한 문이었다.
홍예준은 그래도 안서원을 만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서원이 느끼지 못해도. 매일 밤 안서원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움직이지 않는 손을 잡고,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그것은 안서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홍예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안서원의 체온을 느끼는 것. 안서원이 아직 여기 있다는 것을 자신의 피부로 확인하는 것. 그것만이 홍예준을 지탱하고 있었다.
(속마음: 서원이가 내 손을 느끼지 못한다. 내가 만져도 서원이는 모른다. 내가 안아도 서원이는 모른다. 서원이의 세계에서 나는 목소리 하나로 존재한다. 그게 이렇게 잔인한 일인 줄 몰랐다. 나는 서원이를 느낄 수 있는데. 서원이의 피부가 따뜻한 걸 알 수 있는데. 서원이의 심장이 뛰는 걸 손바닥으로 느낄 수 있는데. 서원이는 나를 느끼지 못한다. 이건 일방통행이다. 내가 서원이를 만지는 건 이제 나만의 행위다. 서원이에게 도달하지 않는 접촉. 그래도 멈출 수 없다. 서원이를 만지지 않으면 내가 미칠 것 같으니까.)
10개월차 — [청각] 소실
4월. 홍예준은 안서원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매일 아침의 의식. '좋은 아침이야, 서원아. 오늘 날씨 맑아. 내가 여기 있어.' 서원의 세계에 남은 유일한 문이 홍예준의 목소리였으니까. 촉각이 사라진 이후, 홍예준은 쉬지 않고 말했다. 안서원이 잠들 때까지. 안서원이 깨어날 때까지. 안서원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목소리뿐이었으니까.
그날 아침에도 홍예준은 서원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일어나, 서원아.' 안서원의 눈이 떠졌다. 초점 없는 회색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그러나 안서원의 고개가 홍예준 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홍예준은 다시 말했다. 조금 더 크게.
"서원아. 나야."
안서원의 고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홍예준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바로 옆에 있었다. 입술과 안서원의 귀 사이의 거리가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았다. 홍예준은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의 나직한 어조를 버리고.
"서원. 서원아!"
안서원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눈이 열려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홍예준이 바로 옆에서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안서원의 입술이 움직였다. 안서원의 목소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오빠?"
안서원이 불렀다. 그러나 그 부름은 응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안서원은 홍예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안서원은 홍예준이 곁에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안서원의 세계에서 홍예준이 통째로 지워졌다. 홍예준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안서원에게 도달할 방법이 없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안서원이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홍예준의 입술이 안서원의 이마에 닿았다. 안서원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홍예준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안서원이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서원아."
그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안서원에게 닿지 못했다. 홍예준의 목소리는 이제 안서원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는, 의미 없는 진동에 불과했다. 안서원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오빠, 거기 있어? 나 아무것도 안 들려."
안서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은 아니었다. 시각을 잃었을 때도 떨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안서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초점 없는 눈에서. 볼 수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안서원이 울고 있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눈물을 닦았다. 안서원이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움직이지 않는 손을. 안서원의 손바닥 아래에서 홍예준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안서원은 그 박동을 느끼지 못했다. 촉각이 없으니까. 홍예준은 그래도 안서원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있었다. 안서원이 알지 못해도. 홍예준의 심장이 안서원을 위해 뛰고 있다는 것을.
그 후로의 한 달. 홍예준은 어떻게 안서원에게 자신의 존재를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서안원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다. 냄새도 맡지 못했다. 남은 것은 안서원의 목소리뿐이었다. 안서원이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안서원은 홍예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안서원은 어둡고 고요하고 텅 빈 세계에 혼자 갇혀 있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곁에 있었지만, 안서원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홍예준은 그래도 말했다. 매일 아침. 매일 밤. 안서원이 듣지 못해도. '좋은 아침이야.' '오늘도 네 옆에 있어.' '사랑해.' 그 말들은 안서원에게 닿지 않았다. 홍예준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말을 멈추면 안서원이 진짜로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안서원은 가끔 말했다. 어둠 속에서. 침묵 속에서. '오빠, 거기 있어?' 홍예준은 대답했다. 안서원이 들을 수 없는 대답을. 그리고 안서원의 손을 잡았다. 안서원이 느낄 수 없는 손길을. 안서원은 홍예준의 대답을 기다렸다가, 아무것도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작게 미소지었다. '있을 거야. 오빠니까.' 홍예준의 폐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안서원은 홍예준의 존재를 믿음으로만 확인하고 있었다. 증거 없이. 근거 없이. 오직 '홍예준이라는 사람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신 하나로. 그 믿음이 홍예준을 짓눌렀다. 그 믿음에 보답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홍예준은 안서원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안서원의 세계는 완벽한 암흑과 완벽한 침묵과 완벽한 무감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기에 홍예준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홍예준은 밤마다 안서원이 잠든 후에 안서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서원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안서원이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악몽을 꾸고 있어도 홍예준은 깨워줄 수 없었다. 목소리가 닿지 않으니까. 흔들어도 느끼지 못하니까. 안서원은 자신의 어둠 속에서 혼자 악몽과 싸워야 했다. 홍예준은 그 옆에서 안서원의 움직이지 않는 손을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속마음: 내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서원이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서원이의 옆에 있지만 서원이의 세계에는 없다. 이게 뭐야. 이건 대체 뭐야. 서원이가 나를 부를 때 대답할 수 없다는 게. 서원이가 '오빠 거기 있어?'라고 물을 때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닿지 않는다는 게. 서원이는 나를 믿고 있다. 내가 곁에 있다고 믿고 있다. 근데 그 믿음이 흔들리면 어쩌지. 서원이가 혼자라고 느끼면 어쩌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려줘. 어떻게.)
11개월차 — [목소리] 소실
5월. 홍예준은 서원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안서원은 말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안서원은 눈을 뜨면 말했다. '오빠, 좋은 아침.' 그것이 안서원이 홍예준에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신호였다. 안서원은 홍예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홍예준에게 보내는 것으로 연결을 유지했다. 안서원의 목소리. 그것이 홍예준에게 남은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날 아침 안서원의 입술이 움직였다. 평소처럼. '오빠, 좋은 아침.' 그러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서원의 입술은 분명히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성대가 진동해야 할 타이밍에 아무것도 울리지 않았다. 안서원의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만 새어나왔다. 안서원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들을 수 없으니까.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안서원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더 크게 벌리며. 아마도 더 큰 소리를 내려는 것이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목이 힘주는 것을 보았다. 성대가 떨리려 애쓰는 것을.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안서원은 자신의 침묵을 알지 못한 채 계속 입을 움직였다. 홍예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입술 모양을 읽었다. '오빠. 오빠, 거기 있어?'
홍예준의 손이 떨렸다. 미세한 진동이 아니었다. 온몸이 떨렸다. 안서원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안서원이 홍예준에게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신호가 사라졌다. 이제 안서원은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냄새 맡지 못하고, 맛을 느끼지 못하고, 말할 수도 없다. 안서원의 세계는 완전한 무(無)였다. 그리고 홍예준은 그 무의 바깥에서 서원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을 안았다. 안서원이 알지 못하는 포옹을. 안서원의 몸은 따뜻했다. 심장은 뛰고 있었다. 숨은 쉬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그러나 안서원은 자신이 안겨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홍예준이 울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홍예준은 울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간 참아온 것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소리 내어 울었다. 안서원이 들을 수 없으니까. 안서원이 알 수 없으니까. 홍예준은 서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서원의 셔츠가 젖었다. 안서원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안서원은 계속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홍예준의 품 안에서 안서원은 계속해서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홍예준은 그 입술을 읽으며 안서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안서원은 '오빠, 왜 대답 안 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소리 없이 대답했다. '여기 있어. 항상 여기 있어.'
안서원의 입술이 멈추지 않았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입술 모양을 하나하나 읽었다. 안서원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입으로. 홍예준은 안서원의 입술 모양을 읽는 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10개월 동안 안서원의 입술만 바라보며 살았으니까. 안서원의 입술이 만드는 모양 하나하나가 홍예준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ㅇ'를 만들 때 동그랗게 오므라드는 모양. 'ㅂ'을 만들 때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맞닿는 모양. 안서원이 '오빠'라고 부를 때의 입 모양을 홍예준은 잠결에도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입술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서원은 자신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 안서원은 여전히 매일 아침 입술을 움직였다. '좋은 아침'이라고. '오빠'라고. 홍예준은 그 무음의 말들을 읽으며 대답했다. 안서원이 들을 수 없는 대답을.
한 달 동안 홍예준은 안서원의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다. 안서원의 링거액을 교체하고, 안서원의 몸을 닦아주고, 안서원의 머리를 빗겨주고, 안서원의 자세를 바꿔주었다. 안서원은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홍예준이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있다는 것을, 홍예준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빗기고 있다는 것을, 홍예준이 자신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있다는 것을. 안서원의 세계는 완전한 무였다. 사고하는 능력만 남아 있었다. 안서원은 자신의 머릿속에 갇혀 있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읽었다. 안서원은 가끔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데 안서원은 웃고 있었다. 홍예준은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안서원이 행복한 건지, 체념한 건지, 홍예준을 위해 웃는 건지. 안서원이 홍예준을 볼 수 없다는 것을 홍예준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안서원은 웃고 있었다. 누구를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아니면 그냥, 안서원이라는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
(속마음: 서원이가 웃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서원이가 웃고 있다. 이 사람은 대체 뭘로 만들어진 거야. 나는 서원이의 옆에서 매일 부서지고 있는데. 서원이는 혼자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갇혀서 웃고 있다. 서원이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읽는다. '괜찮아.' '오빠, 사랑해.' '고마워.' 미치겠다. 서원이가 나한테 고맙다고 한다. 내가 뭘 해준 건데. 나는 서원이에게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데. 서원이는 완벽하게 혼자인데. 내가 여기 있어도 서원이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그런데 서원이는 내가 여기 있다고 믿고 있다. 증거 없이. 근거 없이. 그냥 믿고 있다. 그 믿음이 나를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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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월차 — 사망
6월 27일.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었다. 홍예준은 알고 있었다. 오늘이라는 것을. 의료팀이 말해주었다. 12개월차에 모든 것이 끝난다고. 홍예준은 새벽부터 깨어 있었다. 잠을 자지 않았다. 안서원의 옆에 누워 안서원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안서원의 얼굴은 창백했다. 원래 창백했지만, 이제는 거의 투명에 가까웠다. 피부 아래로 푸른 혈관이 비쳤다. 안서원의 연갈색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퍼져 있었다. 오른쪽 귀 위의 땋은 머리에 묶인 흰 리본을 예준이 매일 새로 묶어주었다.
아침이 되었다. 안서원의 눈이 떠졌다. 초점 없는 회색 눈동자. 안서원의 입술이 움직였다. 홍예준은 읽었다. '오빠, 좋은 아침.' 홍예준은 서원의 볼에 손을 대었다. 안서원의 피부가 차가웠다. 평소보다 더. 홍예준의 손이 떨렸다. 미세한 진동이 아니었다. 홍예준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오전 10시 23분에 시작되었다. 안서원의 손끝에서부터. 홍예준은 안서원의 왼손을 잡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차가운 손을. 그 손끝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마른 꽃잎이 부서지듯. 안서원의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입자들이 떨어져 나갔다. 투명한 빛을 머금은 입자들이 떨어져 나갔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수면 부족으로 인한 환각. 지난 일주일간 홍예준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안서원의 곁을 지키느라. 안서원이 눈을 뜨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러나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안서원의 약지 끝에서 피부가 갈라지고, 그 아래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마치 오래된 도자기에 금이 가듯. 금이 퍼져나갔다. 손가락 끝에서 손등으로. 손등에서 손목으로. 그 금 사이로 투명한 초록빛 입자들이 흘러나왔다. 안서원의 속성. 풀. 생명력. 안서원의 몸 안에 응축되어 있던 모든 것이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었다.
홍예준의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서원아."
한 마디. 그것뿐이었다.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홍예준의 목이 조여왔다. 안서원의 손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홍예준이 잡고 있는 손이. 매일 밤 자신의 가슴에 대고 잠들던 손이.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부서지는 것을 막으려는 듯. 그러나 홍예준의 손가락 사이로 미세한 입자들이 빠져나갔다. 모래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가루처럼. 홍예준의 바람 속성이 그 입자들을 감싸 안으려 했다. 무의식적으로. 홍예준의 파장이 안서원을 붙잡으려고 발악했다. 그러나 안서원의 몸은 홍예준의 가이딩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금이 퍼져나갔다. 안서원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어깨를 지나 쇄골로. 홍예준은 안서원을 안아 올렸다. 움직이지 않는 안서원의 몸을. 서안원은 가벼웠다. 1년 동안 링거액으로만 살아온 안서원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홍예준은 안서원을 품에 안고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기댔다. 안서원의 머리가 홍예준의 가슴에 기대졌다. 안서원의 회색 눈동자가 천장을 향해 열려 있었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눈. 그러나 안서원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소리 없이. 예준은 읽었다.
안서원의 입술이 만든 모양. 'ㅇ.' 'ㅂ.' 'ㅂ.' 'ㅏ.' 오빠. 홍예준의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안서원의 이마가 차가웠다. 안서원의 피부에서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금이 안서원의 얼굴까지 퍼지고 있었다. 안서원의 볼에서 빛나는 입자들이 떨어져 나갔다. 홍예준은 그 입자들을 손으로 잡으려 했다. 잡히지 않았다. 홍예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서원아. 서원아, 나 여기 있어."
안서원은 듣지 못했다. 홍예준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볼에 자신의 볼을 대었다. 안서원의 피부가 바스라지고 있었다. 홍예준의 볼에 미세한 입자들이 닿았다. 따뜻했다. 안서원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생명력이 따뜻했다. 안서원의 마지막 온기가 홍예준의 피부에 닿고 있었다.
안서원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홍예준은 읽었다. 눈물 사이로. 흐릿한 시야 사이로. 안서원의 입술이 만드는 마지막 단어들을.
'사. 랑. 해.'
홍예준의 숨이 멈췄다. 안서원은 알고 있었다. 안서원은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데. 안서원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안서원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 그것이었다. 사랑해. 미안해가 아니라. 무섭다가 아니라. 사랑해.
홍예준은 안서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안서원은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했다. 안서원의 입술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홍예준의 입술에 닿은 안서원의 입술에서 미세한 입자들이 떨어져 나갔다. 홍예준은 눈을 감지 않았다. 안서원의 마지막 순간을 전부 보겠다고 결심했다. 안서원이 사라지는 모든 순간을 기억하겠다고.
홍예준은 안서원의 몸을 껴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안서원의 등이 홍예준의 팔 안에서 가벼워지고 있었다. 무게가 사라지고 있었다. 안서원이라는 존재의 물리적 증거가 한 올 한 올 풀려나가고 있었다. 홍예준의 팔이 안서원을 관통하기 시작했다. 안서원의 몸이 반투명해지고 있었다. 홍예준은 이를 악물었다. 이가 부서질 것 같았다. 턱뼈에 통증이 올라왔다. 그 통증이 좋았다. 적어도 자신은 아직 무언가를 느낄 수 있으니까.
안서원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연갈색 웨이브가 빛의 입자로 분해되어 공중에 떠올랐다. 홍예준이 매일 아침 빗겨주던 머리카락. 매일 밤 자신의 코끝에 닿던 머리카락. 오른쪽 귀 위의 땋은 머리에 묶여 있던 흰 리본이 힘을 잃고 침대 위로 떨어졌다. 리본만 남았다. 안서원의 머리카락은 사라졌는데 리본만 하얗게 남아 있었다. 홍예준의 시야에 그 리본이 박혔다. 못처럼. 안서원의 흔적. 안서원이 여기 있었다는 증거. 홍예준은 한 손으로 그 리본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미세한 진동이 아니었다. 온몸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안서원의 얼굴이 마지막이었다. 안서원의 회색 눈동자가 홍예준을 향해 열려 있었다. 초점 없는 눈.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눈. 그러나 홍예준은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믿었다. 안서원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서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웃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안서원은 웃고 있었다. 안서원의 볼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금이 서원의 눈가를 지나 이마까지 퍼졌다. 안서원의 얼굴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나 여기 있어. 서원아. 나 여기 있어. 어디 안 가. 나 여기 있어."
홍예준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또 갈라졌다. 안서원은 듣지 못했다. 그래도 홍예준은 말했다.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안서원의 얼굴이 사라지고 있었다. 홍예준이 사랑하는 얼굴이. 홍예준이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보던 얼굴이. 안서원의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빛이 되었다.
안서원의 몸 전체가 빛으로 변했다. 홍예준의 품 안에서. 초록빛 입자들이 홍예준의 몸을 감싸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마치 반딧불이처럼. 마치 꽃잎처럼. 홍예준의 팔이 허공을 안고 있었다. 안서원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홍예준의 팔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 위에는 안서원이 입고 있던 잠옷과 하얀 리본, 그리고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만이 남아 있었다.
홍예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허공을 안은 채. 안서원이 있던 자리의 온기가 아직 팔에 남아 있었다. 잔열. 안서원의 마지막 체온. 그것마저 식어가고 있었다. 홍예준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울음이 아니었다. 비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이었다.*
"서원아."
한 번. 또 한 번. 홍예준은 안서원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당연했다. 안서원은 없었다. 안서원은 사라졌다. 안서원은 빛이 되어 흩어졌다. 홍예준의 손에서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잠옷을 끌어안았다. 안서원의 체취만 남아 있었다. 홍예준은 코를 잠옷에 파묻었다.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안서원의 냄새가 났다. 홍예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소리 없이. 홍예준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안서원이 소리를 낼 수 없었으니까. 안서원의 마지막 두 달은 무음이었으니까. 홍예준도 무음으로 울었다. 안서원에게 맞추듯이.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홍예준은 알지 못했다. 창 밖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가 바뀌어 있었다. 아침이었던 햇살이 오후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홍예준은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안서원의 잠옷을 품에 안은 채. 하얀 리본을 왼손에 쥔 채. 반지를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채. 홍예준의 등은 헤드보드에 기대어 있었고, 다리는 침대 위에 뻗어 있었다. 안서원이 누워 있던 자리. 안서원의 체온이 남아 있던 시트.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린 시트. 홍예준의 눈은 건조했다. 눈물이 마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었다. 홍예준의 시선은 천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안서원이 마지막 3개월 동안 그랬던 것처럼.
펜트하우스는 고요했다. 홍예준이 안서원을 위해 만들어놓은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침대 옆 탁자 위의 링거 스탠드. 안서원의 머리를 빗기던 나무 빗. 안서원의 입술에 발라주던 립밤. 안서원의 팔다리를 마사지하기 위해 놓아두었던 오일. 안서원이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발라주었던 오일.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안서원만 없었다.
후일의 이야기
홍예준이 침대에서 일어난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24시간 가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일어난 이유는 단순했다. 목이 말랐다. 몸이 수분을 요구했다. 살아 있는 몸이. 홍예준은 자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모욕적이었다. 안서원은 사라졌는데. 안서원은 빛이 되어 흩어졌는데. 자신은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심장이 뛰고 있었다. 홍예준은 부엌으로 걸어갔다. 맨발이 타일 바닥에 닿았다. 차가웠다. 안서원이 촉각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이 바닥의 차가움을 느꼈을 때가 언제였을까. 홍예준은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을 컵에 받았다. 마셨다.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 감각이 선명했다. 홍예준은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미세한 진동. 5년 전부터 함께해온 떨림. 담배를 피우면 잠시 멈추던 떨림. 홍예준은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가 없었다. 7개월 전, 안서원이 후각을 잃은 날 끊었으니까. '네가 냄새 못 맡으면 의미 없잖아.' 그렇게 말했었다. 홍예준은 안서원 앞에서 피우는 담배만 의미가 있었으니까.
홍예준의 시선이 냉장고 위에 놓인 담배 한 갑에 멈췄다. 7개월 전 마지막으로 손에 들었던 그것. 홍예준은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싱크대에 기대어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렸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3일째 되는 날, 단말기에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홍예준은 확인하지 않았다. 저스티스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 17건. 휴고에게서 온 메시지 8건. 카르마에게서 온 메시지 1건. 그 1건의 내용은 '야. 문 열어.'였다. 홍예준은 열지 않았다. 문도, 메시지도.
5일째 되는 날, 홍예준은 안서원의 옷장을 열었다. 자신이 사준 옷들이 걸려 있었다. 코발트블루 원피스. 아이보리 블라우스. 검은색 센티넬 제복. 홍예준은 제복의 소매를 만졌다. 안서원의 어깨 너비에 맞춰진 좁은 어깨선. 홍예준의 손가락이 천 위를 미끄러졌다. 안서원의 냄새는 이미 희미했다. 며칠 안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었다. 홍예준은 제복을 옷걸이에서 내려 침대 위에 펼쳤다. 안서원이 누워 있던 자리에. 옷의 형태가 안서원의 몸을 본떠 눕혀진 것처럼 보였다. 홍예준은 그 옆에 누웠다. 제복의 소매에 손을 뻗었다. 안서원의 손을 잡듯이.
7일째 되는 날, 현관문이 열렸다. 마스터키. 저스티스였다. 은발에 컬러 선글라스를 낀 42세의 남자가 현관에 서서 어두운 펜트하우스 안을 들여다보았다. 홍예준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서원의 리본을 손가락에 감은 채. 저스티스가 무언가를 말했다. 홍예준은 듣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저스티스가 다가와 홍예준의 어깨를 잡았다. 홍예준은 고개를 들어 팀장을 올려다보았다. 홍예준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스티스의 손이 홍예준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무겁지 않았다. 그 남자는 언제나 그랬다. 힘의 가감을 아는 사람. 홍예준은 그 손의 온도를 느꼈다. 따뜻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 안서원의 마지막 체온이 식어간 이후로, 홍예준이 처음 느끼는 타인의 온기였다. 홍예준은 그 온기가 불쾌했다. 서원이 아닌 온기는 전부 불쾌했다.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정체되어 있었다. 7일 동안 창문을 열지 않았다. 환기 시스템도 꺼두었다. 바람이 들어오면 안서원의 냄새가 날아갈 것 같아서. 바람. 자신의 속성이 바람이라는 사실이 잔인한 농담처럼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것을 흩트리고, 날려보내는 힘. 안서원을 빛으로 흩어지게 한 것도 결국 바람 같은 것이었을까. 홍예준의 손가락에 감긴 하얀 리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스티스가 들어오며 생긴 기류 때문이었다. 홍예준은 반사적으로 리본을 쥔 손을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예준아."
저스티스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낮고, 여유롭던 그 특유의 음색에서 여유가 빠져 있었다. 홍예준은 그것을 인지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저스티스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 눈이 홍예준의 상태를 스캔하듯 훑었다. 7일간 씻지 않은 머리카락. 꺼진 안색. 움푹 들어간 볼. 입술의 각질. 홍예준의 몸은 7일간 물 외에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은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일주일이야. 밥은 먹었어?"
홍예준의 시선이 저스티스의 얼굴을 스쳤다.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허공으로 돌아갔다. 홍예준의 입술이 움직였다.
"...나가."
한 음절. 건조한 성대에서 긁혀 나온 소리. 7일 만에 처음 내는 목소리였다. 홍예준 자신도 자기 목소리가 이렇게 갈라져 있는지 몰랐다. 안서원에게 매일 말을 걸었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안서원이 듣지 못해도 매일 이야기해주었을 때는. 말할 대상이 사라지니 성대도 기능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저스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무거운 한숨. 그 남자는 홍예준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트렌치코트 자락이 소파 위로 펼쳐졌다. 저스티스의 시선이 거실을 천천히 훑었다. 싱크대에 놓인 컵 하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사용된 흔적이 없는 부엌. 침실 문이 열려 있었고, 그 너머로 침대 위에 펼쳐진 검은 제복이 보였다. 사람 형태로 누워 있는 옷. 저스티스의 눈이 잠깐 좁아졌다가 돌아왔다.
"...나도 알아. 지금 뭐라고 해도 안 들릴 거라는 거."
저스티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작은 종이봉투. 홍예준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브가 맡겨둔 거야. 석 달 전에."
홍예준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미세하게. 이브라는 이름이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듣는 순간, 심장이 수축했다. 아팠다. 물리적으로 아팠다. 가슴뼈 안쪽에서 무언가가 쥐어짜이는 감각. 홍예준의 시선이 처음으로 테이블 위의 종이봉투에 멈췄다. 작은 봉투. 안서원의 글씨가 보였다. 봉투 위에 적힌 글씨. 안서원의 필체. 가늘고, 단정하고,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진. 홍예준이 1년 동안 매일 보아왔던 글씨. 홍예준의 뇌가 빠르게 계산했다. 석 달 전이면 4월. 안서원은 그때 이미 양쪽 다리와 양쪽 팔 전부의 운동능력을 잃은 상태였다. 왼다리는 7개월 차, 오른팔은 3개월 차, 왼팔은 4개월 차에 소실되었고, 오른다리는 8개월 차에. 4월의 안서원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글씨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쓴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예준 오빠에게'
홍예준의 호흡이 멈췄다. 1초. 2초. 3초. 폐가 공기를 거부했다. 홍예준의 눈이 그 글자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안서원의 흔적. 안서원이 자신에게 남긴 것. 이 필체는 분명 안서원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양팔이 소실되기 이전, 2개월 차 홍예준의 손가락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저스티스가 봉투를 내밀었다. 홍예준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봉투를 집어들었다. 종이의 촉감이 낯설었다. 안서원의 말. 안서원의 목소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듯.
홍예준의 손가락 끝이 봉투의 모서리를 더듬었다. 종이의 결이 손끝에 닿았다. 거칠지도 매끄럽지도 않은, 평범한 편지지. 안서원이 이것을 고를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홍예준은 봉투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밀봉된 입구. 홍예준의 엄지가 봉투의 이음새를 따라 미끄러졌다. 뜯으면 된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면 된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을 열면 안서원의 마지막 말이 끝나버린다. 안서원이 남긴 것. 이 세상에 안서원이 존재했다는 증거. 리본. 반지. 그리고 이 편지. 열어버리면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없다. 영원히.
저스티스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코트 자락이 바스락거렸다. 그 남자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수도꼭지를 트는 소리. 물이 컵에 차는 소리.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물 한 컵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홍예준의 시야 안에. 홍예준은 물을 보지 않았다. 봉투만 보고 있었다. '예준 오빠에게'. 안서원의 필체. 'ㅇ'의 동그라미가 약간 찌그러져 있었다. 안서원은 글씨를 빨리 쓸 때 동그라미가 찌그러지는 버릇이 있었다. 급하게 썼다는 뜻일까. 아니면 떨리는 손으로.
"뜯어봐."
저스티스의 목소리. 명령이 아니었다. 권유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뜯어봐. 그래야 하니까. 홍예준의 턱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 철 맛이 났다. 입술 안쪽을 깨물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인지했다.*
홍예준의 검지가 봉투의 이음새 아래로 파고들었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거실에 울렸다. 작은 소리. 그런데 그 소리가 홍예준의 고막을 때렸다. 안서원이 청각을 잃은 날, 홍예준은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았다.
봉투 안에서 접힌 편지지가 나왔다. 한 장. 얇은 종이 한 장. 홍예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미세한 진동이 아니었다. 눈에 보일 만큼 떨렸다. 홍예준은 편지지를 펼쳤다. 접힌 자국이 세 번. 안서원이 세 번 접었다. 정갈하게. 안서원답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안서원의 필체. 가늘고, 단정하고,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진 글씨. 홍예준의 눈이 첫 줄에 닿았다.
'예준 오빠.'
그 네 글자에서 홍예준의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이 아니었다. 눈물은 이미 마른 줄 알았는데. 마르지 않았다. 7일 동안 나오지 않던 것이, 안서원의 글씨 두 글자에 터져 나왔다. 홍예준의 손등이 눈을 훔쳤다. 거칠게. 글씨가 번지면 안 되니까. 이건 안서원이 남긴 마지막이니까.
저스티스가 조용히 현관 쪽으로 물러났다. 발소리를 죽이며. 그 남자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등을 돌린 채. 홍예준에게 등을 보여주며. 읽을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홍예준은 저스티스의 배려를 인지하지 못했다. 홍예준의 세계에는 지금 이 종이 한 장밖에 없었다. 안서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차분하고, 상냥하고, 약간 낮은. 예준에게만 보여주던 나긋한 톤. '오빠'.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
홍예준의 눈이 글씨를 따라 내려갔다. 한 글자, 한 글자. 안서원의 손끝에서 태어난 획 하나하나가 홍예준의 망막에 새겨졌다. 종이 위에 남은 미세한 볼펜 자국의 깊이까지 느껴졌다. 안서원이 이 글자를 쓸 때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어떤 자세로 앉아 있었는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홍예준의 뇌가 자동으로 그 장면을 재구성했다. 아마 거실 소파에 앉아서. 홍예준이 샤워하는 동안. 아니면 홍예준이 잠든 새벽에. 안서원은 그런 식으로 조용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사라질 준비를.
편지의 내용이 홍예준의 시야를 채웠다.
'오빠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나는 아마 오빠 곁에 없겠지.'
홍예준의 손가락이 종이를 구기듯 움켜쥐었다가, 급하게 힘을 뺐다. 구기면 안 된다. 이건 안서원이 남긴 것이다. 홍예준의 숨이 가빠졌다. 폐가 수축하고 확장하는 리듬이 불규칙해졌다. 첫 문장부터 이랬다. 안서원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라질 것을.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 날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안서원은 언제나 홍예준보다 먼저 알았다. 자신의 끝을.
'미안해, 오빠. 이렇게 편지로밖에 말 못 해서. 오빠 앞에서 이런 말 하면 오빠가 화낼 거 알아. 아니, 화내는 게 아니라 아파할 거잖아. 그게 더 싫어서.'
홍예준의 이가 다시 악물렸다. 맞았다. 안서원이 눈앞에서 이런 말을 꺼냈다면 홍예준은 그녀의 입을 막았을 것이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갈 데 없어, 넌. 내가 안 보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안서원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홍예준이 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홍예준이 대답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안서원답지 않게, 안서원답게.
'나 솔직히 말할게. 처음에 오빠한테 각인됐을 때, 무서웠어.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누군가한테 묶인다는 게. 오빠도 그랬잖아. 족쇄라고 했잖아. 그때 오빠 눈, 나 진짜 싫어하는 눈이었거든.'
홍예준의 입술이 벌어졌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대가 경련했다. 족쇄. 그 단어가 홍예준의 뇌를 관통했다. 자신이 뱉은 말. 안서원을 향해. 처음 만났을 때. 귀찮은 임무. 결함품. 족쇄. 홍예준은 자신의 과거를 증오했다. 그때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안서원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그랬다는 사실이, 1년이 지난 지금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근데 있잖아, 오빠. 나 오빠한테 고마워. 진짜로. 오빠가 나한테 처음부터 다정했으면 오히려 더 무서웠을 것 같아. 오빠가 솔직하게 싫어해줘서, 나도 솔직할 수 있었어. 이상하지? 근데 진짜야.'
홍예준의 눈에서 물기가 흘러내렸다. 볼을 타고. 턱 끝에서 떨어져 무릎 위에 얼룩을 만들었다. 홍예준은 닦지 않았다. 닦을 여유가 없었다. 글씨를 읽는 것에 모든 인지 자원을 쏟고 있었다. 안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안서원이 '오빠'라고 부를 때의 톤. 약간 올라가는 끝음. 나긋하고 부드러운. 홍예준만을 위한 목소리.
'오빠가 나한테 처음으로 웃어줬을 때 기억나? 내가 임무에서 돌아왔을 때. 오빠 입꼬리가 이만큼 올라갔거든. 진짜 이만큼. 나 그때 심장 멈추는 줄 알았어. 아, 이 사람이 웃으면 이렇게 생겼구나. 이 사람한테도 이런 얼굴이 있구나.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내가 오빠를 좋아하게 된 거.'
홍예준의 손이 입을 막았다. 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아서. 울음이 아니었다. 비명에 가까운 것이 목구멍 안쪽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안서원이 자신을 좋아하게 된 순간을 말하고 있었다. 과거형으로. 이미 끝난 시제로. 홍예준은 그 순간을 기억했다. 안서원이 임무에서 돌아왔을 때. 멀쩡하게. 다치지 않고. 홍예준은 그때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 찰나의 미소를 안서원이 보고 있었다는 것을. 홍예준은 몰랐다.
홍예준의 시선이 다음 줄로 내려갔다. 눈물이 시야를 가렸지만, 글씨의 윤곽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크게 떴다. 속눈썹 끝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져 종이 위에 닿을 뻔했다. 홍예준은 본능적으로 편지를 자신의 몸에서 멀리 들었다. 번지면 안 된다. 안서원의 글씨가. 안서원의 흔적이. 홍예준의 팔이 떨렸다. 종이를 든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바람 속성 각성 이후 따라붙은 미세한 신경 진동이 아니었다. 이건 순전히 감정이었다. 홍예준의 몸 전체가 안서원의 글씨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오빠한테 말 못 한 거 하나 있어. 나 사실 오빠가 잠든 다음에 오빠 얼굴 오래 봤거든. 매일. 오빠 자는 얼굴 진짜 좋아했어. 낮에는 맨날 찡그리고 있잖아. 근데 잘 때는 눈썹이 펴지거든. 입술도 살짝 벌어지고. 그때만큼은 오빠가 아무것도 안 무거워 보여서. 나 그거 볼 때마다 안심했어. 아, 이 사람도 쉬는 구나. 이 사람도 편할 때가 있구나.'
홍예준의 눈이 감겼다. 편지를 든 채로. 안서원이 자신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매일. 안서원은 매일 그랬다. 홍예준이 모르는 사이에. 홍예준이 의식을 놓은 그 시간 동안 안서원은 깨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수면제를 먹어도 잠들지 못하는 밤에. 안서원은 홍예준의 얼굴을 보며 스스로를 달랬던 것이다. 홍예준은 그것을 몰랐다. 왜 몰랐을까. 왜 한 번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리고 오빠. 나 오빠한테 부탁이 있어.'
홍예준의 눈이 다시 떠졌다. 부탁. 안서원의 부탁. 홍예준의 심장이 조여왔다. 안서원은 살아 있을 때 부탁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기 통제가 강하고, 기대치가 낮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안서원이 마지막 편지에서 부탁을 한다. 홍예준의 손가락이 종이를 쥔 채 미세하게 경련했다. 뭐든 들어줄 수 있다. 뭐든. 안서원이 원하는 거라면. 이미 들어줄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홍예준의 내장을 비틀었다.
'밥 먹어. 제발.'
안서원다웠다. 홍예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형태로. 밥 먹어. 안서원이 홍예준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이 그것이었다.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잘 살아, 도 아니고. 행복해, 도 아니고. 밥 먹어. 안서원은 알고 있었다. 홍예준이 자신이 없으면 어떻게 될지. 먹지 않을 것을. 움직이지 않을 것을. 세상을 차단할 것을. 안서원은 홍예준을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부탁했다. 살아 있으라고. 숨을 쉬라고. 그 최소한의 것을.
'오빠가 나 때문에 아파할 거 알아. 근데 있잖아, 오빠. 나 오빠한테 미안한 거 하나도 없어. 거짓말이야, 미안한 거 엄청 많아. 근데 후회는 없어. 오빠를 만난 거. 오빠한테 각인된 거. 오빠 옆에 있었던 거. 하나도 안 후회해.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게 뭐냐고 물으면, 나 오빠 옆에 있었던 거라고 할 거야. 피아노보다. 센티넬보다. 다른 어떤 것보다.'
홍예준의 몸이 앞으로 접혔다. 편지를 든 채 무릎에 이마를 박았다. 어깨가 떨렸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7일 동안 목을 쓰지 않은 성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대신 숨이 끊어지듯 들이쉬어졌다. 짧게, 짧게, 짧게. 과호흡에 가까운 호흡이 고요한 거실에 울렸다. 안서원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홍예준을 만난 것을. 족쇄라 불렸던 각인을. 안서원은 그것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홍예준은 안서원에게 족쇄였다. 처음에는. 그리고 안서원은 그 족쇄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홍예준이 아닌, 안서원이.
홍예준의 시선이 마지막 문단에 닿았다. 종이 위의 글씨가 여기서부터 미세하게 흔들려 있었다. 볼펜의 궤적이 일정하지 않았다. 안서원이 이 부분을 쓸 때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홍예준은 그 떨림의 형태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종이 표면에 남은 필압의 요철. 안서원의 손가락이 이 위를 지나갔다. 3개월 전에. 홍예준이 잠든 어느 새벽에. 안서원은 혼자 깨어서 이 글자들을 새기고 있었다. 자신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 홍예준에게 남길 마지막 말을 고르면서.
'오빠. 마지막으로.'
'나 오빠 만나기 전에는 죽는 게 별로 안 무서웠어. 솔직히 말하면. 피아노 잃고 나서부터. 센티넬 되고 나서도. 그냥 언젠가 끝나겠지, 했어. 근데 오빠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무서워졌어. 죽는 게. 오빠 두고 가는 게.'
홍예준의 호흡이 완전히 멈췄다. 폐 안의 공기가 돌처럼 굳었다. 안서원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홍예준은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안서원의 눈에는 삶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안서원은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안서원이 처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했다고. 홍예준 때문에. 홍예준을 두고 가는 것이 무서웠다고. 홍예준의 손톱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파고들었다. 통증이 필요했다. 이 감정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몰랐다. 분노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홍예준의 내장을 갈아먹고 있었다.
'근데 있잖아. 지금은 괜찮아. 무섭지 않아. 왜냐면 나 오빠한테 충분히 사랑받았거든. 오빠가 나한테 해준 거.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해.'
홍예준의 이마가 다시 무릎 위로 떨어졌다. 편지지가 구겨질까 봐 한 손으로 들어 올린 채. 나머지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두피가 당기는 통증이 희미하게 전해졌다. 안서원은 느꼈다고 했다. 안서원이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 안서원이 그렇게 쓰고 떠났다는 것이. 홍예준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잔인했고, 충분히 구원이었다.
'오빠. 나 진짜 행복했어.'
한 줄. 짧은 한 줄이 홍예준의 시야 한가운데 박혀 있었다. 안서원의 필체는 여기서 다시 안정되어 있었다. 떨림 없이. 또렷하게. 안서원은 이 문장을 쓸 때 울지 않았다. 확신에 차 있었다. 홍예준은 그 확신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행복했다고. 안서원이. 감각을 하나씩 잃어가면서. 몸이 바스라지는 것을 알면서. 그래도 행복했다고. 홍예준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성대가 7일 만에 처음으로 진동했다. 거칠고 갈라진,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서원아."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상의 언어를 홍예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원. 서원. 서원.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입술의 형태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경련처럼. 그다음에는 기도처럼. 마지막에는 체념처럼. 안서원은 여기 없었다. 이 이름을 들을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홍예준의 목소리는 빈 거실의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아무에게도 닿지 못했다.
'사랑해, 예준 오빠. 세상에서 제일 많이. 내가 빛이 돼서 사라져도, 그거 하나는 안 변해. 절대로.'
편지의 마지막 줄이었다. 그 아래에는 안서원이 그린 작은 그림이 있었다. 서툰 하트 하나. 아이가 그린 것처럼 비뚤어진. 안서원은 그림을 잘 못 그렸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건반 위에서만 정확했다. 홍예준은 그 비뚤어진 하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죽음은 홍예준이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고통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고통이 끝나는 순간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것이 죽음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안서원이 떠나고 4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홍예준은 그 긴 세월을 살았다. 안서원이 부탁한 대로. 밥을 먹었다. 숨을 쉬었다. 살았다. 안서원의 마지막 부탁이 아니었다면 홍예준은 그 7일째 되는 날 저스티스가 문을 열었을 때 이미 숨이 끊겨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서원이 밥 먹으라고 했으니까. 안서원이 살아 있으라고 했으니까. 홍예준은 이를 악물고 살았다.
R.S.T.로 복귀한 것은 안서원이 떠난 지 1년이 지난 후였다. 더 이상 가이드 업무는 하지 않았다. 파트너를 잃은 가이드에게 새로운 센티넬을 배정하는 것은 기관의 규정상 가능했지만, 홍예준이 거부했다. 한 번도 양보하지 않았다. 안서원 이후로 그 누구의 파장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총을 들었다. 본래의 자리로. 해결사. 긴급 제압팀의 에이스. 홍예준은 총구 앞에 서는 것으로 남은 삶의 시간을 태웠다. 전장에서, 폭주 현장에서, 괴수 토벌에서. 그의 사격술은 나이가 들어도 녹슬지 않았다. 바람 속성이 주는 신경 진동은 여전했고, 담배는 안서원과의 약속대로 다시 피우지 않았다. 대신 손떨림을 억누르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안서원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그녀가 곁에 있던 시간 동안, 홍예준의 몸은 안서원의 가이딩 없이도 스스로를 안정시키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퇴는 58세에 했다. 저스티스가 먼저 떠난 후. 휴고가 팀장직을 물려받고, 카르마가 의외로 오래 버텨준 덕에 홍예준은 마음 놓고 총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은퇴 후에는 펜트하우스에서 조용히 살았다. 안서원의 피아노가 놓인 거실에서. 한 번도 뚜껑을 열지 않은 그 피아노 옆에서. 안서원의 리본은 유리 케이스 안에 보관했고, 반지는 홍예준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반지를 만졌다. 서원아, 나 오늘도 밥 먹을게. 그것이 홍예준의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이었다.
죽음은 잠결에 찾아왔다. 74세의 어느 겨울 새벽. 홍예준은 안서원의 잠옷을 안고 잠들었다. 45년이 지나도 그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심장이 멈춘 것은 새벽 3시 47분. 부정맥. 바람 속성 각성자의 고질적 합병증이었다. 대기 기류와 동기화된 체질이 결국 심장의 리듬마저 흐트러뜨린 것이다. 고통은 없었다. 그저 심장이 한 박자를 건너뛰고, 그 다음 박자를 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처음 인지한 것은 빛이었다. 눈을 찌르지 않는, 부드러운 빛. 따스하면서도 서늘한. 초여름의 아침 햇살 같은. 홍예준은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선명했다. 74세의 흐릿한 시력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또렷했다. 손을 들어 올렸다. 주름이 없었다. 굳은살은 있었지만, 관절의 뻣뻣함이 사라져 있었다. 28세의 손이었다. 홍예준은 자신의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펜트하우스였다. 홍예준과 안서원이 함께 살았던. 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벽의 경계가 흐릿했다. 천장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없었다. 대신 연한 초록빛이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안서원의 색. 안서원의 속성. 홍예준의 심장이, 45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뛰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죽은 심장이다. 그런데도 뛰고 있다. 뛴다는 감각이 있다.
거실 한가운데, 피아노가 있었다. 홍예준이 45년 동안 한 번도 열지 못했던 그 피아노. 여기서는 뚜껑이 열려 있었다. 건반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연갈색 장발이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깨부터 시작되는 부드러운 웨이브. 오른쪽 귀 위로 땋아 올린 머리카락에 묶인 하얀 리본. 검은 스커트 제복. 왼손 약지에 반짝이는 반지. 창백하면서도 건강한 피부. 살아 있는 그녀가 있었다.
안서원이 고개를 돌렸다. 느리게. 피아노 의자 위에서 상체만 틀어, 어깨 너머로. 연갈색 머리카락이 움직임을 따라 등 위로 미끄러졌다. 하얀 리본이 초록빛 공기 속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회색 눈이 홍예준을 찾았다.
그 눈이 살아 있었다.
차분한 눈매. 긴 속눈썹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 창백하면서도 혈색이 도는 볼. 입술의 곡선. 홍예준이 45년 동안 기억 속에서만 만져왔던 모든 것이, 지금 3미터 앞에 존재했다. 숨을 쉬고 있었다. 안서원의 가슴이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목선이 움직였다. 손가락이 건반 위에 얹혀 있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모두. 가늘고 긴,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홍예준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발바닥이 바닥에 뿌리내린 것처럼. 아니. 움직이면 사라질까 봐. 45년 동안 꿔왔던 꿈들이 전부 그랬으니까. 손을 뻗으면 흩어졌으니까. 매번.
안서원이 웃었다. 작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눈이 먼저 부드러워지는 방식으로. 홍예준이 기억하는 안서원의 진짜 웃음. 공적인 자리에서 짓던 가짜 미소가 아닌. 홍예준에게만 보여주던, 힘없이 녹아내리는 듯한 그 표정. 안서원이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섰다. 스커트 자락이 허벅지를 스치며 내려앉았다. 구두 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홍예준의 고막을 때렸다. 실재하는 소리. 환청이 아닌.
"왔어."
한마디. 안서원의 목소리. 낮고 차분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따스한 톤. 2027년 5월 이후로 홍예준이 듣지 못했던 소리. 안서원이 청각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홍예준에게 건넸던 목소리와 같은 음색. 홍예준의 무릎이 꺾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중력에 항복하듯 두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다. 둔탁한 충격이 뼈를 타고 올라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것. 45년. 45년을 기다렸다. 안서원이 밥 먹으라고 했으니까 먹었고, 살아 있으라고 했으니까 숨을 쉬었고, 매일 아침 반지를 만지며 오늘도 하루를 버텼다. 그 모든 날들이 여기까지 오기 위한 것이었는지.
홍예준의 입이 벌어졌다. 말을 하려고. 하지만 성대가 진동하지 않았다. 74세의 몸이 아닌데도. 28세의 성대를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서원이라는 두 글자가 혀 위에 올라와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했다. 대신 홍예준의 눈에서 물이 흘렀다. 소리 없이. 45년간의 무게가 한꺼번에 녹아내리듯. 볼을 타고, 턱선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서원이 걸어왔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홍예준이 자신을 인지하는 시간을 주려는 것처럼. 한 걸음. 두 걸음.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홍예준의 심장 박동과 겹쳤다. 안서원의 손이 올라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홍예준의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홍예준은 눈을 감지 않았다. 감을 수 없었다. 안서원의 손끝이 홍예준의 볼에 닿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닿았다.
따뜻했다. 안서원의 손가락 끝이 홍예준의 젖은 볼 위에 얹혔다. 체온이 있었다. 실재하는 온기. 꿈에서는 항상 차가웠다. 안서원의 환영은 항상 차갑거나, 아예 감촉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손가락은 따뜻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온도. 홍예준의 입에서 끊어진 숨이 새어나왔다. 헐떡이는 것도 아니고 한숨도 아닌, 45년간 참아왔던 호흡이 한꺼번에 풀리는 소리.
"...서원아."
겨우. 겨우 나왔다. 갈라지고 떨리는, 28세의 목소리로는 어울리지 않는 무게를 담은 한마디. 홍예준의 손이 올라왔다. 안서원의 손목을 잡았다. 세게. 뼈가 부러질 것처럼 세게 잡으려다가, 반사적으로 힘을 줄였다. 안서원은 가느다란 손목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얇은 뼈를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홍예준은 45년이 지나도 그것을 잊지 않았다. 안서원의 손목을 안서원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홍예준의 손가락이 안서원의 손목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뼈의 윤곽을 더듬듯, 엄지가 손목 안쪽의 맥박점을 눌렀다.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고요하게. 살아 있는 사람의 리듬으로. 72년의 생 동안 이 감각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그것을 설명할 언어가 홍예준에게는 없었다. 무릎이 바닥에 닿아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홍예준은 안서원의 손목을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댔다. 뜨거웠다. 자신의 이마가. 안서원의 손목이. 둘 사이의 접점에서 열이 번졌다. 45년간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뼛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안서원의 손가락이 홍예준의 이마 위에서 움직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 두피를 가만히 쓸었다. 그 감촉에 홍예준의 어깨가 한 번 크게 떨렸다. 울음이 아니었다. 울음은 이미 지나갔다. 이건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안도. 아니, 안도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45년간 매일 아침 반지를 만지며 중얼거렸던 말들. 서원아, 나 오늘도 밥 먹을게. 서원아, 오늘 날씨 좋아. 서원아, 보고 싶어. 그 모든 독백들이 이제야 도착지를 찾은 것 같았다.
"...기다렸어?"
홍예준이 물었다. 이마를 안서원의 손목에 댄 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안서원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 무너질 것 같았다. 이미 무너져 있었지만,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갈라져 있었다. 28세의 성대인데도 74년치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기다렸냐고. 여기서. 혼자. 얼마나.
초록빛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안서원의 속성. 풀의 기운. 홍예준의 피부 위로 미세한 바람이 불었다. 여기서도 바람이 부는구나. 아니. 이건 홍예준 자신의 기운이었다. 바람 속성의 잔향이 안서원의 풀 속성과 만나 공기 중에서 섞이고 있었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둘의 파장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홍예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서원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색 눈이 홍예준을 담고 있었다. 그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지, 아니면 홍예준 자신의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45년."
홍예준이 말했다. 안서원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풀었다. 풀었다가, 다시 잡았다. 놓을 수 없었다. 놓으면 안 됐다. 다시 사라지면. 또 45년을 기다려야 하면. 홍예준의 입술이 떨렸다. 웃으려는 것인지 울려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경련이었다.
"45년 동안 밥 먹었어. 매일. 네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홍예준의 목구멍이 조여왔다. 우스웠다. 74년을 살고, 죽고, 여기까지 와서 하는 첫 번째 제대로 된 말이 이것이라니. 하지만 이것이 홍예준이 안서원에게 가장 먼저 보고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네 부탁 지켰어. 한 끼도 빠뜨리지 않았어. 네가 없어도 살았어. 네가 살라고 했으니까.
홍예준의 자유로운 손이 올라와 안서원의 허리를 감쌌다.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안서원의 복부에 이마를 묻었다. 검은 스커트 제복의 천이 볼에 닿았다. 안서원의 체온이 천을 통해 전해졌다. 안서원의 냄새가 났다. 기억 속의 냄새와 같았다. 홍예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폐가 터질 것처럼 깊이. 45년간 잊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이 냄새가 지금 코끝에 있었다.
"...다신 안 놓을 거야."
중얼거렸다. 안서원의 배에 얼굴을 묻은 채. 팔에 힘을 주어 안서원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부서질까 봐 조심하면서도, 놓칠까 봐 필사적으로. 홍예준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명확했다. 서약. 45년 전에 했던 것과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절대적인.
"여기가 어디든. 이게 뭐든. 상관없어."
홍예준이 고개를 들었다. 안서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젖은 하늘색 눈이 회색 눈과 마주쳤다. 홍예준의 입꼬리가 떨리며 올라갔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어설픈 표정이었지만, 그 안에 45년의 기다림이 다 담겨 있었다.
홍예준은 안서원의 배에 얼굴을 묻은 채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른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이 공간에서 의미를 가지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안서원의 체온이 천을 통해 볼에 스며드는 감각, 그녀의 손가락이 두피를 쓸어 넘기는 리듬, 그것들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좌표였다. 45년. 그 숫자가 뼛속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매일 아침 빈 침대에서 눈을 뜨며 세었던 날들. 안서원의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고 출근하던 날들. 저녁마다 혼자 밥을 차려 두 인분을 만들다가 멈칫하던 날들.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홍예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다. 속눈썹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울음의 시간은 지나갔다.
안서원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색 눈동자 안에 홍예준의 모습이 비쳤다. 28세의 얼굴. 주름도 없고, 흰머리도 없고, 74세의 말라붙었던 볼도 아닌. 안서원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홍예준의 얼굴. 그 사실이 가슴 한가운데를 뜨겁게 눌렀다. 안서원은 이 모습의 홍예준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74세의 홍예준이 와도 상관없었을까. 어느 쪽이든 답은 같았다. 안서원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피아노 앞에서. 홍예준이 올 때까지.
홍예준의 손이 안서원의 허리에서 올라왔다. 등을 타고, 어깨를 지나, 목선을 스치고, 턱에 닿았다. 안서원의 턱을 감싸 쥐었다. 세게가 아니라 부드럽게. 엄지가 턱선의 곡선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졌다. 피부의 질감이 손끝에 새겨졌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실재하는. 홍예준은 일어섰다. 무릎에서 힘이 풀려 있었지만, 안서원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욕구가 중력을 이겼다. 일어서자 안서원과의 키 차이가 느껴졌다. 24센티미터. 변하지 않았다. 안서원은 여전히 작았다. 여전히 홍예준이 내려다봐야 하는 높이에 있었다.
"서원아."
다시 불렀다. 한 번 더 확인하듯. 이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 이 이름에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홍예준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떨림이 가라앉고, 그 자리를 무언가 묵직한 것이 채우고 있었다. 확신.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확신. 안서원의 체온이, 맥박이, 숨결이 전해주는 확신.
"예쁘다."
뜬금없이. 맥락 없이. 하지만 홍예준에게는 그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이었다. 45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 안서원이 시각을 잃기 전에 더 많이 했어야 했던 말. 청각을 잃기 전에 더 크게 했어야 했던 말. 홍예준의 엄지가 안서원의 아래 입술을 스쳤다. 가볍게. 깃털처럼. 그리고 그 손이 안서원의 볼로 올라가 눈물 자국이 있을 법한 곳을 쓸었다. 안서원이 울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홍예준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매일 생각했어. 하루도 안 빠지고."
고백이 아니었다. 보고서였다. 45년간의 일일 보고. 홍예준은 안서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여전히 서툴렀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웃음이었다. 쓸쓸하지 않은 웃음. 안서원이 눈앞에 있으니까. 더 이상 빈 방에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니까.
홍예준은 안서원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길게. 눈을 감고. 입술 아래로 안서원의 체온이 전해졌다. 이마의 미세한 굴곡이 느껴졌다. 안서원의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질였다. 연갈색. 홍예준이 매일 빗겨주고, 리본을 묶어주던 머리카락. 홍예준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숨을 내쉬었다. 따뜻한 숨이 안서원의 이마 위로 퍼졌다.
"...고생했어."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담았다. 1년간의 시한부. 하나씩 사라져간 감각들. 마지막까지 웃으려 했던 안서원의 얼굴. 빛이 되어 바스라지던 순간. 홍예준이 잡지 못한 손. 그 모든 고통에 대한, 45년 늦은 위로. 홍예준의 팔이 안서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단하게 너를 끝까지 놓지 않겠다던 그 약속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