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은 유난히 평온했다. 두 사람은 평범한 연인들처럼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홍예준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안서원의 머리를 말려주고,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그녀가 내민 단말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 속에는 ‘아크숲’이라는 익숙한 로고와 함께, 꽤나 자극적인 제목의 게시글이 떠 있었다. ‘얘들아, 내 파트너 래퍼 될 거라고 쇼미 나가야 된다고 퇴사함 시발’. 999개가 넘는 댓글이 달린, 명백한 오늘의 핫이슈였다. 그는 피식,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불쌍한 가이드의 절규인지 안 봐도 뻔했다. 센티넬이라는 종족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아서, 이런 황당한 사건이 터지는 게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안서원은 그저 재미있는 글을 공유하고 싶었을 뿐인 듯,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웃고 있었다. 홍예준은 단말기를 든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부드러운 살결. 이 작은 손이 만들어내는 파괴적인 힘과, 그 힘을 다루기 위해 버텨온 시간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그는 단말기 화면에서 눈을 떼고, 대신 안서원의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샴푸와 그녀의 체향이 섞인, 이제는 익숙해진 향기. 그는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우리 파트너는 피아니스트라 다행이네.’ 그런 시시한 생각을 하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안서원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홍예준은 자신이 펜트하우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의 적막하고 서늘한 공기가 아니었다. 공간은 온통 번쩍이는 조명과 귀를 찢을 듯한 비트로 가득 차 있었고, 공기 중에는 낯선 스모크 머신 연기와 값싼 향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 안서원이 앉아 있었다. 문제는, 그가 알던 안서원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온몸을 명품 로고가 박힌 오버사이즈 후드티와 조거 팬츠로 감싸고, 목에는 손가락 두께만 한 금목걸이를 여러 겹 주렁주렁 걸고 있었다. 심지어 손가락마다 끼워진 번쩍이는 반지들은, 홍예준이 선물한 다이아 반지를 초라하게 만들 정도였다. 평소의 차분한 회색 눈동자는 어디 가고, 알 수 없는 반항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삐딱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서원. 지금 그 꼴은 뭐야."
홍예준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꿈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그저 눈앞의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극도의 불쾌감만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의 통제와 취향으로 완벽하게 빚어놓은 보석 같던 여자가, 하루아침에 동네 양아치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 목에 걸린 저 저속한 쇳덩어리들을 전부 끊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렀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답했다. 목소리마저 평소의 맑은 톤이 아니라, 어딘가껄렁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
"어? 오빠, 잠깐. 방금 그 말. ‘그 꼴은 뭐야’라… 라임 괜찮은데? 잠깐만."
그러더니 그녀는 허공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소환했다. 설마 하는 사이,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빠르게 받아 적기 시작했다. 홍예준의 시선이 수첩에 적히는 글씨를 따라갔다.
[가사 메모] ♬ 네 눈엔 이게 그저 ‘꼴’? 이건 내 영혼의 ‘Goal’ ♬ 네가 보는 건 껍데기, 내 속은 뜨거운 ‘Soul’ ♬ 넌 몰라, 이 쇠사슬의 무게, 이게 내 ‘Role’ ♬
홍예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저게 대체 무슨… 궤변이지? 영혼의 목표? 쇠사슬의 무게?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치솟는 두통을 참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가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장난 그만해. 당장 가서 갈아입고 와. 그 목에 걸린 것들도 전부 빼."
"와, 오빠. ‘갈아입고 와’, ‘전부 빼’. 이거 완전 펀치라인인데? 잠깐, 이것도 메모 좀."
안서원은 다시 수첩에 코를 박고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예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가사 메모] ♬ 전부 빼, 날 통제하려는 네 Game ♬ But I don’t play, 이건 나의 Fame ♬ 똑같은 옷, 똑같은 Frame, 너는 Lame ♬ 이제 외쳐, 내 새로운 Name! ♬
홍예준은 이제 거의 체념한 상태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이름? 제발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메모를 마친 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목에 걸린 금목걸이를 ‘스와그’ 넘치는 동작으로 한번 쓸어 올렸다. 그리고 선언하듯 말했다.
"오빠. 이제 나 안서원이라고 부르지 마. 내 새 이름은… MC 이브. Eve a.k.a The Gardener of Rhyme. 어때, 죽이지?"
죽고 싶었다. 홍예준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라임의 정원사라니. 차라리 종말 개화를 자신에게 쏘라고 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악몽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MC 이브, 아니 안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어슬렁거리며, 마치 무대 위 래퍼처럼 손동작을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끔찍해서, 홍예준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그리고 오빠. 나 할 말 있어. 나… ARCH 퇴사하려고. 쇼미더머니 나가야 돼. 내 재능을 이런 작은 섬에 썩힐 순 없지. My talent is too big for this island, ya know?"
그 순간, 홍예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퇴사? 쇼미더머니?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늘한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그의 가이딩 파장이 불안정하게 요동치며 거실의 공기를 차갑게 식혔다. 하지만 MC 이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 차가운 공기를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Whoa, 분위기 싸해지는 거 봐. 오빠, 그 표정. ‘차가운 분노’. 이거다! 가사 또 나왔네. 잠깐!"
[가사 메모] ♬ 차가운 분노, 네 눈에 서린 Frost ♬ 이미 멀리 왔어, 건넜지 Rubicon cross ♬ 넌 나의 과거, 이제는 Loss ♬ 난 무대 위로, I’m the new boss! ♬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홍예준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수첩과 펜을 빼앗아 구겨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양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어깨는 여전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늘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쳤어? 안서원. 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 센티넬이 ARCH를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폭주하면, 내가 없으면…!"
"A-yo, 걱정 마. 오빠. 폭주? 그건 내 새로운 무기. Rampage on the stage! 무대 위에서 폭주하는 거지. 관객들은 더 열광할걸? 그리고 가이딩? 이 금목걸이가 내 새 가이드야. It’s my stabilizer, my new guide!"
그녀는 자랑스럽게 목의 쇠사슬을 흔들어 보였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홍예준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모든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악몽인지, 이제야 희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마지막 발악처럼 그녀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서원아. 그딴 소리 하지 마. 네가 없으면 나도…"
"오빠, 잠깐. 마지막으로… 그거. ‘네가 없으면 나도…’ 와… 찢었다. 이건 훅이다."
그녀는 감동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홍예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애썼다. 마지막 메모를 해야 한다는 듯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그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눈앞이 하얘졌다.
"...!!"
홍예준은 숨을 헐떡이며 소파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고, 입고 있던 티셔츠가 축축했다. 그는 거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펜트하우스의 고요한 거실. 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스탠드의 은은한 조명만이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 소파에 기대 잠든 안서원이 보였다. 평소의 단정한 모습 그대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금목걸이도, 요란한 옷도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따뜻한 온기. 살아있다. 그의 여자. 그의 곁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지독하게 생생한 악몽이었다. 그는 곤히 잠든 안서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오직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맹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빌어먹을 쇼미더머니에는 절대 못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