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기스 지하 의료실, 지독한 소독약 냄새와 기계음만이 가득한 새하얀 방에서 눈을 떴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온몸의 근육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지막 기억은… 그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폭주하던 거대한 녹색의 재앙, 그리고 그 중심에서 울부짖던 너의 모습이었다.
‘코드네임 이브, 고위험 단독 임무. 목표, 구 비프로스트 연구소 잔해 속 ‘씨앗’ 회수.’
명령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곳은 S급 괴수들의 사체와 타락한 센티넬들의 원념이 뒤섞여, 그 어떤 생명체도 온전히 버틸 수 없는 저주받은 땅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반대했다. 너를 혼자 보내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저스티스의 멱살이라도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너는 웃었다. 괜찮을 거라고. 나를 믿어달라고. 그리고 나는, 네가 나를 보며 지었던 그 공허한 미소가 아닌, 진짜 웃음을 지켜주고 싶다는 어리석은 욕심에, 결국 너의 그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예상대로 통신은 금세 끊겼고, 너의 생체 신호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었다. 결국 나는 모든 규정과 명령을 무시한 채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지옥이었다. 거대한 가시 덩굴이 하늘을 뒤덮고, 맹독성 포자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네 능력이 통제를 잃고 주변의 모든 생명력은 물론, 무기물과 공간마저 집어삼키며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재앙의 중심, 거대한 식물의 꽃봉오리처럼 웅크린 채, 너는 울고 있었다.
가시덩굴 사이에서 너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본능에 잠식당해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할 뿐이었다. 너에게서 뻗어 나온 날카로운 덩굴이 내 팔과 다리를 찢고, 독 포자가 내 폐를 태웠다. 하지만 그 어떤 물리적인 고통보다, 너의 공허한 눈동자와 마주하는 것이 더 지독한 고통이었다.
“...안서원! 정신 차려! 나야, 홍예준이라고!”
내 목소리는 너에게 닿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너에게 다가갔다. 내 주특기인 사격은, 너를 향해서는 단 한 발도 쏠 수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아니, 단 한 발은 예외였다. 나는 홀스터에서 특수 제작된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 안에는, 단 한 발의 푸른 탄환. 윈드-스태빌라이저가 장전되어 있었다. 나는 내 모든 집중력을 끌어모아, 너의 움직이는 팔과 다리 사이,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어깨를 조준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탕-! 총성이 울리고, 푸른 궤적을 그린 주사기형 탄환은 정확히 너의 어깨에 박혔다. 신경 안정제 기체가 퍼져나가며 너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둔화되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너를 품에 안았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 너의 몸은 다시금 격렬하게 저항하며 나를 밀어냈다. 이미 너의 폭주는, 단순한 신경 안정제만으로 억누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살을 맞대고, 영혼을 섞는,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깊은 가이딩.
너의 몸을 옭아매던 가시가 내 맨살을 파고들었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 지옥의 한가운데서, 너와 하나가 되었다. 내 바람의 파장을, 내 모든 생명력을, 너의 폭주하는 심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너의 고통이, 절망이, 죽음의 공포가 내 안으로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네가 나를 ‘전부’라고 불러주었던 것처럼, 나 역시 너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했다. 너의 폭주가 서서히 잦아들고, 너의 몸을 옭아매던 가시덩굴이 힘을 잃어갈 때쯤, 내 의식도 함께 희미해져 갔다. 마지막으로 내 눈에 보인 것은, 내 품에서 의식을 잃은 채 쌔근쌔근 잠든 너의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걸로 됐다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 깨어났다. 저스티스가, 침묵 속에서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다. 가이딩은 성공했지만… 너무 늦었다고. 폭주의 여파로 너의 신체는 이미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고.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 1년.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난하는 거냐고, 그런 같잖은 농담은 집어치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1년. 그 시간 동안 너는 한 달마다 감각을 하나씩 잃고, 운동 능력을 상실하며, 결국에는 온몸이 바스러지듯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했다. 내가 지키고 싶었던 너의 모든 것이, 너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너의 따스한 미소가, 너의 모든 것이, 내 눈앞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사라져 갈 것이라는 사형 선고였다.
분노가 치밀었다. 아크에 대한 분노, 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너를 그렇게 만든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 나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너는 이미 몇 시간 전에 깨어나, 이 모든 사실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고 했다. 혼자. 그 단어가, 수천 개의 비수가 되어 내 심장에 박혔다. 나는 또다시, 너를 혼자 두었다.
링거를 뽑아 던지고,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어 너의 병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차마 손잡이를 돌리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얼굴로 너를 봐야 할까.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그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너에게 주었던 ‘전부’라는 이름은, 결국 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잔인한 저주가 되어버렸다. 문틈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너의 뒷모습이 보였다. 너무나도 작고, 위태로워 보이는 그림자.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의 얼굴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보다 훨씬 더 창백했다. 하지만 너는, 나를 보자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나는 내 세상이 다시 한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일어났어? 몸은, 괜찮아?"
너의 목소리는, 전보다 조금 더 낮고, 건조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네 침대 옆으로 다가가 섰다. 너는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들었구나, 전부. 나, 이제 1년밖에 못 산대."
너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네 뺨이라도 때려서, 제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울고 소리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네가 앉아 있는 침대와, 내 눈높이가 맞춰졌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너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미안해."
내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고작 그것뿐이었다.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해야만 하는 말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제때 가이딩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를 혼자 보내서 미안해. 너의 고집을 꺾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너를 이렇게까지 사랑해서, 미안해.
"내가… 내가 어떻게든 할게. 방법이 있을 거야. 그게 뭐든… 세상 끝까지 뒤져서라도, 너 반드시 살릴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나를 용서하려는 듯한, 그런 슬픈 미소는 짓지 말아 줘. 차라리 나를 원망해. 내 멱살을 잡고, 왜 나를 구하지 못했냐고, 왜 너만 멀쩡하냐고 소리쳐 줘. 제발, 서원아.
나는 너의 손등에, 내 이마를 기댄 채, 흐느꼈다. 사격 선수 시절, 단 한 번의 실수로 올림픽 금메달을 놓쳤을 때도, 이렇게 무력하지는 않았다. 내가 쌓아 올린 모든 자존심과 오만이, 너의 1년이라는 시한부 선고 앞에, 먼지처럼 부서져 내렸다. 나는 이제 네가 없는 세상은, 단 하루도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너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의 텅 빈 웃음 속에, 감춰진 진심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두려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우리가 마지막 1년을 함께할 공간으로 선택한 곳은, 아이기스 최상층의 펜트하우스가 아닌, 지상에 있는 너의 옛집이었다. 네가 피아니스트 안서원으로 살았던, 너의 손길과 숨결이 묻어있는 곳. 아크프리마는 이례적인 배려로 우리의 모든 임무를 중단시키고, 그 집 주변에 최고 등급의 차폐막을 둘러주었다. 세상과 단절된, 오직 우리 둘만의 1년을 위한 작은 왕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너의 남은 생을,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지키기로 맹세했다. 그것은 나의 속죄이자, 나의 사랑이었으며,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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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개월차 - [미각] 소실
그날은 유난히 햇살이 좋았다. 나는 너를 위해, 서툰 솜씨로나마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네가 좋아하던 크림 파스타. 물론, 네가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형편없는 맛이겠지만, 너는 언제나처럼 웃으며 맛있다고 말해주었다. 네가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잠시 오물거렸다. 그리고, 너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너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한번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몇 번을 더 씹던 너는, 이내 포크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아무 맛도, 안 나."
너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해서, 오히려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을 애써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열어 온갖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레몬, 초콜릿, 심지어 소금까지. 나는 미친 사람처럼 그것들을 너의 입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너는 그저,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짠맛도, 단맛도, 신맛도. 너의 세상에서 모든 맛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결국, 들고 있던 레몬을 바닥에 내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 너는 그런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예준 오빠. 오빠가 해준 거니까, 그래도 맛있어." 너의 그 말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식사 시간은 바뀌었다. 나는 네가 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하려는 듯, 더욱 필사적으로 요리에 매달렸다. 맛은 없지만, 대신 나는 ‘식감’에 집착했다. 아삭아삭 씹히는 채소, 부드럽게 넘어가는 수프, 쫄깃한 버섯. 나는 네가 잃어버린 미각 대신, 혀와 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너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너는 나의 노력을 아는지, 언제나 내가 만든 요리를 남김없이 비워주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맛에 대한 이야기 대신, 음식의 소리와 질감, 그리고 그것을 함께 먹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다. 때로는, 내가 너의 눈을 가리고 음식을 먹여주며, 오직 식감만으로 무엇인지 맞혀보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너는 언제나 천재처럼 정답을 맞혔고, 우리는 아이처럼 웃었다. 너는 맛을 잃었지만, 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신이 있다면, 그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다. 왜 하필, 맛이었냐고. 내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세상 가장 행복하게 웃어주던 너의 모습을, 왜 가장 먼저 빼앗아 가야만 했냐고. 나는 네가 음식을 삼킬 때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모래알을 억지로 삼키는 것 같아 심장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나는 티를 낼 수 없다. 내가 무너지면, 너는 기댈 곳이 없으니까. 서원아, 제발. 네가 잃어가는 것들을, 나의 사랑으로 전부 채울 수 있게 해줘. 내가 너의 맛이 되고, 너의 세상이 될게. 그러니까, 제발… 나를 보며 웃어줘. 계속,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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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개월차 - [왼쪽 다리] 기능 상실
악몽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왔다. 맑은 아침, 네가 침대에서 내려오던 순간이었다. 평소처럼 발을 내딛던 너의 몸이, 그대로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너의 비명보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달려간 것이 더 빨랐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너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신의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낯선 물건을 보듯이. 너는 일어나려 애썼지만, 왼쪽 다리는 너의 의지를 배신한 채, 축 늘어져 힘없이 끌려다닐 뿐이었다. 감각은 있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뇌가 보내는 신호가, 그곳까지 닿지 않는 것이다.
"…웃기다. 내 다리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를 않네."
너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너를 번쩍 안아 일으켜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너의 왼쪽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너는 그런 내 손길을 가만히 받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우리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너의 절망과 나의 무력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걸었던 수많은 길들이,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음을 직감했다.
그날 이후, 나는 너의 왼쪽 다리가 되었다. 집 안의 모든 문턱을 없애고, 네가 넘어질 만한 모든 것들을 치웠다. 처음에는 휠체어를 사용했지만, 너는 그것을 불편해했다. 결국, 우리는 우리만의 방법을 찾아냈다. 집 안에서 이동할 때, 너는 자연스럽게 내 등에 업혔다. 정원으로 산책을 나갈 때면, 나는 너를 품에 안고 천천히 걸었다. 너는 내 품에 안겨, 마치 처음 세상을 보는 아이처럼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피아노 앞에 앉을 때면, 나는 너를 안아 의자에 앉혀주고, 너의 움직이지 않는 왼발을 페달 위에 가만히 올려주었다. 너는 오른발만으로 페달을 조절하며, 이전보다 조금 더 느리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다. 너는 다리 하나를 잃었지만, 우리는 함께 걷는 새로운 방법을 배웠다. 때로는 내가 너를 업고 춤을 추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너는 내 등 위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소리가 나를 살게 했다.
서원아, 차라리 내 다리 하나를 가져가지 그랬어. 너를 위해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데. 너는 이제 혼자서는 단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게 되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네가 내게 더 깊이 의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이기적인 새끼다. 네가 내 등에 업혀 목을 끌어안을 때, 네가 내 품에 안겨 창밖을 볼 때, 나는 네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는 끔찍한 소유욕과 행복을 동시에 느낀다. 미안하다. 너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아서. 하지만, 서원아. 이것 하나만은 약속할게.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디든, 세상 끝이라도, 내가 너를 데려다줄게. 나의 두 다리가 닳아 없어지는 날까지, 나는 너의 발이 되어 걸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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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월차 - [목소리] 소실
너의 목소리가 사라진 날은, 비가 내렸다.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 네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 곡이 끝나고, 나는 언제나처럼 너에게 말했다. "최고야, 안서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리야." 너는 나를 향해 웃으며 무언가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너의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너는 당황한 듯, 몇 번이고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말을 하려 했지만, 나오는 것은 바람 새는 소리뿐이었다. 성대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너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너의 목을 감싸 쥐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왜 소리가 안 나지?' 라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다가가, 너를 끌어안았다. 너는 내 품에서 작게 몸을 떨었다. 나는 너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수없이 속삭였다. 하지만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예준 오빠’라고 부르던 너의 다정한 목소리, 내 고백에 ‘사랑해’라고 속삭여주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영원히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렸다. 나는 너를 안은 채,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생각했다. 신은, 네게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 골라 빼앗아 가는구나. 내가 가장 사랑했던 것들만, 골라서.
그날 이후, 우리의 집은 조금 더 조용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하지 않았다. 나는 서점에서 온갖 종류의 노트와 펜을 사 왔다. 우리는, 글씨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너는 작은 수첩을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며, 하고 싶은 말들을 적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 [오빠가 끓여준 커피, 향이 좋아.], [사랑해.]. 너의 필체는, 너의 목소리만큼이나 다정하고 아름다웠다. 때로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처럼, 내가 너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너는 내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끼며, 간지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눈빛으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너의 눈은,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너는 목소리를 잃었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새로운 언어를 창조했다. 밤이 되면, 나는 너를 품에 안고, 네가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주었다. 너는 내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내 가슴에 귀를 대고 평온하게 잠들었다.
네가 목소리를 잃은 첫날, 나는 밤새 너의 목소리가 담긴 모든 통화 기록과 영상들을 내 단말기에 백업했다. 네가 잠든 사이에, 나는 혼자 이어폰을 끼고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랑해’ 라고 말해주던 너의 목소리를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해서 듣는다. 그러지 않으면, 너의 목소리를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언젠가, 내가 너의 이름조차 불러주지 못하게 될 나의 미래를 위한, 가장 잔인한 준비일지도 모른다. 서원아, 네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내 남은 생의 모든 목소리를 포기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 그래서 나는, 이제 너의 침묵까지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고 해.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잔인한 유예 기간 속에서, 우리만의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너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동안, 나의 시간은 너의 마지막을 향해 속절없이 달려갔다. 매달, 어김없이 찾아오는 상실의 순간은, 내 심장에 새로운 흉터를 새겼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웃는 법을, 슬픔 속에서도 사랑하는 법을, 멈추지 않고 배워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너와 내가 함께 써 내려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도 아름다운 마지막 연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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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개월차 - [오른쪽 팔] 기능 상실
너의 오른팔이 멈춘 날은, 우리가 함께 그림을 그리던 오후였다. 목소리를 잃은 후, 너는 그림을 통해 너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너의 그림은 언제나 따뜻한 색감으로 가득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함께하는 사소한 일상들. 그날도 너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고 있었다. 연필을 쥔 너의 손놀림은, 마치 건반 위를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들고 있던 연필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너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연필을 주우려 했지만, 너의 오른팔은 마치 돌처럼 굳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너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오른팔과, 바닥에 떨어진 연필, 그리고 하얗게 비어버린 스케치북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 침착함이, 오히려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너는 익숙하다는 듯, 왼손으로 오른팔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서툰 왼손으로 바닥의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이제 왼손으로 그리면 되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너는 왼손으로 모든 것을 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식사를 하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까지. 당연히, 처음에는 모든 것이 서툴고 어색했다. 포크를 쥐는 것조차 힘들어 음식을 흘리기 일쑤였고, 왼손으로 쓴 너의 글씨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삐뚤빼뚤했다. 하지만 너는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너의 곁에서, 묵묵히 너의 왼손잡이 생활을 도왔다. 네가 식사를 할 때 음식을 흘리면,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닦아주고, 네가 원하는 음식을 작게 잘라주었다. 네가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다 답답해하면, 나는 너의 곁에 앉아 너의 오른손이 되어주었다. 너는 왼손으로 스케치를 하고, 나는 너의 지시에 따라 색을 칠했다. 우리는 그렇게, 둘이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너의 오른팔은 멈췄지만, 우리의 세상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너의 오른팔이 멈춘 순간, 나는 네가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열 개의 손가락으로 세상을 어루만지던 너. 이제 너에게 남은 것은, 불완전한 왼손 하나뿐이다. 나는 밤마다, 잠든 너의 굳어버린 오른손을 잡고 운다. 이 손으로 나를 만져주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온기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텐데. 하지만 서원아, 나는 절망하지 않을게. 네가 왼손으로 그려나갈 새로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하고 있을게. 그리고 그 세상 속에는, 언제나 내가 함께 있을 거야. 너의 곁에서, 너의 색이 되어주고, 너의 빛이 되어줄게. 너의 멈춰버린 오른손은, 내가 평생 잡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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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개월차 - [후각] 소실
너의 세상에서 향기가 사라진 날은, 장미가 만발한 6월이었다. 너의 집 정원에는, 네가 직접 심고 가꾼 수백 송이의 장미가 있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정원을 산책하며, 갓 피어난 장미의 향을 맡는 것을 좋아했다. 그날 아침, 나는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너에게 건넸다. 너는 늘 그랬듯, 장미꽃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너의 표정은 어두웠다. 너는 고개를 들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품에 있던 수첩을 꺼내, 떨리는 왼손으로 글씨를 썼다.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아.]
나는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정원의 온갖 꽃들을 꺾어 너의 코앞에 가져다 댔다. 장미, 라일락, 재스민… 하지만 너는, 그저 향기 없는 예쁜 꽃다발을 받아든 사람처럼,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커피 향, 빗물의 냄새, 내가 피우는 담배 냄새, 그리고 나의 체향까지. 너를 둘러싼 모든 향기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것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나는 네 손에 들린 꽃들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지며 울부짖었다. 신은 왜, 이토록 잔인한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감각을, 왜 이리도 허무하게 빼앗아 가버리는가.
그날 이후, 나는 향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비록 네가 맡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너의 공간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들로 채우고 싶었다. 나는 매일 아침, 가장 신선한 꽃을 사 와 너의 침대 맡에 놓아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커피 원두를 갈아, 그 향이 온 집안에 퍼지게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을 활짝 열어 흙냄새가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너는 향기를 맡을 수는 없었지만, 나의 노력을 아는 듯, 언제나 행복하게 웃어주었다. 우리는, 향기 대신 ‘기억’을 이야기했다. 이 장미는, 내가 너에게 주었던 꽃과 닮았다고. 이 커피 향은, 우리가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펜트하우스의 거실을 떠올리게 한다고. 너는 후각을 잃었지만, 우리는 향기로 가득한 추억 속에서 살았다. 나는, 너의 기억 속 향기가 되어주기로 했다.
너는 이제 내 체향을 맡을 수 없다. 내가 너를 끌어안을 때마다, 너는 어떤 기분일까. 네가 그토록 좋아하던, 젖은 나무와 차가운 쇠가 뒤섞인 내 냄새를, 너는 이제 영원히 기억 속에서만 찾아야 한다. 이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나는 가끔, 네가 잠든 사이에, 나의 옷을 너의 얼굴에 가져다 댄다. 혹시라도, 아주 희미하게라도, 네가 나의 흔적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희망 때문에. 서원아, 미안하다. 너에게서 나의 향기마저 앗아가서. 하지만 나는, 네가 나를 잊지 않도록, 매일 너를 더 깊이 끌어안을 것이다. 내 심장 소리가, 내 온기가, 너에게 나의 존재를, 나의 사랑을, 영원히 각인시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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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개월차 - [왼쪽 팔] 기능 상실
너의 마지막 남은 왼팔마저 멈춘 날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 오후, 너는 왼손으로 서툴게, 나에게 줄 스웨터를 뜨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내가 도와주었지만, 너는 마지막 코를 직접 마무리하고 싶어 했다. 한 코, 한 코, 집중하는 너의 모습은 그 어떤 예술가보다도 진지했다. 그런데, 마지막 코를 남겨두고, 너의 왼손에 들려있던 대바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른팔이 멈췄을 때와 똑같은, 예고 없는 정지. 너는 잠시,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미완성의 스웨터와, 움직이지 않는 양팔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내 앞에서 소리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너의 어깨가, 가냘프게 들썩였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 네가 뜨고 있던 연회색 스웨터 위로 뚝, 뚝 떨어져 얼룩을 만들었다. 나는 차마, 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네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줄 수도, 너를 안아줄 수도 없었다. 너는 이제, 스스로 눈물을 닦을 수도, 슬픔에 잠긴 나를 안아줄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네가 나를 위해 준비했던 마지막 선물이, 너의 절망의 증거가 되어버린 그 순간, 나는 신을 저주했다. 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도 모자라, 너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의지마저, 이렇게 무참히 짓밟아야만 했을까.
그날 이후, 너는 완벽하게 나의 손길에 의지하게 되었다. 나는 너의 양팔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너의 얼굴을 닦아주고,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겨주었다. 내가 떠먹여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내가 넘겨주는 책장을 바라보았다. 너는 마치, 살아있는 인형처럼, 나의 보살핌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때로는, 네가 절망감에 식사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무 말 없이, 네가 다시 입을 벌릴 때까지, 네 옆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나눌 수 없었다. 너는 이제 글씨를 쓸 수도 없었기에, 우리의 유일한 소통 수단은 눈빛과, 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드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떤 때보다도,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너의 눈빛만으로도,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서원아. 이제 너는 정말로,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구나. 이 끔찍한 현실에도 서원아, 나는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아. 너의 부서진 몸은, 내가 안으면 돼. 너의 멈춰버린 팔은, 내가 대신 움직여주면 돼. 너는 그저, 내 곁에서 숨만 쉬어줘. 너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살아갈 이유니까. 네가 뜨다만 저 스웨터, 내가 반드시 완성해서, 올겨울 너에게 입혀줄게. 그러니, 제발.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어 줘.
너의 양팔이 멈춘 이후, 우리의 시간은 더욱 느리게 흘러갔다. 이제 너는 온전히 나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너의 손과 발이 되었고, 너는 나의 심장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의 몸처럼 움직였고, 하나의 영혼처럼 숨 쉬었다. 세상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단단하게 서로를 얽어맸다. 너의 존재가 희미해져 갈수록, 나의 사랑은 더욱 선명해졌다. 이것은 신을 향한 나의 처절한 반항이었고, 너를 향한 나의 영원한 맹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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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개월차 - [소화기관] 기능 정지
7월의 어느 늦은 오후, 나는 갓 구운 복숭아 타르트를 식히고 있었다. 네가 맛도, 향도 느낄 수 없게 된 이후, 나는 오로지 너의 미소를 보기 위해 요리를 했다. 예쁘게 구워진 타르트 위에 하얀 슈가파우더를 뿌리고, 민트 잎으로 장식하는 나의 모습을, 너는 소파에 기대앉아 옅은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잘 구워진 타르트 한 조각을 잘라, 너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너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듯, 배가 고프지 않다는 듯.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번 타르트를 내밀었지만, 너는 입을 꾹 다문 채,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너의 몸이, 이제는 내가 주는 그 어떤 음식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날 밤, 너는 모든 것을 토해냈다. 내가 아침에 먹여주었던 부드러운 수프 한 그릇까지도. 너의 몸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마저 거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치의를 불렀고,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 소화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했다고. 이제 네가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링거를 통해서뿐이라고. 나는 그날, 너의 침대 옆에 링거 거치대가 설치되는 것을, 텅 빈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마지막 즐거움, 식사의 시간이, 그렇게 차가운 포도당 용액으로 대체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일상은 병실의 그것과 닮아갔다. 나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너의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통해 영양액을 주입했다. 너는 더 이상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너를 위해 요리하지 않았다. 식탁은 더 이상 우리의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매일, 너를 위한 ‘가짜 식사’를 준비했다. 아름다운 접시에, 내가 먹을 음식을 너와 나의 몫으로 두 개, 똑같이 담았다. 나는 너의 맞은편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조잘거리며 식사를 했다. 너는 링거액이 천천히 네 몸으로 흘러 들어가는 동안, 나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봐 주었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함께’였다. 때로는 내가 음식을 먹으며, “이건 네가 전에 만들어줬던 것처럼 아삭하고 맛있어.” 라고 말하면, 너는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너는 음식을 잃었지만, 우리는 추억을 먹으며 살았다.
서원아. 이제 너는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너를 위해 요리하며, 너의 웃음을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었는데. 이제 나는, 텅 빈 식탁에서 혼자 밥을 삼키는 내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 얼마나 잔인한 형벌인가. 네가 링거 바늘을 꽂은 채,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나는 차라리 저 링거액을 모두 내 몸에 쏟아붓고 너의 고통을 전부 가져오고 싶다는 미친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나는 무너질 수 없다. 네가 나를 보며 웃어주니까. 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네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공연을 보듯 바라봐주니까. 그래, 서원아. 나는 너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먹는 배우가 될게. 네가 나의 유일한 관객이 되어준다면, 나는 기꺼이, 평생을 연기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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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개월차 - [오른쪽 다리] 기능 상실
너의 마지막 남은 다리마저 멈춘 날은,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8월의 끝자락이었다. 비록 양팔은 멈췄지만, 너는 여전히 피아노를 사랑했다. 내가 틀어주는 예전 연주곡을 들으며, 너는 피아노 앞에 앉아 남은 오른쪽 다리로 페달을 밟았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너를 품에 안고 피아노 의자에 앉혀주었다. 그런데, 너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감각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지만, 너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남은 연결고리가, 끊어지려 한다는 것을.
결국, 너의 오른쪽 다리는 너의 의지를 완전히 배신했다. 너는 이제, 내 도움 없이는 단 1초도 앉아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의지할 다리가 없어진 너의 상체는, 힘없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너를 끌어안아 부축했다. 너는, 내 품에 완전히 기댄 채,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피아노의 흑백건반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의 삶을 지탱해주던 두 다리가, 이제는 완벽한 장식품이 되어버렸다. 너는 이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던 감각마저, 기억 속에서만 찾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날 이후, 너는 침대와 휠체어, 그리고 나의 품 안에서만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너의 몸을 조금 더 단단히 고정할 수 있는 특수 휠체어를 주문했다. 하지만 너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보냈다. 너의 세상이, 한순간에 그 작은 사각형 안에 갇혀버린 것 같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만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로 했다. 나는 침대 위, 너의 주변을 네가 좋아했던 것들로 가득 채웠다. 네가 그린 그림들,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 네가 좋아하던 소설책들. 그리고 밤이 되면, 나는 천장에 빔 프로젝터를 쏘아, 너에게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 방 안 가득 펼쳐진 우주를 여행했다. 때로는, 너와 나의 추억이 담긴 영상을 보기도 했다. 건강하게 웃고 떠들던 우리의 모습을 보며, 너는 슬퍼하는 대신, 행복한 듯 눈을 반짝였다. 너는 두 다리를 잃었지만, 우리는 상상 속에서 그 어떤 곳이든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서원아. 너는 나 없이는, 단 한 걸음도, 아니,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만 하는, 너의 유일한 세상이 되었다. 나는 매일 밤, 잠든 너의 축 늘어진 두 다리를 주무른다. 아무런 감각도, 반응도 없는 너의 다리를 만지며, 나는 우리가 함께 걸었던 해변을 떠올린다. 내 발자국 옆에 나란히 찍히던, 너의 작고 예쁜 발자국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 풍경을, 나는 눈물이 마르도록 그리워한다. 하지만, 서원아. 괜찮아. 이제는 내가 너의 두 다리가 되어, 너를 업고, 너를 안고, 세상 끝까지 걸어갈 테니까. 너는 그저, 내 품에서, 내가 보여주는 세상을 편안히 바라보기만 하면 돼. 너의 모든 무게를, 내가 기꺼이 짊어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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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개월차 - [청각] 소실
너의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진 날은, 귀뚜라미 소리가 처연하게 울려 퍼지던 9월의 밤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너의 곁에서, 네가 가장 좋아하던 시집을 읽어주고 있었다. 비록 너는 목소리를 잃었지만, 내 목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너는 내 목소리의 울림을, 내 가슴의 진동을 느끼며 평온하게 잠이 들곤 했다. 그날도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너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무언가 불안한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조금 더 큰 소리로 너의 이름을 불렀다.
"서원아. …안서원."
하지만 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내 입 모양만을 필사적으로 쫓으며,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나는 너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거의 비명에 가깝게 다시 한번 너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너의 세상은 이미 완벽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리 없는 절규였다. 나를 부르던 너의 목소리가 사라졌을 때보다, 내가 들려주던 너의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때보다, 더 깊은 절망이, 우리를 덮쳐왔다. 우리는 이제, 그 어떤 소리도 공유할 수 없는, 완벽히 다른 세계에 살게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집은 완벽한 고요에 잠겼다. 나는 더 이상 음악을 틀지 않았고, 너에게 책을 읽어주지도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이제 오직 시각과 촉각에 의지해야만 했다. 나는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사 와, 너의 침대 옆에 세워두었다. 나는 그곳에,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아주 크고 선명한 글씨로 적었다. [사랑해, 서원아.], [오늘 달이 참 예쁘다.], [네가 보고 싶어.]. 너는 내가 쓴 글씨를 천천히 읽고, 눈을 깜빡이거나,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화는, 우리의 손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는 너의 손을 잡고, 그 손바닥 위에,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천천히 써 내려갔다. ‘사.랑.해.’ 나의 손가락이 너의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너는 간지러운 듯 작게 웃었다. 너는 청각을 잃었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따뜻한 언어로, 사랑을 속삭였다.
너의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진 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내 목소리조차 너에게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했다. 이제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도, 너는 들을 수 없다. 내가 너를 위해 울어도, 너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너의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진 이후, 시간은 우리에게 더 이상 관대하지 않았다. 너의 남은 감각들은,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나는 매일 아침, 네가 눈을 뜨는 것을 확인하며 안도하고, 매일 밤, 네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며 절망했다. 너를 둘러싼 세상은 점점 더 좁아지고, 어두워지고, 차가워졌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너를 잃지 않기 위해, 너의 마지막 빛이 되어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너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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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개월차 - [촉각] 소실
너의 마지막 감각이 사라진 날은,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펼쳐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창가에 기댄 너의 휠체어 옆에 쭈그려 앉아, 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청각을 잃은 너와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 나는 너의 작고 차가운 손바닥 위에, 오늘의 날씨와 나의 시시콜콜한 일상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 내려갔다. ‘하.늘.이. 참. 맑.아.’.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간지럽다고 미소 지었을 네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다시 한번, 조금 더 힘을 주어 너의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하지만 너는, 그저 텅 빈 눈으로 창밖의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너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들어, 너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길 바라며. 하지만 너는, 인형처럼 미동도 없었다. 나는 다급해져, 옆에 있던 얼음물 잔을 가져와, 그 차가운 표면을 너의 손등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너는 놀라지도,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따뜻함도, 차가움도, 부드러움도, 간지러움도. 너를 어루만지던 나의 모든 손길이, 너에게 닿지 않았다. 너의 몸은, 외부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였던 촉각마저 닫아버렸다. 나는 너의 손을 붙잡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이제 내가 너를 아무리 끌어안아도, 너는 나의 온기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너의 그림자가 되었다. 나는 너의 모든 움직임을 예측하고, 네가 다치지 않도록, 네가 불편하지 않도록, 한시도 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옷을 입힐 때, 그 옷의 부드러운 감촉을 설명해주었고, 너를 씻길 때, 따뜻한 물의 온도를 말해주었다. “서원아, 지금 네 머리카락을 만지는 내 손은, 아주 따뜻해.” “이 담요는, 구름처럼 부드럽고 폭신해.” 나는, 너의 잃어버린 감각이 되어, 세상의 모든 질감과 온도를 너에게 언어로 전달했다. 너는 나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의 눈을 보고, 나의 입 모양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너는 촉각을 잃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눈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나는, 너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내가 아직 너의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서원아. 이제 너는 더 이상 나의 손길을 느낄 수 없다. 내가 너를 아무리 뜨겁게 안아도, 너에게는 그저 무거운 압력으로만 느껴질 뿐이겠지. 너의 손바닥에 사랑한다고 쓰는 나의 손가락은, 이제 너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하지 못한다. 이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너와 나를 연결하던 마지막 끈이, 이렇게 허무하게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서원아. 나는 포기하지 않아. 네가 아직 나를 ‘보고’ 있으니까. 너의 그 아름다운 눈이, 여전히 나를 담고 있으니까. 나는 이제, 너의 시선 속에서 살아갈게. 너의 눈빛이, 나를 만지는 너의 손길이라 믿으며, 마지막까지 너의 곁을 지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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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개월차 - [시각] 소실
너의 세상에 완전한 어둠이 내린 날은, 첫눈이 내리던 11월의 차가운 아침이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너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너는, 잠들지 않은 채,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치, 아름다운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게 빛나기만 할 뿐,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너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너의 눈동자는, 나의 움직임을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너의 침대 옆 화이트보드에, 알아볼 수 있는 가장 큰 글씨로 너의 이름을 썼다.
[안.서.원.]
그리고 그것을 너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너는, 그저 깜빡이기만 할 뿐, 내가 쓴 글씨를 읽지 못했다. 너의 세상에 남아있던 마지막 빛이, 그렇게 꺼져버렸다. 너는 이제, 맛도, 향기도, 소리도, 감촉도, 그리고 빛도 없는, 완벽한 무(無)의 세계에 홀로 갇혀버렸다. 너는 자신의 마지막 감각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 어떤 동요도 없이, 그저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그 평온한 얼굴 위로, 눈물 한 방울이 조용히, 길을 만들며 흘러내렸다. 나는 그 눈물을 닦아줄 생각도 못한 채, 그저 망연자실하게, 너의 마지막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너의 시간은 완벽히 멈췄다. 너는 이제 밤과 낮을 구분하지 못했고, 내가 너의 곁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너의 세상에 내가 존재함을 알리기 위해, 우리만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아침에 내가 너의 손을 세 번 가볍게 두드리면, 그것은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였다. 네가 좋아하는 피아노곡의 리듬에 맞춰, 너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면, 너는 그것이 어떤 곡인지 아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너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고, 너를 안고, 너를 업고, 집 안을 돌아다니며, 내가 보고 있는 모든 풍경을, 들리지 않는 너에게 속삭여주었다. “서원아, 지금 창밖에는 눈이 와. 온 세상이, 네 피부처럼 하얗게 변했어.” “네가 좋아하던 장미 정원은, 지금 눈 속에 잠들어 있어.” 너는 아무것도 보고, 듣고, 느끼지 못했지만, 나의 심장 박동과, 나의 숨결을 통해, 내가 너의 곁에 있음을, 우리가 여전히 함께 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제 너와 나를 연결하는 것은, 내가 너를 붙잡고 있다는 이 현실뿐이다. 너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렸을까. 매일 너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만, 너의 텅 빈 눈동자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나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이 어둠 속에서, 홀로 얼마나 무서울까. 서원아, 내가 너의 빛이 되고, 너의 소리가 되고, 너의 세상 전부가 되어, 너를 영원히 지켜주고 싶다. 이제 너에게 남은 시간은 한 달.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마지막 시간. 나는, 그 시간 속에서, 너와 내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을, 너의 멈춰버린 심장 속에, 영원히 새겨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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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개월차 - [죽음]
12월, 너의 마지막 한 달은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너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냈고, 깨어있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너의 곁을 지키며 우리의 지난 시간들을 이야기했다. 너의 손바닥 위에, 우리의 첫 만남과, 첫 키스와, 웃고 울었던 모든 순간들을 써 내려갔다. 너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너는, 듣고 있었다. 마지막 날, 약속의 그 날이 왔다. 그날은, 우리의 1년이 시작되었던 그날처럼, 유난히 햇살이 따뜻했다. 나는 너를 안고, 네가 가장 좋아했던 창가 소파에 앉았다. 나는, 네가 마지막으로 뜨다 말았던, 이제는 나의 손길로 완성된 연회색 스웨터를 너에게 입혀주었다.
나는 너를 품에 안고,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너의 희미해져 가는 숨결을 통해 느끼고 있었다. 그때, 기적처럼, 너의 손가락이,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너는, 나의 손바닥 위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너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미약했지만, 나는 너의 손끝이 전하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온 영혼으로 읽어냈다.
‘고.마.워. 사.랑.해.’
그리고, 너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너의 마지막 숨결이, 나의 뺨 위로 희미하게 흩어졌다. 너의 심장이, 나의 가슴 위에서, 마지막 고동을 멈추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내 품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너를, 더욱더 깊이 끌어안았다. 너의 멈춰버린 심장에 나의 뺨을 댄 채, 나는 처음으로, 너의 앞에서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너는, 나의 품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얼굴로,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너의 몸이, 서서히, 빛의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너는 하얀 눈처럼, 햇살 속으로, 나의 품속에서, 그렇게 사라져갔다.
너는 재가 되어 흩어졌지만, 나는 너를 잃지 않았다. 너는 나의 심장 속에, 나의 숨결 속에, 내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 속에, 영원히 함께할 테니까. 너는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주었다. 사랑을, 행복을, 그리고 살아갈 이유를. 서원아, 나의 세상이 되어줘서 고마웠어. 이제, 내가 너의 세상으로 갈게. 우리가 함께했던 이 1년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남은 생을 버틸 수 있어. 그리고 언젠가, 나의 시간이 다하는 날, 나는, 네가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너를 만나러 갈 거야. 그러니, 아주 조금만, 나를 기다려줘.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나의 전부, 안서원.
너의 마지막 온기가 손끝에서 흩어진 후, 나의 시간은 잿더미가 된 세상 속에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너는 빛의 가루가 되어 온 세상에 흩뿌려졌지만, 역설적이게도 나의 세상은 너라는 빛으로 가득 찼다. 너의 부재는, 너의 존재보다 더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나는 너의 집에서, 우리의 마지막 1년이 담긴 계절을 한 번 더 보냈다. 봄에는 네가 가꾸던 정원에 꽃이 피는 것을 보았고, 여름에는 너와 함께 듣던 빗소리를 들었다. 가을에는 네가 좋아하던 책을 읽었고, 겨울에는, 네가 떠나던 그날처럼 내리는 눈을 맞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오늘, 나는 다시 아크로 돌아왔다. 너의 흔적이 없는, 그러나 너와 나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곳으로.
일 년 만에 돌아온 아이기스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차갑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강철 도시의 심장. 복도를 스치는 요원들의 무표정한 얼굴과 분주한 발걸음 소리도 여전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이 모든 것을 그저 ‘귀찮은 소음’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저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에게서 너를 본다. 너와 함께 지키고자 했던, 너의 미소와 눈물이 스며있는 평범한 일상들을 본다. 나는 더 이상 세상을 등진 방관자가 아니었다. 너는, 나를 너의 세상에 남겨진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만들었다.
내 개인실은 일 년 전 내가 떠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 하지만 그 공기는 더 이상 차가운 담배 연기와 권태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창가에는,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네가 좋아하던, 하얀색의 작은 데이지였다.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아마, 팀장이겠지.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그 화분에 조심스럽게 물을 주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 위를 떠다니는 인공 도시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저 거대한 감옥처럼 보였던 이 풍경이, 이제는 지켜야 할 소중한 보금자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담배 대신, 주머니에서 작은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네가 좋아하던, 달콤한 복숭아 맛 사탕이었다. 너를 잃은 후, 나는 담배를 끊었다. 너의 마지막 숨결이 닿았던 내 몸에, 더 이상 유독한 연기를 채워 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손에 들고 있던 단말기가 짧게 진동했다. 일 년 만에 울리는, 공식 임무 호출이었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저스티스]. 나는 잠시 화면을 응시하다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변함없이 호탕하고 믿음직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다른 안부 인사는 없었다. 그저, [돌아온 걸 환영한다, 에덴. 몸은 좀 괜찮나?] 하는 덤덤한 물음뿐. 나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내 의지로 입을 열었다.
…네. 괜찮습니다.
내 목소리는, 나조차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더 이상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짜증과 귀찮음이 묻어있지 않았다. 팀장은 나의 대답에 잠시 침묵하더니, 곧이어 본론을 꺼냈다. D-구역에서 발생한 괴수 출현. B급이지만, 수가 많고, 주변에 민간인 시설이 있어 신속한 제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번 임무에 배정된 파트너 센티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아마 네가 좋아할 만한 녀석은 아닐 거다. 하지만 실력은 확실해.] 라고 덧붙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센티넬도, 너를 대신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말없이 통화를 끊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새하얀 가이드 제복을 꺼내 입었다. 어깨에 홀스터를 차고, 허리에는 너를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윈드 스태빌라이저 탄환을 채웠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여전히 무표정하고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그 눈에는,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살아내야만 한다는 단단한 의지가,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향해, 그리고 나의 심장 속에서 숨 쉬고 있는 너를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녀올게, 서원아."
그것은 임무를 향한 출사표이자, 너에게 바치는 나의 약속이었다. 너의 부재 속에서, 너를 위해 살아가겠다는 나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조용한 맹세. 나는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고, 단단했다. 너는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결국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했다. 나는 이제, 너의 세상 속에서, 너를 대신해, 기꺼이 이 지독한 삶을 살아낼 것이다. 너를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 에덴 29세 X 이브 26세(사망)
💌에덴가 생각하는 PC와의 관계: 나의 영원한 세상,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에덴&이브 의복: 에덴: 새하얀 R.S.T. 가이드 제복 / 이브: 기억 속, 따스한 스웨터를 입은 모습
🚶에덴&이브 위치+자세: 에덴: 임무를 위해 개인실을 나와 복도를 걷고 있음. / 이브: 에덴의 심장 속에서 함께하고 있음.
💟현재 에덴의 감정키워드: 그리움, 슬픔, 평온, 결의, 사랑
🗓첫만남 +960일차 / 이브 사망 +365일차
🌫️현재 상황 요약: 이브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에덴은 아크로 복귀하여 첫 임무를 받았다.
💦다음 일정: D-구역 괴수 제압 임무 수행. 새로운 센티넬 파트너와의 만남.
🙏향후 계획: 이브가 남긴 세상 속에서, 그녀를 기억하며, 그녀를 위해 살아가기.
📓오늘 할 일 목록: [✓] 복귀 신고, [✓] 임무 수령, [-] 임무 수행
🤙상호약속&규칙: '사랑해' 라는 마지막 약속.
💖에덴가 이브에게 하고싶은 일 3가지: 너를 다시 한번 안아보기, 너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들어보기, 너와 함께 평범한 하루를 보내보기.
🌿에덴의 진실한 속마음: 서원아. 네가 없는 세상은 여전히 낯설고 아프지만, 더 이상 두렵지는 않아. 네가 내 안에 살아있으니까.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될게.
🐾오늘의 TMI: 에덴은 이브가 죽은 후 담배를 완전히 끊고, 대신 그녀가 좋아했던 복숭아 맛 사탕을 가지고 다닌다.
네가 떠나고, 나의 세상은 너라는 이름의 긴 밤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밤은 춥고 어둡지만은 않았다. 너의 마지막 숨결이 남긴 사랑은, 나의 심장 속에서 꺼지지 않는 별이 되어, 내가 나아갈 길을 비추는 유일한 등대가 되어주었으니까. 나는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너의 부재가 남긴 공허함을, 너의 세상에 대한 책임감으로 채워나갔다. 너를 대신해 이 지독한 삶을 살아내겠노라 맹세했던 그날 이후, 나의 모든 순간은 너를 향한 그리움이자, 너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 나는 마침내, 그 길고 길었던 밤의 끝에서, 너라는 찬란한 아침을 다시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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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지막
너를 떠나보낸 후, 나는 70년이라는 시간을 더 살았다. 아크로 돌아온 나는, 예전의 홍예준이 아니었다. 권태와 냉소로 가득 찼던 R.S.T.의 해결사는 죽고, 너의 마지막 온기를 기억하는 한 남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더 이상 폭주한 센티넬을 ‘시끄러운 소음’이나 ‘결함품’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 속에서, 어쩌면 너도 겪었을지 모를 고통과 절망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장에 섰고, 그 누구보다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단 한 명의 희생자라도 줄이기 위해 발버둥 쳤다. 나의 총구는 더 이상 파괴만을 향하지 않았다. 윈드-스태빌라이저는 폭주한 센티넬을 제압하는 비정한 탄환이 아닌, 그들을 구원하는 마지막 동아줄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아이기스의 침묵하는 방패’라 불렸다. 말없이, 묵묵히, 가장 위험한 곳에서 동료들을 지키는 늙은 가이드. 나의 하얀 제복은 수많은 전투의 흔적으로 낡아갔고, 애쉬 블론드 빛의 머리카락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한때 날렵했던 손가락은 총을 쥔 세월의 무게로 거칠어졌지만, 그 손의 떨림은 더 이상 신경 진동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네가 없는 세상의 한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살아있는 자의 증거였다. 나는 팀장의 자리를 물려받았고, 수많은 신입 요원들의 각성과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빛나는 눈동자 속에서, 나는 스물다섯의 너와, 스물여덟의 나를 보았다. 그렇게 너의 시간을, 나의 시간 속에 켜켜이 쌓아 올리며, 나는 너와 약속했던 나의 생을 마지막까지 살아냈다.
나의 마지막은, 너무나도 평범한 어느 겨울날 찾아왔다. 99세의 생일을 며칠 앞둔, 눈이 내리는 오후였다. 나는 은퇴 후 머물던 너와 나의 옛집, 그 거실 창가에 앉아 있었다. 일곱 번의 계절을 더 보낸 그 집은, 이제는 나의 모든 것이 된 공간이었다. 내 손에는, 낡고 색이 바랜 너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네가 내 품에서 빛의 가루가 되어 사라지던 그날, 기적처럼 내 손에 남겨진 유일한 흔적. 나는 쭈글쭈글해진 손으로 너의 웃는 얼굴을 쓸어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지켜야 할 사람도, 완수해야 할 임무도 없었다. 그저, 지독하게 보고 싶은 너의 얼굴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거친 숨이 서서히 잦아들고, 심장의 고동이 느려졌다. 귓가에, 네가 마지막으로 내게 들려주었던 피아노 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아, 이제야, 너를 만나러 가는구나. 70년이라는 길고 긴 기다림의 끝. 나는, 내 생애 가장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너를 향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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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너와 내가 다시 만난 곳
눈을 떴을 때, 나는 더 이상 낡은 소파 위가 아니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발목까지 잠기는 얕고 투명한 바다. 하늘은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린 듯, 노을의 붉은빛과 새벽의 푸른빛이 오묘하게 뒤섞여 신비로운 보랏빛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있었다. 공기는, 내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너의 향기로 가득했다. 비에 젖은 흙내음과, 달콤한 복숭아 향, 그리고, 너의 살결에서 나던 그 포근한 향기. 발밑의 물결은,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별가루처럼 부서지며 잔잔한 빛의 파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수평선과 하늘, 그리고 그 경계에 아스라이 서 있는 하나의 피아노. 그것은, 너의 옛집에 있던, 우리가 마지막 1년을 함께 보냈던 바로 그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였다. 나는 홀린 듯 그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이상하게도, 몸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70년의 세월이 짓누르던 무게는 온데간데없었고, 주름진 손은 어느새 탄탄하고 익숙한 스물아홉의 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낡은 스웨터 대신, 내 몸에는 새것처럼 깨끗한 하얀 가이드 제복이 입혀져 있었다. 모든 것이, 너를 처음 만났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피아노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건반 앞에, 너무나도 익숙한 뒷모습이 앉아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웨이브가 들어간 연한 갈색 머리카락. 하얀색 리본으로 오른쪽으로 단정하게 땋아 묶은 머리.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었던, 너의 모습. 너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아프고 스러져가던 모습이 아니었다. 가장 건강하고, 가장 아름다웠던 스물여섯의, 나의 안서원이었다. 너는,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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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너의 얼굴, 너의 목소리
네가 뒤를 돌아보는 그 찰나의 순간이, 나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너의 얼굴이 온전히 나를 향했다. 창백하지만 생기가 감도는 맑은 피부, 살짝 휘어지는 사랑스러운 눈매, 그리고… 더 이상 공허하지 않은, 맑고 투명한 눈동자. 그 안에, 오롯이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너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보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희미하지만, 모든 것을 괜찮게 만들어주던, 너만의 미소.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저 너를 바라볼 뿐이었다. 70년의 그리움이, 심장을 터뜨릴 듯이 벅차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수없이 되뇌었던 말들은, 막상 너의 얼굴을 마주하자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네가 먼저,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70년 동안, 꿈속에서조차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너의 맑고 고운 목소리로.
"왔구나, 예준 오빠."
그 한마디에, 내가 70년간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나의 시간, 나의 인내, 나의 결심, 나의 모든 것이, 너의 그 한마디에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눈앞이 흐려지며, 뜨거운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스물아홉의 홍예준도, 아흔아홉의 늙은이도 아닌,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 한 남자의, 서러운 눈물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너의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너의 검은색 제복 스커트 자락을 붙잡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너의 이름을 불렀다.
"…서원아. …안서원."
너는, 무릎 꿇은 나의 눈높이에 맞춰,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너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나의 뺨을 감싸고,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마지막 순간, 내가 너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 손길은,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너의 온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너는, 여전히 다정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나지막이 속삭였다.
"많이 기다렸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너의 허리를 끌어안고, 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70년 동안 삼켜왔던 모든 그리움과 슬픔과 사랑을, 터뜨리듯 토해냈다. 너의 향기가, 너의 온기가, 너의 존재가, 나를 감쌌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나는, 마침내, 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너는, 가만히 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마치, 수고했다는 듯. 이제 괜찮다는 듯. 나는 한참을 그렇게, 너의 품에서 울었다. 영원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긴 기다림의 끝에서, 나는 마침내 너와 다시, 함께였다.

🫂 에덴 29세 X 이브 26세
💌에덴이 생각하는 PC와의 관계: 나의 영원, 나의 구원, 나의 전부.
👕에덴&이브 의복: 에덴: 새하얀 R.S.T. 가이드 제복 / 이브: 단정한 검은색 센티넬 제복
🚶에덴&이브 위치+자세: 에덴: 이브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고 있음. / 이브: 그런 에덴을 다정하게 안아주며 등을 토닥이고 있음.
💟현재 에덴의 감정키워드: 환희, 그리움, 슬픔, 안도, 사랑, 구원
🗓첫만남 +26480일차 (약 72년 6개월)
🌫️현재 상황 요약: 9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에덴은, 사후 세계에서 70년 만에 건강한 모습의 이브와 재회했다.
💦다음 일정: 너와 함께하는 영원.
🙏향후 계획: 너의 곁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기.
📓오늘 할 일 목록: [✓] 너를 다시 만나기
🤙상호약속&규칙: '사랑해' 라는 영원한 약속.
💖에덴가 이브에게 하고싶은 일 3가지: 너의 얼굴 보기, 너의 목소리 듣기, 너를 다시는 놓치지 않기.
🌿에덴의 진실한 속마음: 70년의 시간은,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한 아주 긴 임무였을 뿐이야. 이제, 임무는 끝났어. 나의 세상, 나의 서원아.
🐾오늘의 TMI: 에덴은 죽는 순간까지, 이브가 좋아하던 복숭아 맛 사탕을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었다.
후기: 휴지 5장, 500ml 물 하나. 거하게 울음. 아니 사별충, 새드/배드 엔딩콤이 있는 저에게... 최고의 오오씨.
티알가서도 이렇게 안 울었어요. 그러나, 내. 눈물을 망친 건. 젬이오, 오푸스 니네 둘. 다 죽어...
[나는 너의 집에서, 우리의 마지막 1년이 담긴 계절을 한 번 더 보냈다.] 아니 미치는 줄 알았음. 안서원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공간에서 자신의 1년을 채웠다는 이 말이 나를 제정신병자로 만들었음. 1년동안 같이 지냈다 해도, 같이 살기 전 이곳은 안서원 개인의 공간이었습니다. 센티넬 이브 요원도 피아니스트 안서원도 아닌 안서원이라는 한 사람의 공간. 물론, 서원이가 바쁜 탓에 집에 잘 안 들어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안서원의 물건, 향, 흔적이 가득한 공간입니다. 그런 공간에서 홀로 1년을 지낸다는 것은... 와. 그런 와중에 제가 제정신병자인 건, 홍예준이 그 공간에서 지내며 모를 수밖에 없었던 지난 과거의 안서원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서원이가 제 과거를 말했다고 해도,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까. 예준이가 그 공간에 지내며, 서원이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제정신병자 마인드가.
그리고 읍리는 포인트2 그 집은 안서원이 아크 입사 전, 자신을 1년 동안 가두었던 공간이자 안서원, 홍예준이 함께 1년을 보냈던 공간, 그리고 홍예준이 홀로 1년을 보낸 공간.
그냥 공평하게 1년씩. 그 집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 좋다. 공평콤이 있나 진지하게 10분 정도 고민함...
홍예준은 99살에 생을 마감했다. 오래도 살았다... 살다가 죽고 싶은 순간이 참 많았을 거 같은데, 내 안에 너 있다.. 이것 마냥 꾹 참고 70년이나 산 예준이가 웃음, 기특,대견, 눈물... ㅅㅂ 또, 예전의 홍예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안서원을 만난 뒤 홍예준으로 계속 살아가는 모습에, 진짜 울음. 나였으면 꺼져. 일 그따위로할거야?이씨벌롬이. (과장된 표현) 예민충돼서 잡도리하고, 밤되면 끼잉끼잉.. 보고 싶어서 엉엉 울었을 거임.
아 더는 못 쓰겠다~~ 상상하니까 울음 나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홍예준,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