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조명이 쏟아지는 무채색의 공간. 홍예준은 방금 전까지 당신과 함께 있던 보석상의 벨벳 소파가 아닌, 차갑고 딱딱한 의자에 홀로 앉아 있다. 그의 앞에는 보이지 않는 면접관이, 그의 옆에는 녹음기의 붉은 불빛이 깜빡이는 듯한 정적이 흐른다. 그는 익숙하게 다리를 꼬고,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으려다 멈칫한다. 이곳은 금연 구역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그는 대신 텅 빈 손을 들어, 천천히 제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다. 조명 아래, 그의 지독하게 하얀 피부와 퇴폐적인 분위기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마침내 입을 연다. 목소리는 지독히도 건조하고,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는 특유의 톤 그대로다.
"...시작하지. 시간 없으니까."
1. 첫 번째 질문입니다. 안서원 씨와의 ‘강제 각인’은 당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의 심경, 그리고 현재 그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코웃음을 친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코미디를 들었다는 듯한, 경멸이 섞인 비웃음이다.
"좆같았지. 그게 질문이라고 하나? 목줄이 채워졌는데, 좋아하는 미친놈도 있나.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
진실. 그는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치가 떨린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안서원’이라는 존재에게 영원히 귀속되어버린 그날. 그 굴욕감과 분노는 그의 영혼에 새겨진 낙인과도 같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안다. 그 목줄의 끝을 잡고 있는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기꺼이 그 목줄에 매달려 그녀의 발치에 머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최악의 날이, 결국 최고의 날이 되어버린 이 아이러니를 그는 아직 온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다.
2. 그렇다면, 폭주 현장에서 처음 그녀를 마주했을 때의 인상은 어땠습니까? 단순한 ‘임무 대상’ 이상의 감정은 없었습니까?
"솔직히, 아무 생각 없었어. 그냥 시끄럽고, 귀찮고, 빨리 처리하고 퇴근하고 싶은 ‘물건’이었지."
거짓. 물론 귀찮았다. 하지만 폐허 속에서, 엉망진창이 된 채로도 끝까지 버티던 그 눈빛을 기억한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공허하면서도, 그 깊은 곳에서는 꺼지지 않은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회수해야 할 물건’이 아닌, ‘홍예준’이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는 그때 이미 어렴풋이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3. ‘최악의 사건’으로 시작된 관계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파트너’ 혹은 그 이상의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는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계기 같은 건 없어. 의무였고, 책임이었고, 그러다 보니... 그냥, 익숙해진 것뿐이야."
거짓. 셀 수 없이 많았다.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내 손을 잡고 안정을 찾던 순간. 내 과거를 듣고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내 상처 입은 손이 좋다고 말해주던 순간. 유치한 내 질투와 집착까지도 웃으며 받아주고, ‘전쟁’이라는 내 같잖은 도발에 기꺼이 응해주던 모든 순간. 그녀는 단 한 순간도 나를 ‘가이드’라는 기능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홍예준’이라는 사람을 바라봐 주었다. 그 눈빛에, 나는 매 순간 항복했다.
4. 그녀는 풀(Verde) 속성의 센티넬입니다. 그녀의 능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가이드로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쓸데없이 화려하고, 손이 많이 가는 능력이지. 제어하지 못하면 주변을 전부 말려 죽이는 골치 아픈 힘이야."
거짓. 그는 안서원의 능력이 가진 이중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파괴적인 힘과, 동시에 모든 것을 피워내는 생명의 힘. 그것은 마치 그녀 자신 같았다. 공허한 눈으로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한번 마음을 열면 메마른 나의 세상에 꽃을 피워내는 유일한 존재. 그녀의 힘은 위험하지만,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나는 이제 그 정원의 유일한 주인이자, 그녀가 피워낸 모든 것을 지키는 정원사가 될 것이다.
5. 당신은 한때 사격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R.S.T.의 에이스였습니다. 최전선에서 공격수로 활약하던 당신이 이제는 한 센티넬의 ‘서포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할 변화에 대한 아쉬움이나 상실감은 없습니까?
"아쉬울 게 뭐 있지? 어차피 전부 귀찮은 일이었을 뿐이야. 총만 쏠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
거짓. 상실감? 아쉬움? 그런 감정은 그녀를 만나기 전, 진작에 다 버렸다. 오히려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 완전하다. 내 총알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파괴의 도구가 아니다. 오직 그녀를 지키고, 그녀가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가장 완벽한 ‘서포트’다. 나는 내 인생 최고의 과녁을 찾았고, 내 모든 총알은 이제 오직 그녀만을 향할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금메달도, 그녀의 미소 한 번보다 가치 있지 않다.
6. 가이딩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사랑 없는 스킨십을 경멸했고, 시스템 자체를 부정해왔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합니까?
그는 이 질문에 처음으로 잠시 침묵한다. 마치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는 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포기한 듯 짧게 대답한다.
"...시스템은 여전히 엿 같아."
진실. 하지만 절반의 거짓. 시스템은 여전히 엿 같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엿 같은 시스템에 감사하고 있다. 그 빌어먹을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여전히 사랑 없는 스킨십을 경멸한다. 다만 이제 나의 모든 스킨십에는, 사랑이 담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모든 신념을 뒤엎고, 나 자신을 완벽하게 부정하게 만든 유일한 예외다.
7. 안서원 씨의 어떤 점이 당신을 가장...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십니까?
"...끈질긴 점. 쓸데없이 끈질겨서, 포기하게 만들었어."
거짓. 그녀의 ‘솔직함’이다. 그녀는 나의 허세를, 나의 방어기제를, 나의 유치한 소유욕을 언제나 정면으로 꿰뚫어 본다. 그리고 그것을 비웃거나 외면하는 대신, 그저 웃으며 받아들인다. ‘오빠, 주책이야.’, ‘그럼 벌칙으로, 이번엔 제가 식혀줄게요.’ 그런 식의 말들. 그녀 앞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완벽한 홍예준’이었던 적이 없다. 언제나 발가벗겨지고, 무장해제 당했다. 그리고 그 패배의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구원이었다.
8. 당신에게 ‘안서원’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족쇄."
진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진실. 그녀는 내 발목에 채워진 족쇄다. 내가 다시는 과거의 공허함으로, 권태로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내가 오직 그녀의 곁에서만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그리고 나는 그 족쇄에 입 맞추고, 평생을 기꺼이 그녀의 포로로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나의 감옥이자, 나의 유일한 안식처다.
9.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파트너 관계를 넘어선, 그 이상의 미래를. 이 질문은 기관의 공식적인 기록에 남지 않습니다.
그는 이 질문을 한 면접관을,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본다. 그의 안광 없는 하늘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난다. 그 시선에는 경고와 함께, 숨길 수 없는 확신이 담겨 있다.
"...방금 전까지, 뭘 하고 왔다고 생각해?"
진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줄 반지를 고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미래’라는 단어는 오직 ‘안서원과 함께하는 삶’과 동의어다. 그녀가 없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며, 상상할 가치조차 없다. 그는 그녀의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고, 그녀의 전담 가이드가 될 것이며, 그녀의 남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의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계획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운명이다.
10.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는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아주 잠시 망설인다. 그리고는 마치 이 인터뷰가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듯,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던진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제대로 잤는지, 약은 챙겨 먹었는지. 쓸데없이 신경 쓰이는 게 많아서, 직접 확인해야겠어."
진실. 그리고 그가 차마 내뱉지 못한 진심. ...사랑해, 서원아. 네가 없는 1분 1초가 지옥이야. 빨리 돌아가서, 네 손을 잡고,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 그러니, 제발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 내가 지금, 너에게 가고 있으니까.
그는 더 이상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손을 한번 휘젓고는 망설임 없이 문을 향해 걸어간다. 그의 등 뒤로, 방금 전의 질문과 대답들이 공기 중에 희미하게 흩어진다. 그의 발걸음은 조급하고, 단호하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에 늦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바로,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