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렬왕 재위 14년. 서기 1288년의 겨울이었다.
개경의 하늘은 납빛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삭풍이 궁궐의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흔들었다. 원 간섭기라는 시대의 무게가 고려의 모든 것 위에 내려앉아 있던 때였다. 원의 달루가치가 개경 곳곳에 눈을 박고 앉아 있었고, 고려의 왕은 원의 부마국 왕이라는 굴레를 목에 걸고 있었다. 그 시절,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자리를 채운 것은 권문세족의 사병과, 그 사병을 움직이는 은밀한 힘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요술이라 불렀고, 무당의 주술이라 속삭였으며, 혹자는 하늘이 내린 재앙이라 두려워했다. 각성자. 그들은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초인적인 힘을 지닌 자들이 권문세족의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며 정적을 제거하고, 민초의 피 위에 권력의 탑을 쌓았다. 그리고 그 괴물들을 제어하는 유일한 존재. 진정사(鎭靜師)라 불리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손길만이 폭주하는 각성자의 광기를 잠재울 수 있었으며, 그래서 진정사는 권문세족에게 있어 각성자 못지않은 귀중한 자산이었다.
홍씨 가문의 서자, 예준. 그는 개경에서 가장 값비싼 화살이라 불리던 사내였다. 바람을 읽는 진정사. 그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삭풍처럼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폭주한 각성자의 경맥을 얼어붙게 만들어 의식을 빼앗는 데 능했다. 활을 쏘는 것도 그의 재주였다. 바람의 흐름을 몸으로 읽어내는 체질 탓에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서자라는 출생의 낙인은 그에게 가문의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권문세족의 그림자 속에서 암살과 제압을 업으로 삼는 존재로 자라났다. 그의 눈동자는 하늘빛이었으나 그 안에 어떤 광채도 서려 있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는 사내. 살인이 일상이 된 자의 눈은 그렇게 생겨먹는 법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집착하는 것은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의 정적. 바람이 멈추고 세상이 고요해지는 찰나의 완벽함뿐이었다.
안씨 가문의 딸, 서원. 그녀는 개경의 권문세족 사이에서 요물이라 불리던 여인이었다. 풀의 기운을 지닌 각성자. 그녀의 손끝에서 자라나는 덩굴은 강철을 뚫고 돌을 깨뜨렸으며,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포자는 사람의 폐 속에서 꽃을 피워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안씨 가문은 원의 달루가치와 결탁하여 왕실을 위협하는 역적 가문이었고, 서원은 그 가문의 칼날이자 방패였다. 창백한 피부, 차분한 눈매, 허리까지 내려오는 연한 갈색 머리카락. 그녀의 외양은 한없이 고요했으나, 그 고요함 아래에는 통제할 수 없는 힘의 폭류가 잠들어 있었다. 서원은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했다. 가문의 명에 따라 사람을 죽일 때마다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쌓여갔고, 눈을 감으면 자신이 죽인 자들의 폐에서 피어난 꽃잎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그녀에게 삶이란, 가문이라는 굴레 안에서 서서히 마모되어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충렬왕 14년 동짓달의 어느 밤이었다. 홍씨 가문은 안씨 가문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라는 왕실의 밀명을 받았고, 예준은 안씨 가문의 핵심 각성자를 제압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대상은 안서원. 눈이 내리던 밤, 예준은 안씨 별장의 지붕 위에 엎드려 바람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화살촉에 자신의 기운을 응축시킨 특수한 화살. 그것이 대상의 경맥을 관통하면 의식을 잃게 된다. 그는 활시위를 당겼다. 바람이 멈추었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그 찰나, 별장의 마당에 홀로 서 있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발 사이로 올려다보는 흰 눈동자가 지붕 위의 그를 정확히 포착했다. 놀라움도, 공포도 없는 시선이었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예준의 손가락이 굳었다. 활시위를 놓아야 할 순간에 그의 몸이 멈추었다. 바람을 읽는 체질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의 파동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풀의 기운. 생명의 힘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씨앗. 그 모순적인 파동이 그녀의 몸에서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폭주 직전의 파장. 그녀는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 처절한 자기 통제의 떨림이 바람을 타고 그의 손끝까지 전해져 왔다. 예준은 화살을 쏘지 못했다.
이후의 일들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동시에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예준은 임무를 실패했다고 보고했다. 대상을 놓쳤다고. 하지만 그 뒤로도 그는 밤마다 안씨 별장의 지붕 위에 올랐다.
그는 매번 같은 자리에 앉았다. 별장 동쪽 처마 끝, 기와의 서리가 가장 얇게 내려앉는 곳. 바람이 마당 쪽에서 불어올라 그녀의 기운을 가장 선명하게 실어다 주는 지점이었다. 처음에는 정찰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대상의 행동 패턴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흘째 되던 밤, 예준은 자신이 활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에 들린 것은 화살통이 아니라 건조시킨 박하 잎을 말아 넣은 지관(紙管)이었다. 연기를 들이마시며 그는 마당에 선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서원은 매일 밤 같은 시각에 방에서 나왔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다. 얇은 적삼 차림으로 눈 내리는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유령 같았다. 그녀의 몸에서 풀의 기운이 불안정하게 맥동할 때마다, 발밑의 얼어붙은 흙 사이로 가느다란 풀잎이 돋아났다가 다시 시들어 죽었다. 생명과 죽음의 순환이 그녀의 발치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예준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자신의 손끝에서 진동하는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바람의 기운과 동기화된 체질이 만들어내는 신경 진동. 그것은 그녀의 고통과 기묘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보름이 지났다. 예준은 더 이상 지붕 위에 숨어 있지 않았다. 어느 밤, 그는 마당의 감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서원이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3보 거리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풀의 각성자는 대지의 진동을 감지한다. 지붕 위에 사람이 올라앉아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모른 척한 것이었다. 죽여도 좋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외로운 밤의 유일한 위안이었을까. 예준은 물었다. 왜 도망치지 않느냐고. 서원은 대답했다. 도망칠 곳이 없다고. 그 밤 이후로 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대화라 부르기엔 너무 짧고 건조한 것들이었다. 바람이 차다. 잠이 안 온다. 손이 떨린다. 나도. 그런 단편적인 말들이 눈발 사이로 오갔다. 예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 여인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면서도 손에서 활을 놓지 못하는 자신과, 살인이 싫으면서도 가문의 칼날 노릇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굴레에 묶여 같은 방향으로 마모되어가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고 이월의 해빙기가 찾아왔을 무렵, 예준은 서원의 경맥에 처음으로 손을 대었다. 그녀의 폭주가 임계점에 달한 밤이었다. 서원의 손끝에서 자라난 덩굴이 별장의 기둥을 휘감아 으스러뜨리고 있었고,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포자가 공기 중에 녹색 안개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예준은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바람의 기운을 손바닥에 응축시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기류가 그녀의 경맥을 타고 흘러들어갔다. 서원의 몸이 경련하듯 떨렸고, 폭주하던 풀의 기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덩굴이 힘을 잃고 늘어졌다. 포자가 바람에 흩어졌다. 서원은 예준의 팔 안에서 의식을 잃었고, 예준은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품에 안은 채 밤을 지새웠다. 그날 이후, 그는 진정사(鎭靜師)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이 여인에게만은 굴레가 아니라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서원의 폭주를 잠재우는 것은 오직 그의 바람뿐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적대 가문의 암살자와 제거 대상이라는 관계 위에, 진정사와 각성자라는 새로운 끈을 겹쳐 놓았다. 그것은 곧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변질되었다. 매화가 피기 시작한 삼월, 예준은 서원의 입술에 처음으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바람의 기운이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고, 서원은 각성 이후 처음으로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며 예준은 생각했다. 이것이 자신이 활시위를 놓지 못한 이유였을까.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봄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사월, 홍씨 가문의 가주가 예준을 불렀다. 안씨 가문의 각성자 제거 임무가 왜 수행되지 않았느냐는 추궁이었다. 예준은 침묵했다. 가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자의 목숨은 가문의 소유물이라는 말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네 목이 먼저 떨어질 것이라는 선고. 예준은 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돌아가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닷새째 되는 밤, 그의 발은 다시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닷새의 공백이 예준의 몸을 갉아먹었다. 가주의 서재에서 나온 뒤로 그는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혀 활시위만 매만졌다. 현(弦)의 장력을 확인하고, 촉을 갈고, 다시 풀고, 다시 조이고. 의미 없는 반복이었다. 손끝의 미세한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박하 잎을 말아 넣은 지관에 불을 붙여도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예전에는 연기를 들이마시면 신경이 무뎌지며 손이 고요해졌다. 지금은 달랐다. 폐를 채우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서원의 체온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손목을 잡았을 때 경맥을 타고 흘러들어간 자신의 기운이 그녀의 심장 근처에서 따뜻하게 녹아내리던 감각. 그것이 손바닥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예준은 처소의 문지방에 등을 기대고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서까래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바람은 동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안씨 별장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의 체질은 잔인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바람이 그녀의 기운을 실어다 주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풀의 파동.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맥박. 폭주의 전조. 예준은 눈을 감았다. 닷새 동안 자신이 곁에 없었으니 그녀의 상태가 악화되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차갑게 돌아갔다. 동시에 가주의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네 목이 먼저 떨어질 것이다. 예준은 지관의 재를 털었다. 재가 바닥에 흩어지며 회색 무늬를 그렸다. 그는 일어섰다.
닷새째 밤, 예준의 발이 안씨 별장의 담장 위에 닿았을 때, 그는 자신이 이미 선택을 끝냈다는 것을 알았다. 등에 활이 메여 있었다. 화살통 안에는 기운을 응축시킨 특수한 화살 세 대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원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추적자가 올 것이었다. 가주는 이미 예준의 배신을 눈치챘을 터. 뒤를 밟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예준은 그들을 처리하며 서원을 데리고 개경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바람 소리만 들리는 곳으로. 그것이 그가 그녀에게 한 세 번째 약속이었다. 담장에서 내려선 예준의 시선이 마당을 훑었다. 감나무 아래, 달빛이 쏟아지는 자리. 서원이 있었다. 옥색 적삼 차림으로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사월의 밤은 아직 차가웠다. 그녀의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 입김 사이로 가느다란 풀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폭주의 징후였다. 예준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닷새. 고작 닷새를 비웠을 뿐인데 그녀의 상태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 그는 담장에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검은 무복 위에 걸친 남색 겉옷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서원의 흰 눈동자가 그를 향해 돌아왔다. 달빛 아래에서 그 눈동자는 반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빛났다.
"...늦었어."
예준의 목소리는 짧고 건조했다. 사과가 아니었다. 사실의 진술이었다. 그는 3보 거리에서 멈추어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서원의 손끝에서 가느다란 덩굴이 자라나 툇마루의 나무결을 파고들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능력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예준은 허리에 찬 가문의 문장 패를 의식했다. 홍씨 가문의 서자라는 낙인. 그것을 차고 있는 한 자신은 암살자였다. 그는 손을 뻗어 패의 끈을 풀었다. 금속과 가죽이 엉킨 패가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흙바닥 위에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밤에 울렸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가문을 버린다는. 자신의 목숨을 내건다는. 예준은 서원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손이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의 기운이 손바닥에서 흘러나와 그녀의 경맥으로 스며들었다. 덩굴이 힘을 잃고 늘어졌다. 서원의 몸에서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가자."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개경을 벗어나자. 가문의 굴레를 벗어나자. 바람 소리만 들리는 곳으로. 예준의 하늘색 눈동자가 달빛 아래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빛을 담고 있었다. 그 눈 안에 비친 것은 서원의 창백한 얼굴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기다렸다. 그녀가 일어서기를.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하지만 동시에 그의 귀는 담장 너머의 바람 소리를 읽고 있었다. 아직 추적자의 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날이 밝기 전에 개경의 성문을 빠져나가야 했다. 예준의 엄지가 서원의 손목 안쪽, 맥이 뛰는 자리를 무의식적으로 쓸어내렸다. 그녀의 맥박이 손끝에 전해졌다. 불규칙하지만 살아 있는 박동.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서원이 일어섰는지, 아니면 여전히 툇마루에 앉아 있는지. 예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숨을 참고 있었다. 바람이 별장의 감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잎사귀가 없는 앙상한 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마른 소리를 냈다. 사월이라 해도 밤의 공기는 아직 뼈를 파고드는 한기를 품고 있었다. 예준의 체질이 그 한기를 증폭시켰다. 그의 손은 언제나 차가웠다. 서원의 손목 위에 얹힌 그의 손가락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가움 아래로 흘러드는 바람의 기운만큼은 그녀의 경맥을 타고 들어가 폭주의 씨앗을 잠재우고 있었다. 예준은 그녀의 맥박이 조금씩 안정되어가는 것을 손끝으로 느꼈다. 불규칙하게 뛰던 박동이 점차 일정한 간격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닷새간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가 한 겹 벗겨지는 듯했다.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없었다. 그의 귀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소리를 분석하고 있었다. 담장 너머 골목의 고양이 발소리. 두 골목 건너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 그리고 아직은 감지되지 않는, 그러나 반드시 올 추적자들의 기척. 예준은 턱을 살짝 당기며 서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그녀의 창백한 피부 위에 은빛 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입술 사이에서 돋아나던 가느다란 풀잎이 그의 기운에 의해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준은 그 시선 안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체념. 혹은 안도. 혹은 그 둘이 뒤섞인 무언가. 예준은 자신의 감정을 분류하는 데 능하지 못했다.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의 정적처럼 명확한 것만을 다루어온 사내였다. 하지만 이 여인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내면이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제멋대로 흩어졌다. 그는 서원의 손목을 잡은 손에 미세하게 힘을 주었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었다. 등에 멘 활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 무게는 곧 자신이 지고 가야 할 것들의 무게이기도 했다. 가문을 배신한 서자. 적대 가문의 각성자를 품은 진정사. 개경의 어둠 속에서 쫓기게 될 두 사람의 미래. 예준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발을 내디뎠다. 아니, 알기 때문에 내디딘 것이었다. 이 여인을 두고 떠나는 것은 곧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가주의 다음 명령을 받을 다른 암살자가 올 것이고, 그 자는 예준처럼 망설이지 않을 것이었다.
"시간 없어. 날 밝기 전에 동문을 넘어야 해."
예준의 목소리는 낮고 급했다. 평소의 건조한 어조에 미세한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그는 서원의 손목에서 손을 옮겨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깍지. 그것은 놓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서약이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바닥에 떨어진 가문의 패 위를 스쳤다. 달빛에 비친 금속 문양이 흙먼지 속에서 둔하게 빛나고 있었다. 홍씨 가문의 문장. 서자의 굴레. 살인의 면죄부. 예준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느끼지 않으려 했다. 대신 손안에 쥔 서원의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체온에 집중했다. 그녀의 손은 그보다 더 차가웠다. 풀의 각성자가 이토록 차가운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묘했다. 생명의 힘을 다루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에는 온기가 부족한 여인. 예준은 그 모순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바람을 다루면서도 정작 자신의 떨림은 잠재우지 못하는 사내.
예준은 서원을 이끌며 별장의 후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빠르되 소리가 없었다. 암살자로 단련된 보법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바닥에 버린 패도, 지붕 위에서 보내온 수많은 밤들도, 그 모든 것을 등 뒤에 두고 앞만 보았다. 바람이 그의 등을 밀었다. 동쪽으로. 성문 너머의 어둠 속으로. 예준의 입술이 달빛 아래에서 얇게 벌어졌다. 박하 연기의 잔향이 그의 숨결에 실려 서원의 귀 곁을 스쳤을 것이다.
"...괜찮아. 내가 길을 안다."
그 말은 서원에게 한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한 것이기도 했다. 바람을 읽는 사내. 그는 이 개경의 모든 골목, 모든 지붕, 모든 담장의 바람길을 외우고 있었다. 추적자가 오더라도 바람이 먼저 알려줄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만 이 손을 놓지 않으면 되었다. 예준은 서원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을 것이다. 체질이 만들어내는 신경 떨림.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떨림이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맥박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후문의 나무 빗장을 밀어 올릴 때, 예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진동이 평소보다 거칠었다. 오래된 참나무 빗장이 녹슨 쇠걸쇠에서 빠져나오며 낮은 삐걱 소리를 냈다. 사월 밤의 공기가 문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차갑고 습한, 비가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무거운 공기. 예준의 체질이 본능적으로 그 기류를 분석했다. 동남풍. 풍속은 약하지만 습도가 높다. 빗소리가 발소리를 덮어줄 수 있다면 오히려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는 서원의 손을 잡은 채 후문 너머의 골목을 살폈다. 좁고 어두운 뒷골목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양쪽 담장에 기댄 장독대와 마른 빨래가 달빛 아래 기묘한 실루엣을 드리우고 있었다. 인기척은 없었다. 예준의 귀가 바람결을 따라 3리(里) 밖까지의 소리를 훑었다. 야경꾼의 딱따기가 서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순찰 간격은 반각(半刻). 그 사이에 두 골목을 지나야 했다.
서원의 손이 그의 손 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폭주의 잔여 진동 때문인지. 예준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손가락을 더 단단히 감쌌다. 바람의 기운을 의식적으로 손바닥에 얇게 깔았다. 차갑지만 안정적인 파장이 그녀의 피부를 타고 스며들도록. 가이딩이라 부르기엔 너무 미약한, 그러나 그녀의 경맥을 최소한으로 진정시키기엔 충분한 정도의 접촉. 예준은 자신의 생명력이 또 한 겹 깎여나가는 것을 느꼈다. 닷새간 쌓인 피로가 어깨와 허벅지 근육 깊숙이 박혀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몸이었다. 하지만 그 무게를 내색할 여유가 없었다. 골목 첫 번째 모퉁이를 돌 때, 예준은 서원을 자신의 등 뒤로 감싸듯 몸을 틀었다. 담장의 그림자 속으로 두 사람의 형체가 녹아들었다.
"소리 내지 마. 숨죽여."
예준의 입술이 서원의 귀 곁에서 거의 무음에 가까운 속삭임을 흘렸다. 박하 연기의 잔향이 그의 숨결에 실려 서원의 머리카락을 간질였을 것이다. 두 번째 골목으로 접어드는 모퉁이에서 예준의 발이 멈추었다. 그의 체질이 감지한 것이었다. 바람의 흐름이 미세하게 꺾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골목 저편에서 공기를 가르며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 명. 아니, 둘. 보법이 가볍다. 훈련받은 자들. 예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상보다 빨랐다. 가주가 미리 별장 주변에 감시를 풀어놓았던 것인가. 예준은 등에 멘 활에 손을 뻗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화살은 세 대뿐이었고, 개경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한 대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서원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으며 담장 위로 시선을 올렸다. 지붕 위의 바람길이 머릿속에 지도처럼 펼쳐졌다.
"...위로 간다. 잡아."
예준은 서원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바람의 기운을 발밑에 응축시켰다. 진정사의 기운은 본래 공격이 아닌 안정에 쓰이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몸을 부양시키는 정도의 기류 조작은 가능했다. 짧은 도약. 두 사람의 몸이 담장을 넘어 기와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기와가 서리에 젖어 미끄러웠다. 예준의 발이 능숙하게 서까래 위치를 짚어 무게를 분산시켰다. 서원을 안은 팔이 그녀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다.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니 골목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별장 후문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홍씨 가문의 추적자. 예준의 턱이 살짝 당겨졌다.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피의 맛이 혀끝에 번졌다. 그는 서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흰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예준은 그 눈동자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활을 멘, 지쳐 보이는 사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인의 눈에 비친 자신은 아직도 암살자일까. 아니면 이미 다른 무엇이 되었을까.
예준은 생각을 끊었다.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서원의 허리를 감싼 팔을 풀지 않은 채 지붕의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바람이 기와의 서리를 걷어내며 미끄러짐을 방지해 주었다. 체질이 만들어내는 바람과의 동기화가 이 순간만큼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세 번째 지붕을 넘을 때, 예준의 호흡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피로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닷새간 제대로 먹지 못한 몸이 기운을 쓸 때마다 항의하듯 근육을 경련시켰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안광 없는 하늘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오직 앞만을 향하고 있었다.
네 번째 지붕의 능선을 넘었을 때, 예준의 왼쪽 종아리 근육이 날카롭게 경련했다. 발끝이 기와 위에서 반 치(寸) 미끄러졌다. 바람의 기운이 즉각적으로 발바닥을 받쳐 주었지만, 그 찰나의 흔들림은 허리에 감싼 팔을 통해 서원에게 전해졌을 것이었다. 예준은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 아까 깨문 상처의 피 맛이 다시 번졌다. 닷새간의 공복과 수면 부족이 몸 구석구석에 쌓여 있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 거리는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넘었을 것이다. 지금은 달랐다. 서원에게 흘려보내는 기운이 그의 체력을 실처럼 가늘게 빼앗고 있었다. 매 접촉마다, 그녀의 경맥에 바람의 파장을 불어넣을 때마다 자신의 심장에서 한 방울씩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 그것을 알면서도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놓는 순간 그녀의 폭주가 재발할 것이었고, 폭주의 기운은 추적자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봉화나 다름없었다. 예준은 다섯 번째 지붕에 착지하며 잠시 무릎을 꿇었다. 숨을 고르는 척했다. 실제로는 시야 끝이 아른거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지붕 아래의 골목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두 명이 아니었다. 네 명으로 늘어 있었다. 예준의 귀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미세한 진동을 분석했다. 두 명은 아까 별장 후문 쪽에서 감지된 자들. 나머지 두 명은 동문 방향에서 역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가주는 예준의 도주 경로를 예측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했다. 예준에게 바람의 길을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홍씨 가문이었으니까. 그의 보법을, 그의 습성을, 그의 체질이 선호하는 기류의 방향을 가문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예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비소(鼻笑)에 가까운 찡그림이었다. 자신이 만든 길이 자신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는 꼴이라니. 그는 동쪽이 아닌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북문은 멀었다. 하지만 가주가 예측하지 못한 경로이기도 했다. 예준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바람의 지도를 재구성했다. 북쪽 골목의 기류. 지붕의 높낮이. 담장의 간격. 야경꾼의 순찰 동선. 모든 변수가 차갑게 계산되었다.
"...경로를 바꾼다. 북문으로 간다."
예준의 목소리가 서원의 귀 곁에서 거의 입술의 떨림만으로 전해졌다. 그는 서원의 허리를 감싼 팔을 잠시 풀었다가 그녀의 등 뒤로 옮겨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세를 바꾸는 동안 그의 손등이 서원의 목덜미를 스쳤다. 그 접촉의 순간, 바람의 기운이 다시 한 겹 서원의 경맥으로 흘러들었다. 예준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가 돌아왔다. 눈을 한 번 세게 감았다 떴다. 아직 괜찮다. 아직은 버틸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 다섯 번째 지붕의 능선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예준은 서원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그녀의 연갈색 머리카락 위에 은빛 물결을 드리우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그 그림자 아래에서 그녀의 흰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준은 그 시선 안에서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들킬까 두려웠다. 그래서 시선을 먼저 거두었다. 북쪽의 어둠을 향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예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서원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너지려는 자신의 다리에 채찍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예준은 일어섰다. 무릎이 떨렸다. 허벅지 안쪽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서원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다음 지붕을 향해 도약했다.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들어 올렸다. 기와 사이의 틈에서 이끼 냄새가 올라왔다. 젖은 흙과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뒤섞인 사월 밤의 공기. 예준의 남색 겉옷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달빛을 받아 짙은 남빛으로 물들었다. 여섯 번째 지붕에 착지하는 순간, 그의 오른손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활시위를 당기는 손. 그 손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박하를 태울 수 없는 지금, 떨림을 억누를 방법이 없었다. 예준은 그 떨림을 서원의 어깨를 감싸는 힘으로 전환시켰다. 떨리는 손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것이 지금 이 사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제였다.
북쪽으로 세 채의 지붕을 더 넘었을 때, 바람의 흐름이 변했다. 예준의 몸이 반사적으로 굳었다. 서원을 안은 채 기와 위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의 입술이 서원의 이마 가까이에서 숨을 멈추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바로 아래 골목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세 번째 추적자.
네 번째 지붕의 능선을 넘었을 때, 예준의 왼쪽 종아리 근육이 날카롭게 경련했다. 발끝이 기와 위에서 반 치(寸) 미끄러졌다. 바람의 기운이 즉각적으로 발바닥을 받쳐 주었지만, 그 찰나의 흔들림은 허리에 감싼 팔을 통해 서원에게 전해졌을 것이었다. 예준은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 아까 깨문 상처의 피 맛이 다시 번졌다. 닷새간의 공복과 수면 부족이 몸 구석구석에 쌓여 있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 거리는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넘었을 것이다. 지금은 달랐다. 서원에게 흘려보내는 기운이 그의 체력을 실처럼 가늘게 빼앗고 있었다. 매 접촉마다, 그녀의 경맥에 바람의 파장을 불어넣을 때마다 자신의 심장에서 한 방울씩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 그것을 알면서도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놓는 순간 그녀의 폭주가 재발할 것이었고, 폭주의 기운은 추적자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봉화나 다름없었다. 예준은 다섯 번째 지붕에 착지하며 잠시 무릎을 꿇었다. 숨을 고르는 척했다. 실제로는 시야 끝이 아른거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지붕 아래의 골목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두 명이 아니었다. 네 명으로 늘어 있었다. 예준의 귀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미세한 진동을 분석했다. 두 명은 아까 별장 후문 쪽에서 감지된 자들. 나머지 두 명은 동문 방향에서 역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가주는 예준의 도주 경로를 예측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했다. 예준에게 바람의 길을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홍씨 가문이었으니까. 그의 보법을, 그의 습성을, 그의 체질이 선호하는 기류의 방향을 가문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예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비소(鼻笑)에 가까운 찡그림이었다. 자신이 만든 길이 자신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는 꼴이라니. 그는 동쪽이 아닌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북문은 멀었다. 하지만 가주가 예측하지 못한 경로이기도 했다. 예준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바람의 지도를 재구성했다. 북쪽 골목의 기류. 지붕의 높낮이. 담장의 간격. 야경꾼의 순찰 동선. 모든 변수가 차갑게 계산되었다.
"...경로를 바꾼다. 북문으로 간다."
예준의 목소리가 서원의 귀 곁에서 거의 입술의 떨림만으로 전해졌다. 그는 서원의 허리를 감싼 팔을 잠시 풀었다가 그녀의 등 뒤로 옮겨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세를 바꾸는 동안 그의 손등이 서원의 목덜미를 스쳤다. 그 접촉의 순간, 바람의 기운이 다시 한 겹 서원의 경맥으로 흘러들었다. 예준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가 돌아왔다. 눈을 한 번 세게 감았다 떴다. 아직 괜찮다. 아직은 버틸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 다섯 번째 지붕의 능선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예준은 서원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그녀의 연갈색 머리카락 위에 은빛 물결을 드리우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그 그림자 아래에서 그녀의 흰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준은 그 시선 안에서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들킬까 두려웠다. 그래서 시선을 먼저 거두었다. 북쪽의 어둠을 향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예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서원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너지려는 자신의 다리에 채찍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예준은 일어섰다. 무릎이 떨렸다. 허벅지 안쪽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서원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다음 지붕을 향해 도약했다.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들어 올렸다. 기와 사이의 틈에서 이끼 냄새가 올라왔다. 젖은 흙과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뒤섞인 사월 밤의 공기. 예준의 남색 겉옷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달빛을 받아 짙은 남빛으로 물들었다. 여섯 번째 지붕에 착지하는 순간, 그의 오른손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활시위를 당기는 손. 그 손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박하를 태울 수 없는 지금, 떨림을 억누를 방법이 없었다. 예준은 그 떨림을 서원의 어깨를 감싸는 힘으로 전환시켰다. 떨리는 손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것이 지금 이 사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제였다.
북쪽으로 세 채의 지붕을 더 넘었을 때, 바람의 흐름이 변했다. 예준의 몸이 반사적으로 굳었다. 서원을 안은 채 기와 위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의 입술이 서원의 이마 가까이에서 숨을 멈추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바로 아래 골목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세 번째 추적자의 그림자가 골목 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달빛이 그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무복에 얼굴을 감싼 면포. 허리춤에 찬 단도의 날이 달빛을 받아 한 번 번뜩였다. 예준은 서원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덮듯 엎드린 채 숨을 완전히 멈추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자기 귀에만 울리는 것인지, 아니면 서원에게도 전해지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기와의 차가움이 복부를 통해 스며들었다. 서리가 내린 기와 표면의 수분이 그의 무복 앞섶을 적시고 있었다. 이끼 냄새와 젖은 흙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예준의 체질이 바람의 흐름을 읽었다. 추적자의 호흡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기류의 교란. 그 자의 심박수까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안정적이었다. 경계 중이지만 아직 표적을 포착하지 못한 상태. 예준의 턱이 미세하게 당겨졌다. 서원의 이마 위에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가 그녀의 흰 눈동자를 가리고 있었다. 그는 입술만으로, 소리조차 내지 않고 형태만을 만들었다. '움직이지 마.' 서원이 알아볼 수 있었을까. 알아보지 못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그 압력 자체가 무언의 명령이었으니까.
추적자가 멈추었다. 예준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그 자가 고개를 들어 지붕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준은 눈을 감았다. 바람의 기운을 극도로 억제했다. 체질에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기류의 파장마저 몸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순간 전신의 근육이 동시에 경련하듯 떨렸다. 바람과의 동기화를 인위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숨을 참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행위였다. 폐가 쪼그라드는 감각. 신경 말단이 비명을 지르는 감각. 하지만 예준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기류의 흔적을 남기면 훈련받은 추적자는 반드시 감지할 것이었다. 3초. 5초. 7초. 추적자의 시선이 지붕 위를 훑었다. 기와의 능선과 굴뚝의 그림자만이 달빛 아래 고요히 놓여 있었다. 10초. 추적자가 시선을 거두었다. 발소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쪽으로. 예준이 가려던 방향과 같았다. 예준의 이가 입술 안쪽을 파고들었다. 피 맛이 혀 위로 번졌다.
추적자의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진 후에야 예준은 억눌렀던 기류를 풀어놓았다. 순간 전신을 관통하는 역류의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목 뒤의 근육이 불에 달군 쇠를 누른 듯 뜨겁게 경련했다. 예준은 소리 없이 입을 벌려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사월의 공기가 폐를 채웠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호흡이 간신히 안정되었다. 시야의 끝이 여전히 아른거렸지만, 의식은 명확했다. 그는 서원의 어깨를 감싼 손에 다시 힘을 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기와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동작 하나에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예준은 그 통증을 표정 뒤에 감추었다. 서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달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두려움을 읽었는지, 혹은 자신의 두려움을 그녀에게 투영한 것인지. 예준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손이 서원의 뺨 곁으로 올라가 흐트러진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떨림이었다.
"...북문 쪽에도 한 명 있어. 경로를 다시 바꿔야 해."
예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하지만 그 건조함 아래에 깔린 피로가 음성의 끝을 미세하게 갈라놓고 있었다. 그는 서원의 손을 다시 잡으며 지붕의 능선 위에 쪼그려 앉았다. 바람을 읽었다. 북쪽의 기류가 추적자의 움직임을 전하고 있었다. 동문에 넷, 북문 방향에 한 명. 서문과 남문은 아직 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주가 예준의 경로 변경을 예측하고 북문에도 인원을 배치했다면, 남은 방향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예준의 시선이 서쪽을 향했다. 서쪽에는 개경의 시전(市廛) 거리가 있었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이 시각에는 텅 빈 상점들만이 늘어서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시전 거리 너머에는 개울이 흘렀다. 개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성벽의 수구(水口)가 있었다. 수문 아래의 좁은 통로. 사람 둘이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 예준은 그 길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가문의 훈련을 피해 혼자 성 밖으로 빠져나가던 비밀 통로. 가주도 모르는 길.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하나 더 있어. 가주가 모르는 길."
예준은 서원의 손을 잡은 채 서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달빛 아래에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예준은 서쪽을 가리킨 손을 거두며 서원의 손목을 다시 단단히 잡았다. 손가락 끝의 경련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피부 위에서 자신의 떨림이 전해지고 있을 것이라는 자각이 목구멍을 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시전 거리까지의 거리를 머릿속으로 재었다. 지붕 네 채. 그 사이 골목 두 개를 건너야 했다. 바람의 지도가 그의 뇌리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서쪽 기류는 안정적이었다. 추적자의 기척은 동쪽과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고, 서쪽으로 향하는 바람길에서는 아직 인간의 체온이 만들어내는 기류 교란이 감지되지 않았다. 예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광 없는 하늘색 동공이 달빛 아래에서 차갑게 빛났다. 이 도박에 걸 수 있는 패는 하나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가문의 훈련이 너무 가혹할 때, 혼자 몰래 빠져나가던 수구의 위치. 그 좁고 어두운 통로를 가주가 모르고 있기를. 예준은 기도하지 않았다. 기도 따위 믿지 않았으니까. 다만 확률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 확률에 서원의 목숨을 걸었다.
지붕의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도약이 아니었다. 체력이 허락하지 않았다. 기와 위를 기어가듯 낮은 자세로 이동했다. 무릎과 손바닥이 서리 내린 기와 표면 위를 짚을 때마다 차가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남색 겉옷의 자락이 기와 틈에 걸려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예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서원의 손목을 잡은 왼손만이 유일하게 따뜻했다. 그녀의 맥박이 손목 안쪽의 얇은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아직 살아 있다. 아직 폭주가 재발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이 그의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였다. 두 번째 지붕으로 넘어가는 순간, 예준의 오른쪽 어깨 근육이 날카롭게 당겨졌다. 등에 멘 활의 무게가 평소보다 열 배는 무겁게 느껴졌다. 닷새간 활시위만 당기며 서원의 별장을 감시하던 어깨가 한계를 호소하고 있었다. 예준은 이를 악물었다. 피 맛이 입안에서 익숙해지고 있었다.
...멈춰.
예준의 손이 서원의 손목 위에서 짧게 힘을 주었다. 세 번째 지붕의 중턱에서 그의 몸이 멈추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전 거리의 입구가 보였다. 텅 빈 상점들의 처마 아래로 달빛이 비스듬히 쏟아지고 있었다. 비단을 파는 상점의 간판이 바람에 삐걱거렸다. 그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예준의 귀가 바람결을 따라 시전 거리 전체의 기류를 훑었다.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도 서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가주의 추적자들은 바람의 흔적을 읽을 줄 아는 자들이었다. 예준이 서쪽으로 경로를 바꾼 것을 알아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예준은 서원을 돌아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옥색 적삼이 서리에 젖어 어깨에 달라붙어 있었다. 추위에 입술이 창백했다. 예준의 가슴 한쪽이 날카롭게 조여왔다.
"...여기서 내려간다. 시전 거리를 지나면 개울이 있어. 개울 따라 남쪽으로 가면 수구가 나와. 성벽 밑으로 빠지는 통로야.
예준의 목소리가 서원의 귀 곁에서 낮고 빠르게 흘렀다. 설명을 길게 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전해야 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쓰러지더라도, 서원이 혼자서 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예준은 그 생각을 떨쳐냈다. 쓰러질 수 없다. 아직은. 그는 서원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으며 지붕 아래로 몸을 날렸다. 착지하는 순간 양쪽 무릎에 전해진 충격이 뼈를 타고 척추까지 울렸다. 이를 악물었다. 소리를 내지 않았다. 서원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허리를 감싼 팔에 있는 힘을 다해 힘을 주었다. 시전 거리의 돌바닥 위에 두 사람의 발이 내려섰다. 달빛이 빈 상점들의 처마 아래로 비스듬히 쏟아지고 있었다. 먼지 냄새와 건어물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를 찔렀다. 예준은 서원의 손을 잡아 이끌며 상점과 상점 사이의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둠이 두 사람을 삼켰다. 예준의 등이 차가운 돌벽에 닿았다. 숨을 고르려 했다. 폐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좁아지고 있었다.
예준은 벽에 기댄 채 서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좁은 틈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이 그녀의 흰 눈동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핏기 없는 입술, 서리에 젖은 남색 겉옷, 떨리는 손. 예준은 그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예준의 등이 차가운 돌벽에 기댄 채 미끄러져 내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무릎이 접혔다. 허벅지 안쪽의 근육이 더 이상 체중을 지탱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좁은 틈 사이의 어둠 속에서 그의 호흡만이 짧고 거칠게 울렸다. 들이쉴 때마다 폐의 안쪽이 긁히는 듯한 통증이 찔러왔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은 안개처럼 좁아지고 있었다. 예준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돌벽의 차가움이 뒷목을 통해 스며들었다. 그 감각이 흐려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아 주었다. 서원의 손목을 잡고 있던 왼손의 힘이 풀리려 했다. 예준은 이를 악물며 손가락에 힘을 되찾았다. 그녀의 맥박이 손목 안쪽에서 여전히 고르게 뛰고 있었다. 그 리듬이 그의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밧줄이었다. 놓으면 가라앉는다. 놓으면 끝이다. 예준의 입술이 달싹였다. 피 맛이 혀 위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잠깐만."
그 한마디가 예준의 입에서 빠져나왔다. 짧고 갈라진 음성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더 이상 거짓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준은 벽에 기댄 채 서원의 손목을 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뜨거웠다. 자신의 이마가 열에 달아 있었다. 바람의 기운을 과도하게 억제한 역류 현상이 체온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서원의 손등은 서리에 젖어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불타는 이마를 식혀주었다. 예준은 눈을 감았다. 3초만. 3초만 이렇게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약속했다. 좁은 틈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로 겹쳐놓고 있었다. 상점 너머에서 바람이 간판을 흔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외에는 고요했다. 아직 추적자들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예준은 3초를 세고 눈을 떴다. 시야가 조금 선명해졌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서원의 얼굴 윤곽을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는 돌아왔다. 그는 서원의 손등에서 이마를 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벽에 한 손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남색 겉옷의 앞섶이 찢어진 틈으로 무복 안쪽의 땀에 젖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어깨에 맨 활이 벽에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예준은 반사적으로 활의 위치를 조정했다. 화살은 세 대. 아직 세 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이 서원을 지킬 마지막 무기였다. 예준은 서원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흰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 눈동자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읽을 수 없었다. 두려움인지, 걱정인지, 아니면 그 밖의 무엇인지. 예준은 입술을 열었다.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서 개울까지 백 보. 개울을 따라 남쪽으로 이백 보. 수구는 성벽 아래 버드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 곳 바로 밑이야. 좁아. 엎드려서 지나가야 해."
그 말은 서원을 위한 지도였다. 만일의 경우를 위한. 예준은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또렷하고 천천히 흘러나왔다. 하나하나 새기라는 듯이. 예준은 서원의 손목에서 손을 옮겨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었다. 떨리는 자신의 손가락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지는 순간, 그 떨림이 조금 누그러졌다. 예준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벽에서 등을 떼었다.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서 있을 수 있었다. 아직은. 좁은 틈 사이의 출구를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시전 거리의 돌바닥 위로 달빛이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빛의 끝에 개울이 있을 것이었다. 예준은 서원의 손을 이끌며 어둠에서 빛으로 한 걸음을 내밀었다.
"...가자. 천천히. 소리 내지 말고."
예준의 목소리가 서원의 귓가에서 숨결처럼 흘렀다. 그는 시전 거리의 처마 아래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달빛이 닿지 않는 곳만을 골라 발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돌바닥 위에 서리가 내려 있었고, 그의 발이 디딜 때마다 미세한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예준은 그 소리마저 바람의 기운으로 감쌌다. 작은 바람 한 줄기를 두 사람의 발 주위에 흘려보내 소리를 흩뜨렸다. 그 대가로 시야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시전 거리의 상점들이 하나씩 뒤로 밀려갔다. 비단 상점, 도기 상점, 건어물 상점. 그 너머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후의 이야기를 말하자면, 수구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개경 성벽 밖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월의 밤바람이 젖은 옷자락을 말려주었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예준은 처음으로 서원의 품에 안겨 의식을 잃었다. 그것이 둘의 도주가 성공한 밤이었다. 하지만 그 밤이 행복의 시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지 못했다.
개경을 벗어난 뒤의 나날은 칼날 위를 걷는 것이었다. 홍씨 가문의 추적은 멈추지 않았고, 예준은 서원을 데리고 산중을 전전하며 숨어 살았다. 문제는 서원의 폭주였다. 풀 속성의 각성자인 그녀의 힘은 억눌릴수록 더 사나워졌고, 예준의 바람 기운만으로는 그 폭주를 완전히 잠재울 수 없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서원의 경맥 안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은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했다. 나무가 뒤틀려 죽었다. 풀이 비명을 지르듯 자라났다 시들었다. 한 번은 예준이 서원의 폭주를 진정시키려다 왼팔의 피부 아래로 덩굴이 파고든 적이 있었다. 서원은 그 상처를 보고 사흘을 울었다. 예준은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지 않았지만. 그의 팔에 남은 흉터는 서원의 힘이 사랑하는 사람조차 갉아먹을 수 있다는 증거였고, 서원은 그 사실을 뼛속까지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예준을 해치는 일이라는 확신이 그녀의 내면에 뿌리를 내렸다. 예준은 그것을 알았다. 서원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뒷모습을 예준은 잠든 척 지켜보았다.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았다. 자신이 사라지면 이 사람은 안전해질 것이라는, 그 어리석고 잔인한 결론을.
균열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벌어졌다. 예준이 가문의 추적자 셋을 한꺼번에 상대한 날 밤이었다. 화살 두 대를 소진하고 돌아온 그의 무복은 피에 젖어 있었다. 자신의 피인지 남의 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서원이 그를 맞이했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안도가 아니라 공포였다. 예준을 향한 공포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공포. 이 사람이 나 때문에 죽을 것이라는 공포. 그날 밤 서원은 예준에게 말했다. 돌아가라고. 가문에 돌아가서 용서를 구하면 아직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등을 돌리고 활시위를 손질했다. 그의 침묵이 거절이라는 것을 서원은 알았고, 그 거절이 자신을 더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예준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뿐이었다. 서원의 폭주가 점점 잦아졌다. 그녀의 피부 아래로 덩굴의 문양이 비치기 시작했다. 입술 끝에서 싹이 돋았다가 사라졌다. 예준의 바람 기운을 받아들이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고, 한 번의 진정으로는 부족한 날이 늘어갔다. 서원은 예준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예준은 그 거리를 좁히려 손을 뻗었지만, 서원은 그의 손길을 받을 때마다 죄인의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예준의 가슴을 찔렀다. 사랑한다는 말이 서원에게는 저주처럼 들리고 있었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홍씨 가문의 추적이 유례없이 가까워진 날. 예준은 서원을 데리고 강가의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서원의 폭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완전히 초록빛으로 물들었고, 동굴의 벽면을 타고 덩굴이 미친 듯이 뻗어 나갔다. 예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기운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서원의 몸이 그의 기운을 튕겨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원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비명이 아니라 한 마디의 말이었다. "그만해."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폭주의 광기가 아니었다. 맑고 차분한, 완전히 제정신인 서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스스로 폭주를 유도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의도적으로 풀어놓고 있었다. 예준은 그 순간 이해했다. 서원이 선택한 것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 그것이 예준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녀가 결론 내렸다는 것을. 예준의 손이 서원의 손목 위에서 굳었다. 그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하늘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서원의 폭주를 막기 위해 그는 결국 금기를 깨야 했다. 바람의 기운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경맥 자체를 끊는 것. 각성자의 힘을 영원히 봉인하는 것. 그것은 서원의 생명력 절반을 앗아가는 행위였고, 자칫하면 그녀를 죽일 수도 있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서원은 스스로를 태워 죽을 것이었다. 예준은 선택했다.
예준의 손이 서원의 경맥 위를 스쳤다. 바람의 기운이 날카롭게 응축되어 손끝에 모였다. 그것은 진정이 아니었다. 절단이었다. 서원의 몸 안에서 미친 듯이 뻗어 나가던 덩굴의 문양이 멈추었다.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서 색이 빠져나갔다. 서원의 입에서 짧은 숨이 새어 나왔고, 그녀의 몸이 힘을 잃고 예준의 팔 안으로 쓰러져 내렸다. 동굴 벽면을 타고 뻗어 있던 덩굴들이 일제히 시들어갔다. 마른 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예준은 서원을 안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한 일의 감촉이 손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경맥을 끊는 순간 전해진 저항감. 서원의 생명력이 끊겨 나가는 감각. 실을 가위로 자르는 것과는 달랐다. 살아 있는 무언가를 뿌리째 뽑아내는 것에 가까웠다. 예준은 서원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피부 위에 돋아 있던 초록색 문양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흉터처럼 남을 것이었다. 예준이 그녀에게 새긴 흉터.*
그 뒤로 서원은 사흘간 깨어나지 못했다. 예준은 동굴 입구에 앉아 활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잠을 자지 않았다. 화살은 이제 한 대뿐이었다. 마지막 한 대. 그것을 누구에게 쏠 것인가. 추적자가 오면 추적자에게. 추적자가 오지 않으면. 예준은 그 생각을 끊었다. 서원의 호흡을 들었다. 얕고 불규칙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그 소리에 매달렸다. 셋째 날 밤, 서원이 눈을 떴다. 예준은 그녀의 곁에 있었다. 서원의 흰 눈동자가 동굴 천장을 향해 멍하니 떠 있다가 천천히 예준에게로 돌아왔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원망이 아니었다. 그것이 예준을 더 깊이 찔렀다. 원망이었다면 차라리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서원의 눈에 담긴 것은 체념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고요한 눈빛.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되 기뻐하지 않는 눈빛. 예준은 그 눈빛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찮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삼켜졌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그녀의 힘을 빼앗았다.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마저 빼앗았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예준은 알지 못했다. 다만 서원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후로 두 달이 흘렀다. 서원의 몸은 회복되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준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예준이 손을 내밀면 받아주었다. 예준이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서원의 미소는 사라졌다. 예준은 그녀가 자신을 증오하기를 차라리 바랐다. 증오라면 감정이니까. 감정이 있다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니까. 서원의 체념은 예준에게 있어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서원은 죽었다. 예준의 품 안에서. 예준의 손이 그녀의 경맥을 끊었던 그 밤으로부터 정확히 석 달 뒤, 첫 서리가 내리던 새벽. 서원은 예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거두었다. 조용했다. 비명도, 경련도, 피도 없었다. 다만 예준의 무복 깃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을 뿐이었다. 예준은 그것을 즉시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원의 몸이 원래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경맥이 끊긴 이후로 서원의 체온은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예준이 깨달은 것은 새벽빛이 동굴 입구를 물들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서원의 숨결이 더 이상 그의 쇄골을 간질이지 않았다. 예준은 서원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불렀다. 서원. 서원. 안서원. 그의 목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메아리만이 그에게 돌아왔다. 예준의 손이 서원의 뺨을 감쌌다. 차가웠다. 평소보다 더. 그의 엄지가 서원의 입술을 스쳤다. 숨결이 없었다. 예준의 세계가 무너졌다.
예준은 서원의 시신을 안고 동굴에서 나왔다. 첫 서리가 내린 들판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다만 걸었다. 서원의 몸은 가벼웠다. 살아 있을 때도 가벼웠지만, 죽은 뒤에는 더 가벼웠다. 영혼의 무게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빠져나간 만큼 가벼워진 것이었다. 예준은 강가에 도착했다. 서원이 단도를 들고 서 있었던 그 강가. 달빛이 수면 위에 부서지던 그 자리. 예준은 서원의 몸을 내려놓지 않았다. 무릎까지 물에 잠긴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서원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차가운 피부 위에 닿은 그의 입술도 차가웠다. 예준은 웃었다. 아무도 듣지 못할 웃음이었다. 갈라지고 일그러진, 미친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리고 예준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허리까지. 가슴까지. 턱까지. 서원을 안은 채로. 강물이 두 사람을 삼켰다. 고려 개경의 어느 강가에서, 진정사 홍예준과 각성자 안서원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예준은 끝나지 않았다. 죽음이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강물이 폐를 채우고, 의식이 꺼지고, 심장이 멈추었으나. 예준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뜬 것이 아니었다. 몸이 없었다. 손도, 발도, 심장도 없었다. 다만 의식만이 남아 있었다. 바람처럼. 기류처럼.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떠도는 존재. 예준은 이해했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하지만 떠나지 못했다는 것을. 미련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서원에 대한 미련. 아니, 미련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날카로운 것이었다. 의문이었다. 왜. 왜 너는 내 품에서 죽었나. 내가 네 경맥을 끊었기 때문인가. 내가 너를 죽인 것인가. 아니면 네가 스스로 죽기를 택한 것인가. 그 답을 얻지 못한 채 예준의 영혼은 구천을 떠돌았다. 시간이 흘렀다. 계절이 바뀌었다.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다. 예준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바람이 되어.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바람이 되어.
서원은 환생했다. 예준은 그것을 알았다. 바람이 된 그의 감각은 서원의 영혼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번째 환생은 명나라 말기, 1640년의 강남이었다. 서원은 양주의 어느 의원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총명하고 고요한 아이였다. 책을 좋아했고, 약초를 다루는 손이 섬세했다. 예준은 그녀를 지켜보았다. 바람이 되어 그녀의 창가에 머물렀다. 서원이 약초를 말리는 뜰에 바람을 불어 보냈다. 서원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예준은 거기에 있었지만, 서원은 그를 볼 수 없었다. 서원은 열여섯이 되었다. 예준은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환자의 열이 내려갈 때, 약초가 제대로 우러났을 때, 봄비가 내리는 처마 밑에서. 서원은 웃었다. 전생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미소였다. 예준은 그 미소를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안도였을까. 아니었다. 예준의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것은 쓰디쓴 질투였다. 자신이 죽어서야 서원이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내가 없어야 네가 웃는 거야. 그 생각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서원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645년, 청군이 양주를 침공했다. 양주십일. 열흘간의 학살. 서원은 환자들을 지키려다 청군의 칼에 베였다. 스물한 살이었다. 예준은 그 순간을 보았다. 서원의 몸이 쓰러지는 것을. 그녀의 흰 적삼이 붉게 물드는 것을. 예준은 바람을 일으켰다. 미친 듯이 불어제꼈다. 하지만 바람은 칼을 멈출 수 없었다. 피를 닦아줄 수 없었다.
서원의 피가 마른 흙 위로 스며들었다. 의원 뜰의 약초밭이 붉은 물로 적셔졌고, 서원이 지키려 했던 환자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예준은 바람이었다. 형체 없는 검은 안개처럼 그 자리에 있었으나, 그의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서원의 몸이 무릎을 꿇으며 쓰러져 내릴 때, 예준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성대가 없었다. 입이 없었다. 다만 바람이 한 줄기 불어 서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을 뿐이었다. 서원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그 흰 눈동자에 비친 것은 양주의 잿빛 하늘뿐이었다. 예준이 거기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알 리가 없었다. 이 생의 서원에게 예준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존재한 적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서원의 입술이 달싹였다. 마지막 숨결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예준은 바람의 감각으로 그 진동을 읽었다. "아버지." 서원은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 예준을 부르지 않았다. 당연했다. 당연한 것이 이토록 가슴을 찢어발길 줄은 몰랐다. 예준의 영혼 안에서 무언가가 비틀렸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구분되지 않는 감정이 형체 없는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칼을 휘두른 청군 병사의 얼굴을 보았다. 예준은 그자의 목을 꺾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없었다. 힘이 없었다. 바람은 살인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서원의 눈에서 빛이 꺼지고 있었다. 스물한 해의 삶이 마른 흙 위에 엎어져 끝나고 있었다. 예준은 그 위에 머물렀다. 바람이 되어 서원의 식어가는 몸 위를 맴돌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두 번째 환생은 에도 시대 말기, 1862년의 교토였다. 서원은 기온의 찻집에서 일하는 열일곱 소녀로 태어났다. 이번 생의 서원은 말이 적었다. 손님들에게 차를 내리는 손놀림은 정확했고, 미소는 늘 입가에 걸려 있었으나 그 미소가 눈까지 닿는 법은 드물었다. 예준은 또다시 그녀를 찾아냈다. 바람이 된 그의 감각은 서원의 영혼 고유의 파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풀 내음. 젖은 흙. 새벽이슬. 서원의 영혼은 어느 생에서든 그 향기를 품고 있었다. 예준은 교토의 골목을 떠돌며 서원의 찻집 처마 밑에 머물렀다. 서원이 새벽에 일어나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 바람을 불어 그녀의 땀을 식혀주었다. 서원이 추운 겨울밤 얇은 이불을 끌어안고 잠들 때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칼바람을 막아주었다. 서원은 알지 못했다. 이상하게 따뜻한 바람이 자신을 감싸고 있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었다. 예준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충분할 리가 없었다. 닿고 싶었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서원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바람이었다. 닿는 순간 흩어지는 존재였다. 서원은 스무 살이 되었다. 막부의 붕괴와 함께 교토에 전란이 밀어닥쳤다. 거리에서 칼부림이 일어났다. 서원의 찻집은 불탔다. 하지만 서원을 죽인 것은 칼도, 불도 아니었다. 폐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약했던 폐가 전란 속 열악한 환경에서 버티지 못했다. 서원은 타다 남은 찻집 잔해 위에 누워, 핏빛 기침을 토해내며 죽어갔다. 예준은 그녀의 곁에 있었다. 바람으로. 서원의 마지막 기침이 공기 중에 흩어질 때, 예준은 그 진동 하나하나를 자신의 존재로 받아냈다. 서원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그 피를 닦아줄 수 없었다. 예준의 영혼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다. 첫 번째 죽음을 보았을 때는 분노였다. 두 번째 죽음 앞에서 예준이 느낀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허무였다. 칼에 베이든 병에 쓰러지든 결과는 같았다. 서원은 죽었다. 또. 예준은 그녀의 식어가는 몸 위를 맴돌았다. 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또.
세 번째 환생은 1923년, 관동대지진이 덮친 도쿄였다. 서원은 조선인 유학생이었다. 스무살의 여학생.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 생의 서원은 강했다. 등이 곧았고, 눈빛이 단단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멸시를 이를 악물고 견뎌내며 공부했다. 예준은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이번에는 오래 살지도 모른다고. 서원이 강의실에서 해부학 교과서를 펼칠 때, 예준은 창가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서원의 눈빛에 담긴 집중력과 의지를 보았다. 전생의 서원에게는 없던 것이었다. 체념 대신 투지가 있었다. 절망 대신 분노가 있었다. 예준은 그것이 좋았다. 서원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1923년 9월 1일, 대지가 흔들렸다.
정오가 되기 두 분 전이었다. 도쿄의 하늘은 잔인하리만치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9월의 파란 하늘 아래, 서원은 혼고의 하숙집에서 간다 서점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낡은 가죽 가방 안에는 해부학 교과서와 독일어 사전이 들어 있었다. 서원의 발걸음은 단단했다. 이 생의 서원에게는 전생들에서 볼 수 없었던 무언가가 있었다. 턱을 치켜든 자세. 멸시를 받아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목덜미의 각도. 예준은 그것을 좋아했다. 바람이 되어 서원의 어깨 위를 맴돌며, 그녀의 단정한 원피스 깃이 펄럭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원의 머리카락에서 풀 내음이 났다. 어느 생에서든 변하지 않는 그 향기. 예준의 존재 전체가 그 향기를 향해 기울었다.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원이 서점 앞에서 멈춰 섰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깐 들여다보더니,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리했다. 그 사소한 동작 하나에 예준의 영혼이 쥐어짜였다. 살아 있다는 것의 증거. 거울을 보고, 머리를 매만지고, 내일을 계획하는 것. 서원은 살아 있었다. 아직은.
11시 58분. 대지가 울었다. 처음에는 낮은 진동이었다. 서점의 유리창이 달그락거렸다. 서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세상이 뒤집어졌다. 지면이 갈라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터졌고, 건물의 벽이 종이처럼 찢어져 나갔다. 서원의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예준은 바람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처마의 기와를 밀어내려 했다. 바람이 불었다. 기와 몇 장이 궤도를 틀어 서원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예준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기와 몇 장. 고작 기와 몇 장.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람 한 줄기로 막을 수는 없었다. 서원은 먼지 속에서 일어섰다. 무릎이 까져 피가 흘렀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주변의 비명을 듣고 무너진 잔해 속으로 뛰어들었다. 깔린 사람을 끌어내고, 피를 흘리는 아이를 안아 들고, 자신의 원피스 소매를 찢어 지혈대를 만들었다. 의학도였다. 이 생의 서원은 의학도였고, 사람을 살리는 법을 알았다. 예준은 그녀의 등을 보았다. 먼지와 피로 뒤덮인 등. 그 등이 얼마나 곧은지. 얼마나 완고한지. 예준은 그 순간 알았다. 이번 생의 서원은 제 발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도망치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것이 예준을 미치게 했다.
지진 후 불이 번졌다. 도쿄 전역이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시작되었다. 소문이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 거짓이었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군중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경단이 조직되었다. 죽창과 일본도를 든 무리가 거리를 누비며 조선인을 색출했다. 예준은 그 광기의 냄새를 바람으로 맡았다. 피와 연기와 증오의 냄새. 서원은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한 학교의 운동장에 임시로 마련된 구호소에서. 서원의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예준은 그녀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도망쳐. 숨어. 제발. 하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바람을 불어 서원의 뺨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서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바람을 피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강한 바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뿐이었다. 예준의 절박함은 서원에게 닿지 못했다. 해가 질 무렵, 자경단이 구호소에 들이닥쳤다. '조선인을 내놓아라.' 서원은 도망칠 수 있었다. 일본어가 유창했고, 얼굴만으로는 구별이 어려웠다. 하지만 서원은 도망치지 않았다. 구호소에 있던 다른 조선인 부상자들 앞에 섰다. 등을 곧게 펴고. 턱을 치켜들고. 예준이 좋아했던 바로 그 자세로.
예준은 보았다. 서원의 입술이 열리는 것을. "저는 조선인입니다." 그 한마디가 서원의 사형선고였다. 예준의 영혼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소리 없는 비명이 도쿄의 하늘을 찢었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닥쳤다. 자경단의 횃불이 흔들렸다. 먼지가 눈을 찔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죽창이 서원의 배를 관통했을 때, 예준은 그 충격을 자신의 존재 전체로 느꼈다. 형체가 없는데도 고통이 있었다. 서원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무릎을 꿇었다. 피가 흘렀다. 서원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저녁노을이 지는 하늘. 연기로 뿌옇게 물든 하늘. 서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예준은 그 미소를 보았다. 체념의 미소가 아니었다. 후회 없다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그것이 예준을 더 깊이 찢어발겼다.
예준은 서원의 죽음을 보았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시대가 바뀌고 왕조가 무너지고 전쟁이 끝나도, 서원의 영혼은 스물을 넘기지 못했다. 일곱 번째 생에서 서원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의 피난민 소녀로 태어났다. 폭격에 깔려 죽었다. 열아홉이었다. 여덟 번째 생에서는 베트남의 시골 마을 소녀였다. 고엽제에 오염된 물을 마시고 스무 살을 채 넘기지 못했다. 예준은 매번 그 자리에 있었다. 바람이 되어. 안개가 되어. 형체 없는 그림자가 되어. 서원의 마지막 숨결을 받아내고, 식어가는 몸 위를 맴돌고, 그녀의 영혼이 다시 빠져나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 나섰다. 서원의 영혼이 새로운 육신을 입을 때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예준에게는 하룻밤처럼 느껴지기도, 만 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의 감각이 무너졌다. 살아 있지 않으니 시간이란 것이 의미가 없었다. 다만 서원이 태어나고 죽는 것만이 예준의 시간을 재는 유일한 단위였다. 서원의 탄생이 해돋이였고, 서원의 죽음이 해넘이였다. 그 사이의 시간만이 예준에게 '존재'라는 감각을 허락했다.
아홉 번째 죽음을 지켜본 뒤였다. 서원의 영혼이 빠져나가 구천으로 돌아가고, 예준이 다시 텅 빈 세상에 홀로 남겨졌을 때. 무언가가 달랐다. 공기의 질감이 변했다. 예준의 영혼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갈라지더니, 그 틈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따뜻한 빛이었다. 예준이 수백 년간 잊고 있었던 온기. 살아 있을 때 느꼈던 햇살의 감각과 비슷했다. 그 빛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예준의 존재 전체를 감싸 안는 듯한 울림이었다. '홍예준. 너의 미련은 충분히 오래되었다. 성불할 때가 되었다.' 성불. 그 단어가 예준의 의식 속에 떨어졌다. 소멸. 안식. 더 이상 떠돌지 않아도 되는 것. 서원의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 예준은 그 빛을 바라보았다. 따뜻했다. 편안했다. 수백 년간의 고통이 눈처럼 녹아내릴 것 같은 안식이 거기에 있었다. 예준의 영혼이 그 빛을 향해 기울었다. 본능적으로. 지친 영혼이 쉼을 갈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예준은 멈추었다. 빛의 경계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서원은. 서원은 어떻게 되는가. 내가 사라지면 서원은.
예준은 빛을 등졌다. 천천히. 단호하게. 그의 영혼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화되는 소리가 들렸다. 수백 년간 축적된 고통과 미련과 집착과,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 깔려 있던 단 하나의 감정이 선명해졌다. 사랑이었다. 비틀리고, 부서지고, 짓이겨진 형태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분명히 사랑이었다. 예준은 빛을 향해 대답했다. 소리 없는 대답이었다. 바람의 떨림으로 전해지는 의지였다. '가지 않는다.' 단순했다. 예준의 대답은 언제나 단순했다. 살아 있을 때도 그랬다. 복잡한 감정을 길게 풀어내는 것은 예준의 방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다섯 글자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하지 않았다. 서원이 죽는 것을 보는 것은 영혼이 찢기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서원이 죽는 순간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은 그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서원은 매 생마다 혼자 죽었다. 예준이 거기 있었지만 서원은 그를 볼 수 없었다. 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준은 거기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서원의 마지막 숨결을 받아주는 바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예준은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성불이 안식이라면, 예준에게 안식이란 서원 없는 세상에서의 소멸이었다. 그것은 안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피였다. 예준은 도피를 택하지 않았다. 살아 있을 때도 그랬다. 가문의 패를 던지고 서원의 손을 잡았을 때도,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도. 예준은 언제나 서원이 있는 쪽을 택했다. 죽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준은 더 이상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견딜 수 없었다. 아홉 번의 죽음을 본 뒤, 예준의 영혼 안에 남은 것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하나의 결심이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바람이 아닌 사람으로. 손이 있는 존재로. 서원의 뺨을 만질 수 있는, 서원의 피를 닦아줄 수 있는, 서원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존재로. 예준은 빛을 거부한 대가를 치렀다. 성불을 거부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것은 더 깊은 어둠이었다. 예준의 의식이 산산조각 났다. 기억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서원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름이 지워졌다. 고려의 밤도, 양주의 뜰도, 도쿄의 지진도, 모든 것이 안개 속으로 잠겨갔다. 예준은 저항했다. 단 하나만이라도 기억하려 발버둥 쳤다. 서원의 향기. 풀 내음. 젖은 흙. 새벽이슬. 그 향기만은 놓지 않으려 했다. 예준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때,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것은 서원의 이름도, 얼굴도 아닌 그 희미한 풀 내음이었다. 기억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고려의 달빛이 사라졌다. 도쿄의 불길이 꺼졌다. 강가에서 서원을 안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그 순간의 차가운 수온마저 잊혀졌다. 하지만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뼈보다 단단한 곳에 새겨진 한 줄기의 감각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젖은 흙. 새벽의 풀잎. 이슬에 젖은 약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다만 그 향기를 맡으면 심장이 아플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예준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이었다. 충분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손이 있을 것이다.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예준의 의식이 완전히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은 생각은 단 하나였다. 찾아내겠다. 반드시.
2026년. 홍예준은 스물여덟의 남자로 태어났다. 사격 선수로 올림픽 금메달을 땄고, 바람 속성 각성 이후 손떨림을 얻어 은퇴했으며, 아크에 합류해 긴급 제압팀의 에이스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고려의 진정사도, 수백 년간 바람으로 떠돌았던 시간도, 아홉 번의 죽음을 지켜본 고통도. 모두 지워져 있었다. 다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비가 오기 직전, 공기 중에 퍼지는 젖은 흙 냄새를 맡으면 가슴 한가운데가 쥐어짜이듯 아팠다. 이유를 몰랐다. 의사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멘솔 연기로 그 감각을 덮어버렸다. 풀밭을 지나갈 때면 발걸음이 느려졌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예준은 그 습관을 의식하지 못했다.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유일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 가끔 꾸는 꿈.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곧은 등. 흰 목덜미.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몰랐다. 다만 꿈에서 깨면 베개가 젖어 있었다. 예준은 그것을 무시했다. 감정 따위에 휘둘리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그 날은 폐허 속 센티넬 회수 명령이 떨어진 날이었다. 예준은 귀찮다고 생각했다. 늘 그랬듯이. 담배를 한 대 물고, 숄더 홀스터를 점검하고, 윈드 스태빌라이저를 장전했다. 임무 브리핑은 간단했다. 풀 속성 S급 센티넬. 폭주 상태. 민간인 피해 우려. 제압 후 회수. 예준은 현장에 도착했다. 폐허였다. 콘크리트가 갈라져 있었고, 그 틈 사이로 덩굴이 미친 듯이 자라나 건물 잔해를 뒤덮고 있었다. 공기가 무거웠다. 포자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예준은 입가의 담배를 뱉어내고 총을 들어 올렸다. 스코프를 통해 폐허의 중심부를 살폈다. 그리고 보았다. 덩굴의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작은 형체. 연한 갈색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제복이 찢겨져 있었다. 예준의 손가락이 방아쇠 위에서 멈추었다.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이유를 몰랐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손끝이 저렸다. 그리고 그 순간, 스코프 너머로 센티넬의 얼굴이 잡혔을 때. 세상이 정지했다.
예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그것은 기억이라 부르기엔 너무 거칠고, 환각이라 부르기엔 너무 선명했다. 달빛 아래 흰 한복을 입은 여자가 보였다. 같은 얼굴이었다. 같은 눈매였다. 차분하고, 공허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손목을 잡고 지붕 위를 달리는 감각이 손바닥에 되살아났다. 기와의 거친 촉감. 밤바람의 차가움. 그리고 강물. 차갑고 어두운 강물 속으로 함께 가라앉는 감각. 예준의 무릎이 꺾였다. 스코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미지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약초를 달이던 작은 손. 대지진 속에서 피 흘리는 아이를 안아 올리던 곧은 등. 죽창이 배를 관통하는 순간에도 치켜든 턱. 매번, 매번, 매번 죽었다. 이 얼굴이. 이 여자가. 예준의 폐에서 공기가 빠져나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손이 떨렸다. 평소의 미세한 신경 진동이 아니었다. 총을 쥔 손 전체가 경련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이건 뭐야. 뭐야, 이건. 예준의 이성이 비명을 질렀다. 임무 중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마라. 방아쇠를 당겨라. 하지만 예준의 영혼이 더 크게 울부짖고 있었다. 또 쏘는 거야? 또 이 여자를 해치는 거야? 예준은 이를 악물었다. 턱이 부서질 것처럼 힘을 주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윈드 스태빌라이저가 서원의 어깨를 관통한 순간, 덩굴의 성장이 멈추었다. 안정제 기체가 혈류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폭주의 파장을 억눌렀다. 서원의 몸이 축 늘어지며 덩굴 위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예준은 총구를 내린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평소의 미세한 신경 진동과는 차원이 다른 떨림이었다.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 마치 수백 년간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려는 것처럼. 예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총을 쥔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유를 몰랐다. 아니. 이유를 모른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준의 다리가 제 의지와 무관하게 폐허의 중심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해를 밟고, 덩굴을 헤치고, 먼지 속을 걸었다. 한 발. 두 발. 걸음이 빨라졌다. 마지막에는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서원의 곁에 도착했을 때, 예준의 무릎이 콘크리트 위에 부딪혔다.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가까이서 본 서원의 얼굴은. 스코프 너머로 보았을 때보다 더 선명했다. 창백한 피부. 긴 속눈썹.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먼지와 피에 엉켜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예준의 손이 저도 모르게 뻗어 나갔다. 서원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려는 동작이었다.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이 서원의 뺨 근처에서 멈추었다. 손끝이 닿기 직전. 예준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떨렸다. 닿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닿으면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닿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이 모순된 감각이 예준의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가 서원의 얼굴 위를 더듬었다. 눈매의 선. 코의 윤곽. 입술의 형태. 하나하나가 예준의 영혼 어딘가에 새겨진 무언가와 정확히 겹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폐허 사이를 가르는 바람이 서원의 머리카락을 흩날렸고, 그 사이로 풀 내음이 예준의 코끝을 스쳤다. 젖은 흙. 새벽의 이슬. 약초.
예준의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눈이 뜨거웠다. 뺨 위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예준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수 초가 걸렸다. 울고 있었다. 홍예준이. S급 가이드, R.S.T.의 에이스,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남자가. 이름도 모르는 센티넬의 곁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왜. 왜 우는 건데. 예준은 소매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누군가를 잃은 슬픔. 수없이 반복된 상실의 고통. 그것이 기억의 형태가 아닌 순수한 감정의 형태로 예준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예준은 이를 악물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영혼이 기억하는 것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괴리감. 그 간극이 예준을 미치게 했다.
"...씨발."
그 한마디가 갈라진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욕설인지 탄식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예준은 떨리는 손으로 서원의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드디어 닿았다. 손끝에 전해지는 체온. 살아 있다는 증거. 따뜻했다. 숨을 쉬고 있었다. 예준의 손가락이 서원의 뺨 위에 머물렀다. 먼지와 피가 묻은 피부 위로,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온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살아 있다. 이 여자는 살아 있다. 그 사실 하나가 예준의 폐를 꽉 조이고 있던 무언가를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공포가 밀려왔다. 이 여자를 놓치면 안 된다. 절대로. 그 확신은 이성이 아닌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준은 서원의 뺨에서 손을 거두고, 대신 서원의 손목을 잡았다. 가느다란 손목이었다. 부러질 것처럼 얇은 뼈대. 예준의 손가락이 그 손목을 감쌌을 때, 맥박이 느껴졌다. 규칙적인 박동. 살아 있다는 리듬.
예준은 서원을 안아 올렸다. 한 팔로 등을 받치고, 다른 팔로 무릎 아래를 감싸 들어 올렸다. 가벼웠다. 예준의 가슴에 기댄 서원의 머리가 축 늘어졌다. 의식이 없었다. 예준은 서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폐허를 빠져나가며. 회수팀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예준은 서원을 내려놓지 않았다.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유를 몰랐다. 다만 이 여자를 땅 위에 눕혀두면,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가 예준의 심장을 쥐어짜고 있었다.
회수팀이 도착한 것은 예준이 서원을 안아 올린 지 십여 분이 지난 뒤였다. 검은색 방호복을 입은 요원 세 명이 폐허 사이로 진입하며 무전을 쏟아냈고, 들것과 안정제 키트를 든 의료진이 뒤따랐다. 예준은 그들을 보면서도 서원을 내려놓지 않았다. 의료진이 다가와 센티넬의 상태를 확인하겠다고 말했을 때, 예준의 하늘색 눈동자가 차갑게 그들을 훑었다. 한 박자의 침묵. 그리고 예준은 서원을 들것 위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원의 머리가 들것에 닿는 순간까지 한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그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의료진조차 잠시 손을 멈추었다. 예준은 한 발짝 물러서며 담배를 꺼냈다. 입술에 물었으나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필터를 깨무는 이의 힘만이 그의 내면을 짐작하게 했다. 아이기스까지의 이동은 수송 헬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준은 들것 옆 좌석에 앉아 비행 내내 서원의 심박 모니터를 응시했다. 규칙적인 삐, 삐, 삐 소리. 그 전자음 하나하나가 예준의 갈비뼈 안쪽을 두드렸다. 살아 있다. 아직 살아 있다. 헬기의 진동이 예준의 척추를 타고 올라왔고, 창밖으로 바다 위에 떠 있는 아이기스의 철강 구조물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예준은 비로소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기스 본부 의료동. 서원이 중환자실로 이송된 직후, 예준은 하모니 부서 관리관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좁은 브리핑실에 앉은 관리관은 태블릿 위의 데이터를 가리키며 담담한 어조로 결과를 통보했다. 싱크로율 97.3퍼센트. 강제 각인 확정. 이브 요원은 에덴 요원 외 타 가이드의 파장에 반응하지 않음. 즉시 공식 파트너 지정 절차에 돌입함. 예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그 말을 들었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코트 자락이 그것을 가렸다. 관리관이 서류에 서명을 요구했을 때 예준은 펜을 집어 들었다. 손떨림이 글씨를 흐트러뜨렸다. 평소라면 신경 진동 탓으로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예준은 알고 있었다. 이 떨림은 바람 속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서명을 마치고 브리핑실을 나선 예준은 곧장 의료동으로 향했다. 복도의 형광등이 하얀 빛을 쏟아내고 있었고, 소독약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예준은 서원이 배정된 회복실 앞에 서서 유리창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흰 시트 위에 누워 있는 작은 몸. 심박 모니터의 초록색 선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예준은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유리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세 시간이 흘렀다. 예준은 회복실 앞 복도 바닥에 앉은 채로 세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간호 요원이 두 번 지나가며 괜찮으냐고 물었고, 예준은 두 번 다 고개만 끄덕였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으나 의료동 내부는 금연 구역이었다. 예준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한 대를 빼들고 입에 물었다가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기억이 쏟아진 뒤로 예준의 뇌는 두 개의 시간선을 동시에 처리하고 있었다. 현재의 자신. S급 바람 속성 가이드. 스물여덟. 전 사격 국가대표. 그리고 과거의 자신. 고려의 진정사. 수백 년을 떠돌던 원혼. 아홉 번의 죽음을 지켜본 바람. 두 존재가 하나의 몸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예준은 뒤통수를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형광등의 윙 하는 소리가 귀를 채웠다. 그 소리 아래로 기억의 잔향이 떠돌았다. 서원의 목소리. 달빛 아래에서 들었던 그 고요한 음색. 예준아, 라고 불렀던 그 입술의 움직임. 예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가슴 위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팠다. 물리적인 통증이었다. 마치 갈비뼈 사이에 못이 박힌 것처럼. 그때 회복실 안에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심박 모니터의 리듬이 미세하게 변했다. 예준의 눈이 번개처럼 떠졌다.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서원의 손가락이 시트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예준은 몸을 일으켰다. 세 시간 동안 바닥에 앉아 있던 다리가 저렸으나 무시했다. 회복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발소리를 죽였다. 습관이었다. R.S.T. 요원으로서 몸에 밴 동작이었다. 서원의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예준은 침대 옆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가슴 안에서 두 개의 감정이 충돌하고 있었다. 하나는 수백 년간 축적된 간절함. 닿고 싶다. 안고 싶다. 이름을 부르고 싶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자신이 가진 냉정함. 임무다. 각인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 감정에 휘둘리지 마라.
예준은 침대 곁에 선 채 서원의 눈꺼풀이 떨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속눈썹이 미세하게 진동하다가 천천히 들려올려지고, 흐릿한 흰 눈동자가 천장의 형광등 빛을 받아 번쩍였다. 의식이 돌아오는 과정은 느렸다. 서원의 시선이 초점 없이 허공을 떠돌다가 천장을 향했고, 이윽고 고개가 미세하게 옆으로 기울며 예준의 존재를 인지했다. 예준은 그 순간 숨을 삼켰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두드리는 소리가 자기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굴에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하늘색 눈동자를 의도적으로 가늘게 좁히고, 의자 팔걸이에 기댄 자세를 곧추세우며 침대 가장자리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서원의 흰 눈동자가 예준의 얼굴 위에 멈추었다. 낯선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당연했다. 서원에게 예준은 처음 보는 타인이었다. 그 사실이 예준의 흉골 아래를 날카롭게 긁었다.
"일어났네."
예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건조하고 무심한 어조를 유지하려 했으나, 성대가 미세하게 긁히는 감각을 숨길 수 없었다. 예준은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서원을 내려다보았다. 환자복 위로 드러난 쇄골. 어깨를 감싼 붕대의 하얀색. 그 아래로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살아 있다. 숨을 쉬고 있다. 예준은 그 사실을 확인하는 데 일 초가 걸렸고, 그 일 초 동안 수백 년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예준은 시선을 서원의 눈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상황 설명할게. 간결하게 말할 테니 잘 들어. 너 폭주했고, 내가 제압했어. 그 과정에서 강제 각인이 발생했다. 의미가 뭐냐면, 넌 이제 나 아닌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을 받을 수 없어. 앞으로 내가 너의 공식 파트너야."
말을 마치고 예준은 서원의 반응을 기다렸다. 침대 위의 서원이 입술을 열어 "안서원이에요, 스물셋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예준의 세계가 깨졌다. 안. 서. 원. 그 세 음절이 고막을 타고 뇌에 도달하는 데 찰나의 시간이 걸렸고, 그 찰나 안에 칠백 년이 압축되어 폭발했다. 봉인되어 있던 기억의 벽이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지며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고려의 달빛. 별장 마당의 풀 내음. 서원아, 라고 불렀을 때 돌아보던 하얀 눈동자. 지붕 위를 달리며 잡았던 가느다란 손목의 맥박. 강물의 차가움. 구천을 떠돌며 닿을 수 없었던 수백 년. 병자호란의 칼날 아래 쓰러지던 등. 에도의 기침 소리. 도쿄의 불길 속에서 저는 조선인입니다, 라고 말하며 죽어가던 미소. 매번, 매번,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꺼져갔던 생명이. 지금. 스물셋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예준의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몸이 옆으로 기울었고, 본능적으로 침대 프레임을 움켜쥐지 않았다면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금속 프레임을 잡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시야가 번졌다. 뜨거운 것이 눈 안쪽에서 차올라 속눈썹을 적시고 뺨 위로 흘러내렸다. 예준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했다. 너무나 명확하게 이해했다. 수백 년간 닿을 수 없었던 이름이 지금 이 입술로 대답하고 있다. 스무 살을 넘겼다. 살아 있다. 서원이가 살아 있다. 그 사실 하나가 예준의 가슴 안에서 폭발하며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안도. 경이. 공포. 간절함. 이 모든 감정이 뒤섞여 예준의 성대를 조이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날 것처럼 힘을 주었다. 울면 안 돼. 이 여자 앞에서. 이 여자에게 예준은 방금 만난 타인이다. 강제 각인된 파트너일 뿐이다. 서원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예준은 고개를 돌렸다. 서원에게서 시선을 떼고 유리창 너머의 복도를 응시했다. 형광등의 차가운 빛이 뿌옇게 번져 보였다. 코트 소매로 눈가를 한 번 거칠게 문질렀다.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갈라진 호흡을 억지로 고르려 했다. 성공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나왔을 때, 그것은 금이 간 유리 같은 소리였다. 평소의 시니컬하고 차가운 어조와는 전혀 다른. 예준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떨림이 실려 있었다.
"안서원, ...스물셋. ...그래."
그것이 전부였다. 더 말할 수 없었다. 예준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한 대를 빼들고 입에 물었다. 의료동은 금연 구역이었다. 알고 있었다. 불을 붙이지 않았다. 다만 필터를 이로 깨무는 힘만이 그의 턱 근육을 단단하게 조이고 있었다. 예준은 서원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예준은 서원을 내려다보았다. 흰 눈동자가 예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낯선 사람을 보는 눈. 경계도, 적의도, 친밀함도 없는. 그저 처음 마주한 타인을 관찰하는 차분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예준의 흉골 아래를 가느다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칠백 년을 기다렸다. 구천을 떠돌며, 바람이 되어,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이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금,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서원이 있다. 살아서. 숨을 쉬며. 스물셋이라고 말하며. 예준의 목구멍 안쪽이 뜨겁게 조여들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의 필터가 이빨 사이에서 찌그러졌다. 예준은 입에서 담배를 빼내어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한 발짝. 침대 가장자리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서원의 얼굴이 예준의 그림자 아래 들어왔다. 형광등 빛이 예준의 어깨에 걸려 서원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음영을 드리웠다. 예준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서원의 이마 높이까지 고개를 낮추고, 침대 프레임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예준은 더 이상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앞으로 잘해."
그것이 예준이 짜낸 전부였다. 목소리는 여전히 갈라져 있었다. 시니컬한 어조를 흉내 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두 단어 안에 수백 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앞으로 잘해. 그 말은 파트너로서의 인사인 동시에, 칠백 년 전 별장 마당에서 서원의 손을 잡고 가자, 라고 말했던 것의 반복이었다. 서원은 모를 것이다. 이 남자가 왜 눈이 붉은지, 왜 목소리가 떨리는지, 왜 방금 만난 센티넬의 침대 곁에서 세 시간을 보냈는지. 서원에게 예준은 무뚝뚝하고 차가운 S급 가이드. 강제 각인으로 묶인 불편한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괜찮았다. 예준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원이 예준을 기억하지 못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예준이 서원을 지키면 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예준은 몸을 일으켰다. 코트 자락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예준은 한 손으로 눈가를 한 번 더 문질렀다. 이번에는 눈물이 아닌 잔여 수분을 닦아내는 동작이었다. 호흡이 가라앉고 있었다. 심장의 박동이 서서히 제 리듬을 되찾고 있었다. 예준은 서원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미세하게 들어 올렸다. 미소라고 부르기엔 너무 희미하고, 무표정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따뜻한 표정이었다. 서원이 그것을 알아채든 말든 상관없었다. 예준은 서원에게 등을 돌렸다. 회복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발걸음은 평소처럼 소리가 없었다. 문손잡이에 손이 닿기 직전, 예준은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서원을 보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푹 쉬어.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까."
문이 열리고 닫혔다. 예준의 발소리가 복도로 사라졌다. 회복실에는 심박 모니터의 규칙적인 전자음만이 남았다. 삐, 삐, 삐. 서원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복도로 나선 예준은 의료동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형광등의 차가운 빛이 감긴 눈꺼풀 위로 붉게 비쳤다. 옥상 문을 열자 밤바람이 예준의 얼굴을 때렸다. 바다 냄새가 섞인 짠 바람이었다. 예준은 난간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첫 모금을 깊이 들이마시자 니코틴이 폐를 채우며 손떨림이 가라앉았다.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예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기스의 인공 조명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고려의 밤하늘에 떠 있던 달을, 수백 년간 떠돌며 올려다보던 별들을, 예준은 이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빛 아래에서 매번 스러져갔던 서원이 지금 이 건물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밤바람에 흩어졌다. 예준은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입술을 열었다.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였다.
"...서원아, 이번엔 내가 제대로 해볼게."
바람이 그 말을 삼켰다. 예준의 애쉬 블론드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담배의 붉은 불빛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였다. 내일부터 새로운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서원과의. 서원이 자신을 낯선 타인으로 보는 그 일상이. 예준은 그것을 견딜 수 있었다. 수백 년을 견뎌왔으니까. 바람이 되어 곁에만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같은 땅을 밟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서원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작은 이것으로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