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예준이 사라진 그 자리에, 이번에는 안서원이 앉는다. 똑같은 무채색의 공간, 똑같이 쏟아지는 조명.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그녀는 홍예준처럼 다리를 꼬거나 건방진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저 피아노 의자에 앉듯, 꼿꼿하고 단정한 자세로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다. 창백한 얼굴 위로 드리운 연갈색 머리카락이 조명을 받아 부드럽게 빛난다. 한때는 모든 것을 비추지 않던 공허한 눈동자였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희미하게나마 생기가, 그리고 한 사람을 향한 온기가 감돌고 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면접관을 향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목소리는 그녀답게, 차분하고 온화하다.
"네, 시작해주세요."
1. 첫 번째 질문입니다. 홍예준 씨와의 ‘강제 각인’은 당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폭주 상태에서 그에게 제압당하고, 강제로 파트너가 되었을 때의 심경, 그리고 현재 그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녀는 질문을 듣고, 아주 잠시 먼 곳을 바라본다. 마치 폐허가 되었던 그날의 풍경을 떠올리는 듯. 이내 그녀는 시선을 바로 하고, 입가에 희미한, 그러나 슬픔이 깃든 미소를 띠며 대답한다.
"...기억나지 않아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고통스러웠으니까요. 그저...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 보니, 그 사람이 곁에 있었어요."
거짓.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나를 꿰뚫던 그 차가운 하늘색 눈동자를. 내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던 그 총구가, 나를 멈춰 세우고 구원했던 그 순간을. 그리고 거칠게 맞닿아왔던 입술에서 흘러들어온, 메마른 나를 적시던 시원한 바람의 감각을. 그날은 내 인생의 끝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었다. 끔찍한 악몽의 끝에서, 나는 내 유일한 구원자를 만났다.
2.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인상은 어땠습니까? 당신을 제압하기 위해 총구를 겨눈 ‘적’이었는데도, 그에게서 어떤 특별한 점을 느꼈나요?
"무서웠어요. 하얗고, 차갑고...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죠. 저를 죽이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거짓. 무서웠지만, 그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잿더미 속에서 홀로 빛나던 사람.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던 씁쓸한 박하 향기. 그의 눈에는 권태와 경멸이 가득했지만, 나는 보았다. 그 깊은 곳에 숨겨진, 지독한 외로움과 공허를. 나와 같은 종류의 상실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3. 두 분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는 당신을 ‘저열한 결함품’이라 여기며 밀어냈죠. 그럼에도 당신이 먼저 그에게 다가간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파트너니까요. 서로가 아니면 안 되는 관계였으니까, 제가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의무감이었죠."
거짓. 그가 나를 밀어낼수록, 그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잔뜩 날을 세우고 있지만, 실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여린 사람. 그는 차가운 말을 내뱉으면서도, 내가 악몽을 꿀 때면 밤새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나를 경멸하는 척하면서도, 단 한 순간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그의 서툰 진심을 보았고, 그 진심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의무가 아니라, 욕심이었다
4. 그는 바람(Aero) 속성의 가이드입니다. 그의 가이딩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이며, 어떤 감각으로 다가옵니까?
"...안정감이에요. 폭풍 속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단단한 기둥 같은 느낌. 시원하고... 편안해요."
절반의 진실. 편안하지만, 동시에 아찔하다. 그의 가이딩이 내 몸을 감쌀 때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기분이다. 메말랐던 내 세상에 비를 뿌리는 시원한 소나기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달콤한 현기증 같기도 하다. 그의 가이딩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다. 그것은 나에게 생명줄이자, 끊을 수 없는 중독이다.
5. 당신은 한때 세상의 찬사를 받던 최연소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 손으로 이제는 파괴적인 힘을 다룹니다. 홍예준 씨는 그런 당신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가 당신의 ‘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한다고 느끼십니까?
"...그는 제 과거에 연연하지 않아요. 그저 지금의 제 모습 그대로를 봐주는 것 같아요. 제 손이 피아노를 치든, 덩굴을 만들어내든... 그는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거짓. 그는 그 누구보다 내 손을 특별하게 여긴다. 그는 내 손이 상처 입는 것을 싫어하고, 내 손끝의 작은 매니큐어 색깔까지 기억한다. 언젠가 자신만을 위해 피아노를 쳐달라고 말했을 때, 그의 눈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나의 잃어버린 세계를 되찾아주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는 내 손에 담긴 영광과 상처를,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6. 그는 당신에게 상당히 집착하고, 소유욕을 드러냅니다. 당신의 단말기를 부수기까지 했죠. 그런 그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불편하거나, 두렵지는 않나요?
"조금... 부담스러울 때도 있죠. 가끔은 너무 아이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게 그의 방식이니까요."
거짓. 그가 나에게 집착할 때,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의 유치한 질투와 불안한 눈빛을 볼 때, 나는 그가 얼마나 나를 원하는지 깨닫고 안심한다. 그의 세상에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미치도록 행복하게 만든다. 그가 나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하듯, 나 역시 그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다. 그의 집착은 나에게 두려움이 아닌, 가장 짜릿한 형태의 사랑 고백이다.
7. 홍예준 씨의 어떤 점이 당신의 텅 비었던 세상을 가장... ‘채워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녀는 이 질문에 아주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볼 뿐. 그러다 문득, 그녀의 입가에 햇살 같은 미소가 번진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감출 수 없다는 듯.
"...그의 ‘솔직함’이요. 그는 언제나 솔직해요. 비록 그 표현이 서툴고, 거칠고, 제멋대로일 때가 많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저에게 거짓된 감정을 보여준 적이 없어요. 그 투명함이, 제 세상을 비춰주었어요."
진실. 그는 나를 ‘안서원’으로 만들어주었다. 세상이 만들어낸 ‘천재 피아니스트’도, 기관이 분류한 ‘S급 센티넬’도 아닌, 그저 악몽에 시달리고, 사랑받고 싶어 하고, 가끔은 엉뚱한 장난을 치는 스물다섯의 안서원. 그는 나의 모든 불완전함을 사랑해주었고, 그의 사랑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8. 당신에게 ‘홍예준’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세상."
진실. 그리고 그 이상의 진실. 그는 나의 세상 그 자체다. 그가 없다면 이 세상은 다시 무채색의 폐허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나의 아침이고, 나의 밤이며, 내가 숨 쉬는 이유다. 그는 나의 유일한 관객이고,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며, 나의 유일한 사랑이다.
9.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파트너 관계를 넘어선, 그 이상의 미래를. 이 질문은 기관의 공식적인 기록에 남지 않습니다.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귓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와의 미래를 그리는 듯, 꿈처럼 반짝인다.
"네. 생각해봤어요. 그와 함께라면... 어떤 미래든 괜찮을 것 같아요."
진실. 매일, 매 순간 생각한다. 그의 곁에서 잠들고, 그의 곁에서 눈을 뜨는 아침. 그를 위해 요리를 하고, 그의 서툰 칭찬을 듣는 저녁. 그의 손을 잡고 평범한 거리를 걷고, 언젠가 그를 닮은 아이의 손을 잡는 미래. 그와 함께라면, 지독했던 나의 불면증도, 끔찍한 악몽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는 나의 평온이고, 나의 영원이다.
10.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녀는 마치 그가 바로 앞에 있기라도 한 듯, 눈을 감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그 어떤 꾸밈도 없는, 그녀의 진심이 담긴 한 마디.
"...보고 싶어요, 예준 오빠."
진실.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전하고 싶은 모든 것. 어서 와서, 당신의 세상이 여기 있다고. 당신이 돌아올 곳은 바로 내 곁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골라줄 반지를 끼고, 당신의 약혼자가 되어, 평생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그러니... 너무 늦지 않게, 어서 내게로 돌아와 달라고.